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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강단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는 직역을 하자면,<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디아>라는 전치사로부터 시작되는 전치사구로 이루어져있는데,<디아 피스티에오스 이수 크리스투>로 성수격이 일치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의 소유격 조사를 2:20, 3:22, 롬 3:22, 26, 빌 3:9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두 가지 정도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주격적 소유격으로<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번역할 수 있고, 이 때, 해석은 그리스도의 성실함 혹은 진실함으로 번역이 가능하긴 합니다. 성경의 용례로 보건대, 이런 식으로 사용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둘째, 목적격적 소유격으로<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한글 개역 성경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하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이 해석 안에서도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원천으로 하는 믿음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체로 하는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믿음의 원천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이며, 성경 전체의 신학과 선배들이 남긴 신앙고백 및 교의 신학과도 일치를 이룹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은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것이 가능하게 해주시는 분 역시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시고 두번째 아담으로서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도 온전한 사람으로서 믿음을 가지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시며, 인류의 구원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 해석은 롬 5:19과 서로 통합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래서 성경의 원래적 사상은<믿음과 순종>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결과 순종이 열매로 들어 나는 것입니다. 이는 의롭게 됨에 대해 설명하면서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이 두가지 해석 모두 성경과 신학의 지지를 받습니다. 바울의 이 표현 속에는 이 두 의미가 모두 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번의<의롭게 됨>은 모두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과 동시에<율법의 행위>가 세번 대조해서 등장합니다.<의롭게 됨>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받는 것임을 알 수 있고, 그것은 앞서 설명한<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며, 결코<율법의 행위>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성경이 증거하는대로 율법은 지키도록 힘써야 하는 것임에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주신 것입니다. 구약에서<의로움>의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창세기 38장에 나옵니다. 38장의 기록은 독특한데요. 37장부터 요셉에 관한 기록이 나오다가, 삽입 형식으로 38장에 유다와 다말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기업 무름>에 관한 유다의 의롭지 못한 행동과 다말의 의로운 행동이 대비되어서 등장하고 잘 아는대로 이 기록은 마태복음에 그리스도의 계보와 직접 연관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옳음>곧<의로움>의 이미지는<언약에 대한 신실함>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바울이 15절에서 유대인을 이방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언약>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라고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은 언약 안에 있고 이 이방인들은 언약 밖에 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언약의 율법 안에 있음으로 이방인과 같이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6절의 끝부분에<육체>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15절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성을 강조한 것이라면 16절 마지막 부분은 둘 사이에 차별이 없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로 요약하자면,<율법과 성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실체적 율법>과<그림자인 성전>을 , 신약은<실체적 율법><실체적 성전이신 그리스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꾸어 이야기하면<율법>과<그림자로서의 복음>과<율법>과<실체로서의 복음>으로 바꾸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성전으로 나아가는 도구이지 그 자체로는 의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율법의 행위를 할 수 있을만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메시지이지요.<인간의 무능력>하나님은 이 무능력에 대해서 탓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무능력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어떻게 해보려는<율법주의>를 더 강하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태초에 아담이 하나님 없이 해보려는 마음과 같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거짓교사 곧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뭐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으로는 부족하고<할례>와<율법준수>가 필요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복음의 진리>에서 멀어진<다른 복음>인 것이지요. 율법주의자들이 오해한 것은 언약에 신실한 것이 결코 그들의 죄를 없이 해줄 수 없고<의>에 이르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바로 16절의 설명입니다.<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생각이 나십니까?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저 세리과 같은 죄인이 아님을 감사하지요? 이것이 율법을 오해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글이 언약 안에 있었음에도 율법은<죄를 깨닫고><성전>으로 나아가 속죄를 청하는 방편임에도 불구하고 율법 자체로 이를 얻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방편은 믿음이라는 도구 외에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2010년 5월 16일 주일 강단 중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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