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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Calvin을 통해 살펴본 신자의 경제관

John Calvin을 통해 살펴본 신자의 경제관
-최재호(실로암교회 장로)

들어가는 말
신자가 이 땅을 살아가는 목적을 분명하게 정의하고, 또 바른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쉽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다. 창조주이자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을 섬기는 백성이 되고서 타락한 본성을 가진 옛 자아(自我)의 영향과 악한 영의 세력권 아래 있는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상당히 이율배반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법도(法度)를 알게 된 신자가 이 세상주관자인 악한 영의 통치영역인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어찌 조화되고 어울릴 수 있을 것인가.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고민꺼리 일 수 있다. 분명한 신앙을 가진 이는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삶으로 구현해낼 것인지, 아직 그렇지 못한 이는 신앙과 삶이라는 두가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할지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1)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궁금한 대목을 만난다.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손아귀에 있는 선택된 백성을 구해내시고 그 즉시 천상의 하나님의 나라로 들이지 않으시고, 이 땅을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그것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원리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하게 하시는 것인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말씀의 원리를 균형을 잃지 않고, 전체적 통일성을 가지고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유한한 우리 인간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1) 하지만 이 일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올바른 이해를 가지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오직 창조주와 섭리주이신 하나님만이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명쾌한 답변과 분명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으시지만, 계시의 빛 아래에서 성령의 가르침의 은혜를 경험한 앞선 믿음의 선배들의 진단과 해답을 통해 우리도 동일한 교훈의 빛을 미약하게나마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번에 2000여년의 교회 역사 가운데 큰 의미를 지닌 16세기 교회개혁의 시대를 살았던 믿음의 선배 존 칼빈(1509~1564)의 생각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며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의 자세-특히 경제활동과 연관하여-에 대한 교훈을 얻고자 한다.

Ⅰ. 인간의 실존
창조주 하나님의 위임과 명령에 따라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피조물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겨야 할 존재로 지음 받았던 처음 사람 아담.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정면으로’ 대적하고 거역하게 된다. 우리가 분명히 하고 넘어갈 점은 첫 사람의 치명적 범죄가 단순히 절대자 하나님의 명령 중 하나를 어겼거나, 사탄의 끈질긴 유혹에 어쩔 수 없이 넘어가고만 소극적 범죄행위가 아니란 점이다. 모두가 주지하듯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고, 그 마음으로 순종하기를 갈망하며, 또 그 지식과 감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지고 있었기에, 다른 말로 완전한 지정의(知情意)를 가지고 있으면서 저지른 범죄였다는 점에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범죄였음을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한다. 즉, 전체 인간과 피조물들을 대표하는 존재인 첫 사람의 범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특별한 존재이자 창조세계를 위임받아 관리해야 할 대리통치자가 도리어 거룩한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을 작정하고 침범하여, 그분의 영광을 찬탈하고자 자행한 치명적 범죄행위였던 것이다.

그 결과로 아담은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단절되고 떨어져,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존재가 되었다. 나아가 아담으로부터 난 모든 인간은 죄 아래 팔려 영원한 사망과 심판,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같은 선언에는 예외가 없어, 모든 인간들은 동일한 죄의 형벌과 저주를 받고,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傾向)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의 생각과 행동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반역하며 끝없이 하나님을 저항하며 대적하게 되었다.2)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자행된 범죄의 결과는 수평적인 형태로도 나타나,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가 처음 창조의 지위에서 함께 타락하여 인간과 적대적 관계가 되었다.3)

Ⅱ. 구속, 거룩한 삶으로 부르심
한편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창세전에 선택하시고, 죄값을 완벽히 치르고 인간이 불순종한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순종하신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삶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 승천하심을 통해 완전한 구원의 길을 여셨다. 이처럼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된 것, 자신만을 사랑하고 위하던 인간이 천상의 시민이 되어 하나님과 그의 법을 기뻐하게 된 것, 세상이 아니라 영생을 소망하며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타락한 우리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법을 싫어한다는 것을 기억해본다면, 이 일은 결코 우리 인간의 자연적(혹은 본성적)인 의지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더 분명하게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이 그분의 은혜의 선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 마음속에 심겨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없는(결핍된),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우리와 반대되는 어떤 일을, 우리의 바람이나 소망과 전혀 상관없이 ‘주권적으로’ 행하신 일이다.4) 전적인 삼위 하나님의 사역, 성부 하나님의 영원 전 무조건적 선택과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와 성령의 효력있는 부르심의 은혜로 인해 죄와 죄책(罪責)을 용서받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리에서 그를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자리로 옮겨졌다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도, 머리로 이해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은혜이다.

멸망받을 인생을 그리스도를 통해 불의한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 당신과의 관계회복을 통해 본래의 신분과 상태로 회복시키신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자신의 본성과 대치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인간을 부르셔서 처음 지음 받았던 존재로 회복시키는, 다른 말로 중생(重生)시키시는 목표는 바로 하나님의 의와 거룩, 그분의 이름과 영광에 조화되는 존재(자녀)가 되게 하여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어울리는 삶을 살도록 함에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어 명령하신 삶으로 응답되는 것이 신자의 본분이다.5)
실상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시키는 일과 연관된다. 다시말해 누가 인생의 주인인가의 문제다. 그것이 곧 칼빈 선생이 말하는 경건의 삶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의 삶은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6) 그러므로 하나님과 연합함은 더욱더 그분의 거룩을 덧입어 살아가야 할 이유와 근거가 된다.

칼빈 선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몸에 접붙여 주셔서 우리로 그의 지체가 되게 하셨으니 흠과 티가 없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하며,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리우셨으니 땅의 것들에 대한 사랑을 제쳐두고 전심으로 하늘을 사모하는 것이 합당하다󰡓면서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드리셨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며 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7)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데, 경건이 교회 안에서는 물론 세상의 삶 속에서도 해당되는 문제이란 점과, 나아가 교회와 세상의 영역적 구분이 아니라, 중생한 신자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란 것이다. 여기에서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coramdeo)'의 삶의 원리를 가르친다.
하지만 ‘코람데오’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여전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칼빈 선생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떠한 거룩한 법에 순종함에 있어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만한 선행을 행하거나, 어떤 공로를 세울 수 있는 자가 없으며, 단지 '거룩의 의무에 있어 첫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8) 다시 말해 이 땅에서 사는 우리는 결단코 완전한 상태와 경지에 도달할 수 없으며,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한 출발을 갓 시작한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주는 우리가 마지막 날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중단될 수도, 중단해서도 안된다. 우리의 목표점이 분명하게 주어졌고, 중생이라는 출발선에서 출발은 했지만 그 결승점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내가 필요하다.
동시에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아닌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성령의 사역임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결심과 각오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점에서 합당한 겸손(엄밀한 의미에서 부적절한 표현이지만)으로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해야 한다.

Ⅲ. 세상 속 신자들에게 주어진 삶의 원리
그런데 우리에게 주(主)로부터 주어진 거룩한 삶에 대한 명령은 어디까지 해당되는 것인가. 하나님에 대한 이른바 영(靈)적인 일에만 해당되는 것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부대끼는 세속적이고 지극히 땀냄새나는 삶에는 해당되지 않는가.

먼저 생각할 점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거듭난 신자에게 있어서 거룩 혹은 하나님의 법과 조화되는 삶에 대한 명령은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해당되는 명령이 아님을 기억하자. 그것은 교회와 세상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코람데오(coramdeo)'의 정신은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벗어날 수 없다는데 있다.9) 우리의 삶 전체가 고스란히 하나님의 눈 앞에 드러나고 노출된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영광이 미치는 않는 영역은 단 한뼘도 없다. 그러므로 거룩의 명령은 삶의 전 영역에 있어 해당되는 지엄한 명령이며, 자비하고 선하신 아버지의 엄위하신 명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본성을 가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이름을 구하고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의 영광과 이름을 드러내고 높이기를 원한다. 거듭난 우리에게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 거듭거듭 자기를 부인할 것을 명하신다. 자기부인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육신)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속한(거듭난) 존재로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칼빈 선생도 마태복음 16:24의 주석에서 “자기부정은 그 범위가 매우 넓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데 집착하고 있다. 우리들은 자신의 지성을 거부하고 육신의 온갖 정욕을 끊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다스리시도록 우리가 전무(全無)의 상태로 바꾸어지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자기 부인은 육체의 모든 멸망할 것들과 결별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가르친다.10)
그러면 신자의 삶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어디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 되는가. 성경은 그것이 ‘신자의 전 영역의 삶에 있어 해당됨’을 명백히 말씀하고 있다.11) 12) 칼빈 선생도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께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졌으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면 생각하거나 말하지도, 계획하거나 행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13) 그러므로 나를 부인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넘고, 교회와 이웃에 대한 관계에까지 확장되는 개념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자기애(自己愛)는 심지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정도로 강렬하다.

여기에서 모든 인간은 누구의 예외도 없이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한다. 그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사탄 혹은 그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보다도, 자신의 거듭나지 못한 옛사람의 본성과 맞서 싸우는 것이 가장 힘든 싸움이란 점이다. 24시간, 365일 자신을 따라다니는, 아니 뿌리깊이 자리한 내면적, 본성적 자아와 싸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뿐더러, 이 땅에서 절대로 끝나지 않는 싸움이기에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생각을 죽이며 한발 한발 하나님과 그분의 뜻으로 나가는 것이다. 물론 구원을 위해 의로운 삶이 필요하다거나, ‘심판대 앞까지 유보된 칭의’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14) 따라서 이 순종은 율법의 요구에 대한 의무감이나 두려움이 아닌,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감사에서 나온 자발적 순종이다.

이런 고통과 비참 속에 있는 신자의 삶이기에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제 1문은 교회에게 허락된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위안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15) 신자의 이 싸움이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이 싸움의 시작과 끝이 내게 속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싸움이요, 주께서 시작하셨고 완성하실 것이란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종국에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다는 약속은 모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교회에게 주어진 궁극(窮極)의 은혜가 된다.
이제부터 칼빈 선생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우리가 실제적인 삶의 자세, 특히 경제관에 대해 구체적인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Ⅳ. 칼빈의 경제관
거듭난 신자에게 있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며 접하게 되는 직업관, 더 넓게 경제행위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욕심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진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사랑과 욕망을 포기할 것을 명하신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님을 가르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내가 임의대로 처분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기신 것이므로-것이라고 말씀하신다.16) 그러므로 신자는 그것을 가지고 결코 교만하거나 자랑할 수 없다. 이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칼빈 선생은 명확히 인식했다.17)

1)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
칼빈 선생은 ‘부는 하나님의 은사에 의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만일 누군가가 부자가 된다면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열매이다. 하나님께서 복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실상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18) 이처럼 모든 것이 선하신 아버지이신 주께로부터 왔음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신자라면 마땅히 자신의 손에 받아 쥔 물질을 사용할 때, 그것을 창조하시고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신 이의 목적을 생각하며,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음식이라면,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신 주께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함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을 주셨음을 감사하며 음식을 대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시기 위한 목적도 있음을 기억하며 음식을 섭취하여야 하는 것이다. 또 그것이 의복이라면 몸을 보호하거나 인간다운 품위를 갖추도록 하는 필수적인 목적은 물론 아름다움과 정숙함을 충족시키도록 선하신 아버지께서 공급해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재화(財貨)는 그것이 가지는 필수적인 용도를 충족시키는 물론, 그것을 즐기도록 주셨으니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감사하고 찬양해야함을 가르친다.19) 그러므로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로 필수적 용도만을 인정하고 나머지 용도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는 빵과 물만으로 가능하지만 더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주까지 주셔서 기쁨과 즐거움, 활력을 공급해주신 때문이다. 단, 이 모든 것은 신자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불신자의 물질적 풍요나 부는 그를 더 세상의 즐거움으로 빠져들게 하는 화(禍)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단, 물질적 풍부나 결핍 자체가 그 사람의 신앙의 좋고 나쁨과 결부할 수만은 없는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시기도, 거두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20)

2) 부(富)-교회와 이웃을 위해 위탁(委託)됨
나아가 성경은 신자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와 신자의 이웃을 위해 신자들에게 ‘위탁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1) 그러므로 주인이신 하나님의 청지기가 된 신자들은 내게 맡겨두신 주인의 뜻이 무엇인가를 늘 기억하여야 한다. 교회 안에 각양 은사를 나누어 주신 것은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 온전케 하며,22) 또 교회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균등케 하는 원리’23)가 적용된다. 물론 교회 밖의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24)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각인에게 주신(위탁하신) 모든 것, 이를테면 직분을 비롯하여 물질, 재능, 지식, 건강, 기회, 권력 등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교회와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시는 만유(萬有)의 주인께서 위임하신 것이다. 따라서 주인되신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점유(占有) 혹은 보관하고 있다고 결코 개인의 것이 아니다. 덧붙여 칼빈 선생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사(재능, 물질, 명예, 지식 등)를 볼 때, 시기하거나 멸시해서는 안되며, 극히 존중하고 귀히 여기라고 가르친다. 그 모든 것은 선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25)
이러한 인식을 분명히 하였던 그에게 있어서 물질은 소유나 획득의 개념이 아니라 분배의 개념이었다. 칼빈은 우리가 재물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면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주변에 두셨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상속에 의한 것이든, 근면과 노력에 의해 획득한 것이든, 여하간 부를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풍요로움을 지나친 무절제로 낭비해서는 안되며, 형제들의 가난을 줄이는데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26)

사실 물질의 부요함이나 궁핍함이 본질상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막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부자들이 자기들의 부에 짓눌려 세상의 안락을 즐기며 사느라 자신들의 본분을 버리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거기에서 부자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위탁받은 물질을 쓰는 것과 그릇된 육신의 정욕을 억제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칼빈은 하늘의 영생(영원한 구원의 복락과 악인의 심판)을 묵상하는 일을 권한다. 그러면서 그는 물질을 쓰는 자는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며 빈곤을 조용히 참고 견디며 부유함을 억제하라는 권면을 주고 있다.27)

정리하자면, 부(富)는 우리의 형제들을 돕는데 사용하라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28) 그래서 칼빈 선생은 부자들의 자선행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의 사회적 경제적 생활을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부자들의 마땅한 의무이므로 정성을 다하라고 했다. 좀 더 나아가 그는 부자가 빈자를 돌아보고 돕는 것은 바로 ‘자신의 신자됨을 확인하는 은혜’라고도 생각했다. 부자의 선한 행위 그 자체 때문이나 공로가 아니라, 물질을 대하는 그의 자세를 통해 선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섬기며 순종하는 신자됨이 그렇게 나타나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성경에서 배워야 할 분명한 원칙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나의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이 선하신 우리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주어진 것이기에 반드시 주신 분의 목적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성경은 주인에 의해서 위탁물이 제대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결산의 때가 있다는 것도 명백하게 가르치신다. 이를테면 ‘주인의 경고가 뒤따르는 위탁’이란 셈이다.

3) 부(富), 어떻게 획득하고 관리(사용)할까
다음으로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취득하고 관리 혹은 사용하여야 할까를 좀더 깊이 생각해보자.
먼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기회를 따라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며 부를 얻고, 그것을 잘 관리하고 사용하라는 권면을 준다. 두 가지 성경본문을 살펴보자.
먼저 데살로니가전서 4:11~12에는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28에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정당한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과 그것이 불신자들에게도 소중한 교훈이 될 수 있도록 하라는 이해를 준다. 또 직업 활동을 건전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행하여 빈궁한 자, 혹은 필요한 자를 도울 수 있도록 경제활동에 힘쓰라는 명령이다.

칼빈 선생도 이 본문의 가르침을 ‘한가롭고 침착하게 자신의 일을 하라’와 ‘자신의 소명의 여러 임무에 몰두하고 헌신하라’는 말로 이해한다. 그리고 조언하기를 먼저는 각자가 생계를 유지할 능력을 갖추라는 것이고 둘째는 불신자들 앞에서도 존경받는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29) 또 그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는 부정한 방법을 버리고 합법적으로 남을 해치지 않는 수고를 하여 자기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고 남에게 그것을 적절하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라’고 해석한다. 즉 정직한 노력을 통한 경제생활을 할 것과 다른 사람의 필요를 공급해줄 수 있도록 힘쓸 것을 권하는 것이다.30) 또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제8계명을 해설하면서 남의 돈이나 재산을 폭력과 속임수로 도적질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물론, 우리가 서로를 위해 지불해야 할 봉사의 의무를 거절하는 것도 이웃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며 그 범위를 확장해 정의하고 있다.31)

참고로 칼빈 선생은 다른 곳에서 신자가 부를 획득하는 방식은 정당한 방법으로, 성실한 노동행위를 통해야만 하며 지나치게 높은 이자놀이32)나 투기와 같이 불로소득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견해를 밝힌다.
정리하자면, 칼빈은 열심히 수고하되 정당한 방법으로 사회의 유익을 위한 직업을 가질 것과 그러한 경제활동을 통해 부를 쌓을 것, 자신도 부를 누리되 이웃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애쓸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와 지체, 그리고 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위한 신자들의 의무를 생각해보면서도 반드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칼빈 선생이 신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가정을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가 우선적으로 부여된다고 생각하여,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고하고 노동하는 것이 경건생활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노동으로 아내와 자녀들을 부양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당연한 의무이므로 농부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데도 밭(자신의 생산기반으로서)을 팔아버린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통해 우리가 먼저 가족을 부양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무엇인가를 나눠줄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33)

그러면 신자는 어떤 직업, 어떤 노동을 하며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생각해보자. 사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게 되고 그 일을 통해 교회와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게 된다. 붙잡아야 할 한가지 원리는, 우리가 가진 직업과 그에 따른 노동의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사탄의 일이 아닌 한 마음에 복음의 지배를 받으면 그의 모든 활동은 경건한 것이란 점이다. 여기에서 이른바 ‘직업소명설’이 나타난다. 모든 사람은 그 일을 통해, 혹은 그 일의 자리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칼빈 선생은 자신이 신앙을 포괄하는 교리(敎理)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거기서 구원이 시작되고 마음속에 들어가 일상생활에 전해지며, 그로 인해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반드시 열매를 맺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34) 즉 그에게 있어 교리는 삶의 열매로 연결되는 개념이다. 직업과 노동은 바로 신자가 자신의 교리를 삶의 열매로 자리잡게 하는 현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직업은 하나님과 교회, 이웃을 유익하게 하는 큰 틀에서 자신의 신앙의 도리를 삶의 열매로 체화하는데 적합하다면 어떤 것이라도 경건의 자리인 셈이다.

칼빈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이러한 생각들을 사회적 관점으로 확대했다. 그의 고린도후서 8장 15절 주석에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것의 근원이 무엇이든 ’만나(manna)‘와 같다. 우리의 장래를 위해 지나치게 쌓아두며, 우리의 가련한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것으로 부를 축적해서는 안된다.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완전히 똑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굶주리는 사람이 없고 남을 희생시키면서 부를 축적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평등은 지켜져야 한다’며 사회 구조문제를 논한다. 이 말은 우리 시대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더하여 그는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은 부자는 절제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실족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인 셈이다.

4) 부와 가난에 대한 신자의 이해
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동시에 가난 혹은 빈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 부가 반드시 하나님의 복과 일치하지 않음을 생각했다면 빈곤도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 혹은 심판과 동일하지 않다. 물론 칼빈은 가난(빈곤)을 반드시 불행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가난이 우리를 경건하게 한다면 더없이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난에 처한 자는 과도한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고통 받지 말고, 인내하며 견딜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자신 극심한 가난 중에도 검소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일에 몰두함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전했다.35) 가난과 질병, 가족들과의 영원한 이별 등은 결코 반길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신뢰한다면 그분에게서 온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의 유익을 위해 특별한 의도 중에 주어진 것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같은 생각은 <기독교강요>를 통해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신자는 부귀(富貴)에 있어서 자신의 생각과 바람이 현실과 다르다 해도 결코 조급하거나 비관해서는 안된다. 빈부와 귀천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분배하시는 것이며 신자의 구원에 가장 유익한 방식으로 이뤄가시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36)

그러나 이같은 원리를 우리가 안다고 해서 그러한 삶을 살아간다거나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는 가운데 옛 본성과 끊임없이 싸워가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켜나가는 처절한 싸움에 의해 조금씩 쟁취될 뿐이다. 이 싸움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고, 막연히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해 끝없이 욕심내는 우리의 안타까운 상황도 한순간에 종료될 수 없다. 오직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정(情)과 욕심을 지속적으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통해 가능하며 천상에 연결된 영원한 복락에 대한 갈급한 소망이, 이 땅의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존재들에 대한 욕망과 비교할 수 없음을 더 깊이 인식해감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5) 칼빈의 견해 요약
이러한 삶을 살아가야 할 인간들에게 주어진 칼빈 선생의 권면을 한번 더 새겨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그는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관계없는 번영을 동경하거나 바라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하나님께만 참된 안정과 안식이 있음을 기억하라고 가르친다.
둘째로, 이 땅에서 악인들도 명예와 부귀를 누리지만 결국 그것들은 불행을 초래하기에 그들을 보며 부러워하거나 실족하지 말 것을 명한다. 그들에게는 참 행복이 없으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고 인도하심을 따르며 주께서 베푸시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지, 부귀영화를 동경하거나 자신의 재주나 부지런함을 의지하거나 헛된 행운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한다.
끝으로 바라는만큼 일이 되지 않아도 조급하거나 비관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께 불평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37)

Ⅴ. 맺는말
우리는 앞서 물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칼빈 선생의 이해를 중심으로 신자의 경제관념에 대해 살펴보았다. 거듭난 신자도 사실상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기에, 세상의 반 그리스도적 문화와 가치에 영향을 받으면서 이 땅의 악한 존재들로부터 끊임없는 유혹과 그에 따른 고통을 당한다. 그런 중에 삼위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회복된 위치와 존재를 자각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결단이나 노력이 아닌,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함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해석하며 살아갈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도 세상의 경제논리와 구조를 벗어나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마땅히 경제행위를 통해 세상의 재화나 용역을 생산, 소비, 분배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다만 신자는 세상의 가치나 시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반하여 말씀이 제시하는 가르침에 따른 해석과 거기에 겸손히 순종할 뿐이다.

신자들은 이 땅을 살아가며 선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된다. 하늘 아버지는 신자된 우리에게 영의 양식과 함께, 이 땅을 살아갈 모든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다. 모든 사람이 하늘로부터 오는 은택(恩澤)을 입고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이는 오직 선택된 자들로 제한된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이 선하신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를 위해 사용된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며 그러한 고백과 조화되는 삶을 산다. 이는 창조주이시자 섭리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맡겨진 물질을 교회와 지체들, 그리고 필요한 이웃을 위해 사용하려 애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영원한 천상을 소망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가 잠시 머물 이 땅이 아닌, 영원한 천상을 소망하고 깊이 묵상하며 우리의 욕심과 자아를 죽이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한 신자들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이나 노동의 종류는 명확하다. 하나님의 법과 상충되지 않으면서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사람들을 해치는 일이 아닌 한, 나아가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일이라면 그 자리가 자신의 신앙교리를 열매로 체화(體化)시키는 부르심의 자리인 것이다. 이 직업활동을 통해 교회를 세워가고 지체들을 돌보며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다. 단, 여기에서 자신의 가정, 가족들을 돌보는 것이 가장 우선된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 신자의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며 모든 일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결산이 뒤따른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각주]

1)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1장 제6항에는 '하나님의 영광인간의 구원그리고 신앙과 실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지혜(진리)는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아니면 필연적이고 좋은 추론에 의하여 그것을 성경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  <개혁조직신학>, 이광호(칼빈아카데미) 3.4.6-3.4.7 참조.

3)  창 3:17~19,8:22 참고.

4)  <도르트신조강해> 1장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Cornelis Pronk(그책의 사람들).

5)  상게서 3.6.3 참조.

6)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기독인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그는 경건을 ‘이 세상의 삶속에서 세상의 부패함로부터 우리를 구별시켜 주고 참된 거룩함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어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3.7.3)

7)  상게서, 6.3 그리스도인의 삶구속의 은혜에 대한 응답 참조.

8)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16장 선행에 대하여 참고.

9)  시 139:7~10

10)  <기독교강요> 3.7에서도 칼빈은 “크리스천의 삶의 요체인 자기부인은 우리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1)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12)  “바울은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관계되지 않는 우리의 생활이나 행위는 없고,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먹고 마시는 일까지 관계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칼빈고린도전서 10:31 주석>

13)  <기독교강요> 3.7.1

14)  김세윤 박사(풀러신학대같은 이는 이와 같은 정통적 견해와 다른 입장을 보인다그는 2013년 행한 한 강의에서 “우리의 믿음으로 얻은 칭의가 심판 때까지 유보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즉 칭의론도 ‘이미’와 ‘아직’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신약 종말론의 보편적인 구도 속에서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구원을 지금 우리가 받음은 그 구원의 첫 열매에 해당하고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의 행위대로의 심판을 거쳐 구원의 온전한 수확을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즉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는 입장에 서있다. <크리스천투데이, 2013.04.26.>

15)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제 1문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안은 무엇입니까?

답 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이 모두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주께서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죄값을 치러주셨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셨습니다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듯이 주는 나를 지켜주십니다실로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16)  고전 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17)  <기독교강요> 3.7.4

18)  신명기 8:17,존 칼빈.

19)  <기독교강요> 3.10.2

20)  욥 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1)  성경은 자주 청지기를 등장시킨다포도원지기의 청지기(20:8), 지혜있고 신실한 청지기(12:42) 달란트비유(25:15이하), 불의한 청지기(16이는 우리에게 맡기신 이위탁하신 이를 기억하게 한다.  

22)  엡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어떤 사람은 선지자로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23)  고후 8:14~15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같은 본문 말씀을 칼빈 선생은 “주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형편이 허용 되는대로 난관에 봉착한 사람들을 돕고 그렇게 하여 풍요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이 나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이라고 이해한다.    

24)  칼빈의 사회와 경제사상의 중심주제는 ‘부()가 (가난한우리의 형제들을 돕는데 사용되도록 하려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존 칼빈>,장수민 498p

25)  Max Wever(1864~1920)는 그의 유명한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칼빈주의자는 신의 선택에 의한 구원의 확신을 자신이 소명으로 받은 세속적 직업 생활을 통해 얻는다고 주장한다그는 영국의 청교도신학자 리차드 백스터(1615~1691)를 종종 인용하면서 노동의식의 결여는 유기의 징후(141p)라거나 노동만이 구원의 확신을 제공하고(98p), 신앙을 증명하는 행위(107p, 153p)라고 말한다물론 우리는 이같은 그의 극단적 주장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선택과 구원의 확신은 구원을 약속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확신내적 증거와 성령의 증거(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제18장 2),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과 충성스러운 경외심죄에 대한 거룩한 탄식의를 추구하려는 거룩한 열망과 갈증으로 나타나지(도로트신경 제12그의 직업적 소명번영과 빈곤으로만 입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6)  고린도후서 8:15,존 칼빈

27)  <기독교강요> 3.10.4. 칼빈은 또 “가능한 한 적게 탐하며 반대로 사치를 제거하는 것은 물론 지나치게 풍족한 상태를 모두 끊어내며 도움되는 것들이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경계하는 것을 우리의 끊임없는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28)  <존 칼빈>, 장수민,2.18. 참조.

29)  <데살로니가전서>, 존 칼빈

30)  <에베소서>, 존 칼빈

31)  <기독교강요> 2.8.45

32)  1541년 칼빈이 제네바시의회에 제출한 교회법령을 보완한 1546년 시골교구의 법령에서는 고리대금업에 대한 규정이 있다고리대금업 어느 누구도 5%의 과도한 이율로 돈을 빌려주고고리대금업을 할 수 없으며자금을 압수하거나 사건의 경중에 따라 벌금을 내는 처벌을 받는다고 명기되었다. <칼빈의 제네바목사회임종구> 480p. 이는 칼빈도 당시의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고 있던 시기에 정당한 대부업에 대해서는 그 필요성을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33)  마태복음 10:20-22.부스마칼빈. <칼빈의 경제사상에 반영된 그의 영성권호덕재인용

34)  <기독교강요> 3.6.4 참조

35)  1539년 파렐에게 쓴 칼빈의 편지에서는 “Waldensian 형제들이 내게 1크라운 빚져 있다나는 그들에게 일부를 빌려주었고 나머지는 그들의 배달부에게 전달했다나는 그들에게 그것을 당신에게 전달하여 내 빚의 일부를 갚을 것을 요구했다나머지는 내가 갚을 수 있을 때 갚을 것이다나의 현재 상태는 매우 가난하다내게는 1페니도 없다.” <칼빈의 경제사상에 반영된 그의 영성권호덕백석대학교>

36)  <기독교강요> 3.7.9

37)  상게서 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