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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십우도와 우상

중국 송나라 시대 승려 곽암의 십우도라는 것이 있다. 원래 기원은 도가에서 유래한 팔우도(八牛圖)에 2개를 덧붙여 십우도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십우도(十牛圖)는 탐구할 "심"자라를 써서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하는데 불교나 도가적 색채로 보면, 소는 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재해석을 해보면 우상이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공교롭게도 성경에서 가장 대표적 우상은 소를 숭배하는 신앙이다. 이것은 애굽에서 시작되었는데, 소를 '아피스'라고 부르며 태양신의 성육신으로 숭배했다. 이 신앙은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블레셋과 두로의 신인 '바알(Baal)'은 황소신으로 '호통치고 고함을 지르는 자'란 뜻이며, 황소 신은 폭풍의 신이자 다산의 신이었다. 지중해의 황소 신은 암소 여신 아스다롯(Astarte)를 동반했는데, 그들은 온갖 창조활동을 지배했다. 해양 무역을 주로 하던 두로와 블레셋을 통해서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미노아의 소 숭배 신앙을 그리스인들이 나름 해석한 것이 미노타우로스 신화이기도 하며, 출애굽했던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도 이런 맥락과 관련이 있다. 인도-오리엔트 문명에 등장하는 광명신 미트라는 신성한 황소를 희생제물로 죽임으로써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중국의 농사의 신이라 불리는 삼황오제의 "신농(神農)" 역시 황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있는 신이다. 인도의 힌두교는 여전히 소를 신성시하는데 이는 이런 역사적 흔적들이다.

이는 조선은 선비 다음으로 농민을 두었고 조상신을 뜻하는 종묘와 토지신을 뜻하는 사직을 나라에 근간으로 둔 것도 이런 이유다. 시경에 등장하는 백성에게 농사를 가르쳤던 후직을 태(邰)에 봉했는데 이를 기려 그를 곡식과 농사의 신으로 삼는다(시경정역_하, 289) 곡식의 신인 직(稷)과 토지의 신인 사(社)를 합쳐서 사직이라 칭했으며 종묘사직은 그래서, 나라의 근간을 뜻했다. 지금도 광화문 서쪽으로 사직단이 동쪽으로 종묘가 자리해 있으며 그 동단과 서단이 정동진과 정서진이다. 토지와 곡식은 인간 삶의 근간이었고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는 농활 깃발도 이런 의미를 담는다. 그런 점에서 황소는 근본인 농을 이루는 신으로 혹은 우주의 근본 개념을 담는 신의 개념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도교와 불교의 이런 개념이 합쳐서 탄생한 것이 십우도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1) 잃어버린 소를 찾아나서고(심우:尋牛) (2) 그 발자국을 보고(견적:見跡) (3) 그 소 자체를 보고(견우:見牛) (4) 소를 붙잡고(득우:得牛) (5) 소를 길들이고(목우:牧牛) (6)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기우귀가:騎牛歸家) (7) 집에 와서는 소를 잊고(도가망우:到家忘牛) (8) 소도 자신도 함께 잊고(인우구망:人牛俱忘) (9) 근본으로 돌아가고(반본환원:返本還源) (10) 세속을 교화하는 (입전수수:入廛垂手)과정을 그림으로 그렸다

범신론적 그림이지만 초월적 신앙인 기독교적으로 재해석을 해보면, 소는 창조주와 구속주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하는 우상이다. 신앙이란 우리 삶의 부패의 근간을 이루는 이 우상을 걷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첫째, 심우는 내 안의 우상을 찾는 작업이다. 둘째 견적은 그 흔적을 찾고 셋째 견우는 우상이 무엇인지를 명백히 보는 것이며 넷째, 득우는 그 우상이 내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다섯째, 목우는 이제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며 여섯째, 귀우귀가는 여전히 우상 속에 있으나 그가 떠나온 본향, 곧 삼위하나님께서 돌아서는 것이며, 일곱째, 도가망우는 아버지께 다라라 비로소 우상을 잊게 되는 것이며 여덟째, 인우구망은 우상을 잊을 뿐만 아니라 거짓된 나를 버리고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교제에 초대되어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성부와 사랑의 교제에 이르게 되는 것이며 아홉째, 반본환원은 죄를 없이 하고 원래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며 열째, 입전수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물을 다스리는 교회의 지위를 회복케 됨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좀더 천로역정과 같은 기독교적 그림으로 우상에서 벗어나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찾아가는 과정을 드러내는 작업도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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