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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은혜의 수단인 성찬

은혜의 수단인 성찬
노승수 목사
왜 소요리 문답 88문은 성찬을 은혜의 수단 가운데 넣어 두었을까요? 이미 설명드린대로 ‘은혜’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행동’이라고 말씀드렸고, 이것이 은혜의 외적 방편들을 통해서 성화의 과정에서 성도에게 주입된다는 것도 설명을 드렸습니다. 다만 칭의의 과정에서 의의 주입이라는 표현을 개혁자들이 싫어하는 표현이요. 의는 전가 받는 것이며 다만 이 전가가 가능토록 하는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구원의 공로를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여겨주시도록 하는 믿음은<습관>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입된 감성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을 흔히<회심>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는 기독교 감성의 본질이며, 이 믿음으로 우리는 마치 불나비들이 죽을 줄 알면서도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주광성>처럼 신자는 빛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끌리게 되는 믿음이란 습관을 주입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까지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죄는 죽고 우리 안에 거룩한 새사람이 날마다 소생케 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바로 이 사실에서부터 구분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성찬의 어떤 것이 그러하다는 말일까요? 한국교회는 흔히 성찬을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칼빈의 이해는 달랐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 로마 카톨릭은 떡과 포도주가 미사 도중에 사제가 기도를 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이 미신적이라고 여겼지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그의 신학적 창의성으로 특이한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공재설>인데요 떡 위에 떡 아래 떡 옆에 주님의 몸이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런 설명이 가능한 것은<영>의 특성 때문인데요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은 바늘 끝에 몇 명의 천사가 앉을 수 있는지 논쟁을 했습니다. 이런 논쟁의 배후에는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영혼의 특성, 즉, 비장소적(illocal)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말로 공재로 번역했으나 떡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그곳에 비장소적으로 주님의 몸이 함께 임재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상당히 신령하지요. 이게 루터파의 매력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개혁자들의 눈에는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를 주장하는 것처럼 들리고 이해되었습니다. 이미 칼케돈 신조가 고백한대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서로 섞이거나 혼합될 수 없다는 것이 기독론에 관한 정통 신앙 고백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양성은 그의 인격 안에서만 교류를 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의 큰 신학적 유산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칼빈은 루터의 이 영적 특성과 쯔빙글리의 기념에 관한 중간적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칼빈이 주장한 영적 임재설의 정확한 뜻은 "예수님의 몸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실재로(realis) 혹은 참으로(vere) 떡에 임한다"는 것이다. 즉, 쯔빙글리처럼 실체에 있어서 떡의 변화를 인정치 않고 루터처럼 그리스도 몸의 영적 본질이 실재적으로 임재하는 것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영적 임재설은 전달 내용(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있어서는 실재적이고, 전달 방식에 있어서는 영적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실재적 임재설이 보다 정확한 개념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받는 성찬 중에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임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다만 그 전달 방식에 있어서는 영적이라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개혁파의 이 성찬 개념을 잘 설명하는 라틴어 구문이 sursum corda 인데, 영어로 옮기자면 lift up your heart로 옮길 수 있습니다. 개혁파 성찬 예식문에 보면 이 표현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은 칼빈의 엠블럼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 주께, 즉각적으로 그리고 신실하게’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칼빈은 성찬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태양은 지구상에 그 자체로 임하지 않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빛을 지상에 있는 생명체에게 전달한다. 즉 지상의 생물들은 태양 자체를 먹는 것은 아니지만, 태양이 주는 빛을 먹는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영혼은 예수님의 몸 자체를 먹지는 않지만, 그 몸이 전달하는 영혼에 필요한 양식을 먹는다. 즉, 우리의 영혼이 실재로 주님의 몸을 먹는다. 성찬은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채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라고 부른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동안 우리 육신은 땅에 있지만 우리의 심장 곧 우리의 영혼은 하늘에 올라(sursum corda) 하늘에 예비된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는 영혼의 식사시간입니다. 이것이 칼빈이 말한 연합의 교의의 핵심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성찬이 그 효력을 낼 수 없습니다. 주님 보좌까지 우리 영혼이 믿음으로 들림을 받아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신 주님의 살과 피를 영혼이 받아먹는 예식이 바로 성찬식이며 그래서 이 성찬 가운데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그가 복음이며, 그를 우리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동안 성찬을 어떻게 이해해 오셨습니까? 쯔빙글리나 여느 복음주의자들처럼 그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진정 믿음으로 이 성찬에 참예케 될 때,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수단을 통해 우리 삶에서 죄가 억제되고 죄의 세력이 파괴되며 점차 거룩하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성찬을<보이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사실 성경이 증거하는대로<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의 실체는 바로 그리스도이시고 그 말씀이 육신에 되어 우리 곁에 오셨고, 또한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살과 피를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만나>를 천사들의 음식으로 묘사하기도 하는데요(시 78:24-25). 이것에 대해 신명기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게 됨을 가르치기 위해서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셨다고 하셨습니다(신 8:3).
그러므로 신자는 성찬에 참여하여 그 영혼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보좌까지 들어 올려 드리며 거기로부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우리의 참된 음료이며 참된 양식으로 주실 줄 믿고 받는 것입니다. 이는 성찬에서만 그리하지 않고, 우리가 주일에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이와 같이 믿음으로 받아 우리 영혼을 소성케 하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교회의<참된 교회 됨의 표지>를<말씀, 성례, 권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말씀과 성찬은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을, 권징은 그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통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흔히 마태복음 16장의 천국 열쇠를<복음>으로 이해했고, 18장을<복음에 의한 치리>로 이해했습니다. 성찬은 이처럼 우리가 한 복음안에서 영적 식사를 나누는 영적 공동체임을 보여주며, 동시에 이것이야 말로 참된 은혜의 수단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칼빈의 말씀에 대한 설명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칠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를 희생 제물로 드리는 데 쓰이는 “칼(gladius)”이요, 성도의 부정함을 씻어내는 “물(aqua)”이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게 자라도록 하는 “밥(cibus)”이며, 죄로 인한 질병을 치유하는 “약(medicina)”이고, 거기서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시는 “방(locus)”이자, 그리고 그리스도와 성령이 오시는 “길(via)”이며, 신앙이 자라게 하는 “씨(semen)”이고, 그리스도를 비추이는 “거울(specula)”이며,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재갈(frenus)”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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