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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구약주석

아사셀 염소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아사셀 염소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문제 제기: 막 1:12~13 말씀을 보자.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검증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이 구절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로써, 사탄의 참소로부터 죄인을 자유케하는 예수님의 사역이 담겨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문 말씀은 이러한 감격적인 소식 대신 수 많은 물음표들을 만든다는 것이다:  “왜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신 것일까?”  “왜 예수님은 40일동안 광야에 계신 것일까?”  “왜 예수님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일까?”  “왜 예수님은 들짐승과 함께 계신 것일까?”  “왜 천사들은 예수님을 수종든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사탄의 우리를 향한 참소의 박멸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 16:7~10 말씀을 알아야한다.  왜냐하면 레위기의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16:7~10: 레위기 말씀을 보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하나님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하나님을 위하여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하나님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우리가 읽은 레 16:7~10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는 대속죄일에 일어나는 마지막 예식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대속죄일이 되면, 제사장은 크기와 모양새가 똑같은 두 마리의 흠없고 깨끗한 염소를 구한다.  그리고 제비를 뽑는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제비에 뽑힌 염소는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하여 그 목에다가 빨간 천을 두루고, “아사셀의 것”이라는 제비에 뽑힌 염소는 광야에 사는 아사셀을 위하여 구별하여 그 뿔에다가 빨간 천을 두른다.

하나님의 것과 아사셀의 것

그런후 두 염소에다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전가한 후 죽인다.  헌데 두 염소를 죽이는 방법과 그 의미가 아주 다르다.

1. 두 마리의 염소: 첫째 염소부터 보자.  제사장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한 첫째 염소의 각을 뜬후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르고 그 피는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언약궤에 뿌린다. 그러면 지성소안에 하나님 쉐키나의 영광이 가득 차게되고, 이는 이스라엘의 죄가 속해져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졌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것이 첫 번째 염소의 죽음과 그 의미이다.  둘째 염소는 이와 사뭇 다르다.  제사장은 아사셀을 위하여 준비한 둘째 염소를 광야로 몰아내어 (1) 굶어 죽이거나, (2) 들짐승에게 찢겨 죽게한다.  그때 염소의 뿔에 달린 빨간 리본이 하얗게 변하게 되고, 이는 이스라엘을 향한 사탄의 참소가 더이상 합법적이지 못함을 상징한다.  바로 이것이 막 1:12~13의 그림자인 레 16:7~10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아사셀은 누구이고, 그에게 염소를 보내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를 위한 염소는 무엇을 나타내나?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을 풀 수 있는 열쇠이다.

2. 아사셀:  아사셀부터 알아보자.  아사셀(עֲזָאזֵל)이란 ‘쫓겨난 귀신,’ ‘추방당한 악령’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잘젤의 유음화어로써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인 사탄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모세 이전의 사람들이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을 일컫기 위해 사용했고, 유대인들도 사탄을 일컫기 위해 그들의 문헌에 사용했다.  아사셀이란 신학적 광야에 거주하는 사탄을 나타내는 것이다.

3. 염소를 보내는 이유:  그렇다면, 염소를 사탄에게 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사탄에게 염소를 바치기 위함이 절대 아니다.  사탄을 예배하기 위함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참소자 사탄 앞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전가받은 염소를 굶어 죽이거나 들짐슴을 통해 찢어 죽임으로써 그의 참소를 합법적으로 잠재우기 위함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이 증거하는 사탄의 일은 인간의 죄를 합법적으로 참소하는 것이다.  계 12:10을 보면 하나님께 우리를 밤낮 참소하는 사탄을 볼 수 있다.  스가랴 3:1을 보라.  더러운 죄의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를 사탄이 계속 참소한다.  바로 이것이 사탄의 일이다.  사탄은 밤낮 쉬지않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참소했고, 백성들은 그로인한 영적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고통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죄는 물론 죄책감으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사탄의 참소로부터 오는 죄책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사셀 앞에서 굶겨 죽이거나 찢어 죽일 흠없고 깨끗한 염소를 제정하사, 그에게 이스라엘의 죄를 전가시키고 광야로 보내사 죽이심으로써 사탄의 참소를 온전히 막으셨던 것이다.

“사탄아 보라!  네가 밤낮으로 참소하던 이스라엘의 죄가 어디에 있느냐? 네가 쉬지않고 고발하던 이스라엘의 죄가 어디에 있느냐?  이 염소에게 있다.  이 염소가 어떻게 되었느냐?  이스라엘 백성의 죗값으로 이처럼 비참하게 죽었다.  너는 더이상 이스라엘을 참소할 수 없다.  내가 그 참소의 이유를 합법적으로 잠재웠기 때문이다.”

사탄은 더이상 이스라엘을 합법적으로 참소할 수 없다.  시도할 수도 없다.  그는 이스라엘이 지었던 과거의 죄를 입밖에 꺼낼 수도 없다.  왜?  죗값이 사탄의 눈앞에서 치러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아사셀의 염소를 준비시킨 것이고, 해방의 증거로 염소의 뿔에 달린 빨간 천을 하얗게 바꾸신 것이다.

4. 아사셀의 염소, 예수: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가 남았다.  아사셀의 염소는 누구를 상징하나?  그렇다.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에 나가사 사탄의 앞에서 찢겨 돌아가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사탄의 참소를 합법적으로 온전히 잠재우실 아사셀의 염소라는 것이다!  여기에 지혜가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되어 속죄제로 죽은 첫째 염소는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사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우실 예수님을 상징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구별되어 광야에서 굶거나 찢겨 죽는 둘째 염소는 십자가에서 찢기사 사탄의 참소를 잠재우실 예수님을 상징한다.  인간의 죄를 전가받은 두 마리의 염소는 전부 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 누구도 인간의 죄를 대신 질 수 없다.  천사도, 사탄도, 인간들도 말이다!  몇몇의 사람들은 아사셀의 염소를 사탄으로 규정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사탄은 죄의 원인이 아니다.  촉매제일 뿐이다.  고로 인간의 죄를 사탄에게 전가시킬 수 없다.  사탄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럼으로 대속죄일날 인간의 죄를 전가받은 속죄 염소 두 마리는 이중적 대속의 의미를 갖고 돌아가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얼마전 유대인들의 문헌을 읽다가 바리새 보수 학파인 샴마이와 바리새 개혁 학파인 힐렐의 뒤를 병합하여 이은 요하난 벤 자타이가 쓴 역사적 글을 접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유대인의 성전 역사를 반영하는 글로써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무엇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로부터 하나님께서 아사셀의 염소를 더이상 받지 않으셨다는 내용이다.  그 부분을 인용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 40년 전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해]부터 [두 마리의 염소를 뽑을 때 사용된 ‘하나님의 것’이라는] 패가 대제사장의 오른손에 들려지지 않았고, [아사셀에게 보낸 염소의 뿔에 묶어놓은 빨간]띠가 흰색으로 바뀌지 않았다. [메노라의] 서쪽 등잔이 [온종일] 타지 않았으며, 지성소의 문은 자기 맘대로 열렸다…

왜?  아사셀의 염소가 예표했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수치심을 다 안고 골고다 광야위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서 찢겨 돌아가셨기에, 이제는 그 염소가 필요 없게된지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제비가 대제사장의 오른손에 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더이상 염소를 광야로 보낼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더이상 또 다른 염소를 잡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히 7:27의 증언처럼 완벽한 희생제물이신 “[예수님께서]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기 때문에!  그래서 또 다른 희생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  그 분 안에만 참된 속죄가 있고, 그 분 안에서만 사탄의 참소는 영원히 그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에 녹아있는 배경이다.

모형론적 풀이: 이제 본문 12절을 보자.

1. 예수님을 몰아내신 성령님:  12절은 “성령이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헌데, 여기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몰아내셨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헬라어로 보면 성령님께서 능동자로 되어있고,예수님께서 수동자로 되어있다.  성령님께서 주체가 되어 예수님을 몰아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을 오해하지말라.  예수님께서 성령님께 억지로 떠밀렸다는 뜻이 아니다.  제사장이 아사셀의 염소를 광야로 보낸 것 처럼, 성령님께서 아사셀의 염소되신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셨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2. 광야에서 광야로…: 또 하나의 이상한 부분을 먼저 보자.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어디로 몰아내셨나?  “광야”로 몰아내셨다.  이상하지 않은가?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미 광야에 계셨다.  막 1:4을 보라.  침례 요한이 어디에 이르러?  “광야”에 이르러…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광야로 나오사 침례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가시기전 이미 광야에 계셨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다른 광야로 가셨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광야가 하나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여기에 아주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다.  4절에 나오는 “광야”는 지리적 광야를 뜻하고, 12절에 나오는 “광야”는 신학적인 광야를 뜻한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을 지리적 광야에서 신학적인 광야로 몰아내신 것이다. 왜?  신학적 광야는 타락한 마귀 아사셀이 사는 지역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가가 표현하고자 한 대비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타락한 천사 사탄을 만난다.

3. 사탄에게 시험을…: 또 하나의 궁금증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셨다는 것은 알겠는데, 시험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지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본문에 나오는 시험을 마태와 누가복음에 나오는 3가지의 시험과 동일시 하기 때문에 답을 얻지 못한다. 이 시험은 다른 시험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마태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3가지 시험은 예수님께서 40일을 굶으신 후에 받으신 시험이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나에게 절하라!”  40일의 금식이 끝난 후에 찾아온 시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험은 예수님께서 40일을 굶으신 후에 받으신 시험이 아니라, 40일 동안 굶으시면서 받은 시험이다.  도대체 무슨 시험인가?  본문에 “시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페이라조(πειράζω)로써,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진지하게 분별하여 자질을 검증하다는 뜻이다.  즉 전지하지 못한 사탄은 정말 예수님께서 레 16이 예표하는 아사셀의 염소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몰랐기에 40일 동안이나 면밀히 조사하여 검증했다는 것이다.  왜?  그의 참소가 합법적으로 박멸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죄가 전혀 없으신 아사셀의 염소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탄도 합법적으로 그의 참소가 박멸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속죄제를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죄를 찾기 위해 40일 동안이나 샅샅히 뒤진 것이다.  헬라어 성경은 사탄이 4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예수님을 검증했다고 암시한다. 그만큼 집요하게 조사한 것이다.

4. 40일 동안: 그렇다면, 왜 40일인가? 유대인들에게 40이라는 숫자는 4라는 땅의 숫자와 10이라는 하늘의 숫자가 곱해진 것으로써 충분히 충만하다는 의미를 띄고 있다.  사탄은 예수님을 4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충분히 검토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40일이란 날짜는 인간이 밥을 먹지않고 견딜 수 있는 최대의 날수를 상징했다.  모세도 40일을 굶었다.  엘리야도 40일을 굶었다.  예수님도 40일을 굶으셨다.  마귀는 인간이신 예수님께서 굶어 돌아가시기 일보직전까지 샅샅히 조사한 것이고, 결국 그분의 죄 없으심을 시인한 것이다.  이때부터 마귀의 태도는 돌변한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 마귀는 그분을 죄짓게하여 아사셀의 염소가 될 수 없도로 하기위해 시험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라!”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나에게 절하라!”  그러나 그의 수작은 수포로 돌아간다.

5. 들짐승과 함께: 마가는 여기에서 더 깊이 들어가 다른 복음서에는 찾을 수 없는 사건 하나를기록한다.  예수님께서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들짐승이라는 단어는 표범, 쟈칼, 늑대, 여우, 곰따위를 나타내는 단어로써 광야에 나간 아사셀의 염소를 찢어 죽인 야생동물들을 나타낸다.  이는 예수님과 아사셀의 염소를 연결하기위한 마가의 의도이다! 그렇다!  (1)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다. 왜?  제사장이 아사셀의 염소를 광야로 몰아냈기 때문이다. (2) 예수님께서광야에 있는 사탄에게 보내지셨다.  왜?  둘째 염소가 아사셀에게 보내졌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금식하셨다.  왜?  아사셀의 염소가 광야에서 굶어 죽었다는 것을 상기키시기 위함이다.  (4) 예수님께서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 아사셀의 염소가 들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처럼 십자가 위에서 찢겨 돌아가실 것을 택하사 사탄의 참소를 영원토록 박멸하신다.  바로 이러한 선전포고를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나가셨던 것이다.

6. 천사들의 수종: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있다.  13절 끝자락을 보라.  무엇이보이는가?  천사들이 예수님을 수종든다.  “수종”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네오(διακονέω)는 음식을 가져다 주며 섬기다는 뜻으로써 미완료 제 2 용법인 기동의 미완료형으로 쓰였다.  이는 40일을 굶으시면서 검증받으시고, 또한 3가지의 시험을 승리로 끝내신 예수님께 천사들이 음식을 가져다 주면서 섬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여기에도 신학적 지혜가 있다.  팔레스타인의 전쟁 문화를 보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원수의 영토에서 음식을 먹으며 승리를 축하한다.  적진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자라난 시편기자도 23편에 원수의 목전에서 밥상을 차려 먹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즉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는 아사셀의 영토였던 광야에서 천사들의 수종을 받아 음식을 드심으로써 당신의 온전한 승리를 예표함과 동시에 선전포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마 12:43에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라고 되어있는 것이다.  귀신이 물 없는 곳을 다니며 쉬기를 구하는데 쉴 곳을 얻지를 못한단다.  “물 없는 곳”이 어디인가?  이는 영적 광야를 뜻한다.  귀신들이 영적 광야를 돌아다니며 쉴 곳을 찾았지만 얻지 못했다.  왜?  광야는 귀신의 대장인 아사셀의 거주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왜?  예수님께서 광야를 정복하셨기 때문이다.  광야는 더이상 사탄의 거주 장소가 아니다.  광야는 예수님께서 정복하신 예수님의 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도 전에 모든 광야를 다 정복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신학적 복음이 들어있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도 전에 패배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완전히 패배했다!  그는 첫 번째 아담을 넘어뜨렸던 것 처럼,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을 넘어뜨리려 했지만,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보라!

(1) 아담은 죄 없이 사탄을 만났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사탄을 만났다.  아담은 넘어졌고,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2) 아담은 사탄이 찾아와서 시험받았고, 예수님은 사탄을 찾아가셔서 시험받으셨다.  아담은 넘어졌고,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3) 아담은 낙원에서 시험받았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받으셨다.  아담은 넘어졌고,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4) 아담은 동산의 모든 과일을 실컷 먹으며 시험받았고, 예수님은 40일을 굶으시고 시험받으셨다.  아담은 넘어졌고,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5) 아담은 돕는 배필과 함께 시험받았고, 예수님은 홀로 시험받으셨다.  아담은 넘어졌고,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6) 아담은 모든 동물과 평화로울때 시험받았고, 예수님은 거친 야생 동물 속에서 시험받으셨다.  아담은 넘어졌고,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7) 시험에 넘어진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시험에 이기신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을 떠나보내셨다.
(8) 아담은 사탄에게 참소받았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참소를 박멸하셨다!

우리의 영원한 원수 참소자 사탄의 입을 영원히 막으시겠다는 예수님의 선전포고가 광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된다.

 

끝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일을 완전히 확실하게 멸하셨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의 죄뿐만이 아니라 죄책감까지도 거두어 주셨다는것이다.  예수님께서 굳이 광야로 나가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곳에서 사탄에게 수모를 겪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40일 동안 굶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들짐승과 함께 계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골고다 광야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고 찢겨 죽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수치심과 죄책감까지도 거두시기 위함이다.  때문에 성경은 롬 8:1~2과 계 12:10~11에 증언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노라”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참소함도 없다!  사탄은 더이상 우리를 정죄할 수도, 참소할 수도 없다!  예수님께서 광야를 정복하시고 그 광야에서 찢겨 돌아가심으로써 사탄의 입을 합법적으로 막아버리셨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죄는 물론 죄책감과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는 사탄의 참소까지도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값을 다 지불해 주셨기 때문에!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가?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자유하라!  그분의 보혈 안에서 자유하라!  그분의 십자가 아래서 자유하라!  엘파소 광야인들이여!  이 광야에서 자유하라! 사탄의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전히 박멸되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부여잡고 그 안에서 자유하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사 사탄을 완전히 심판하시는 그 날까지 이러한 진정한 자유가 우리안에 충만해 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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