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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

리처드 플로리다(Richard Florida)의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의 서문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도시의 세가지 특징을 기술(Technology), 인재(Talent), 그리고 관용(Tolerance)을 꼽았다.

이것을 교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데 성장하는 건강한 교회의 특징은 신학(Theology), 은사(Talent), 그리고 관용(Tolerance)라 할 수 있다.

아마 처음 두 가지 요소는 금방 이해가 되지만 마지막 관용은 선뜻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쉽게 예를 들어보면 우리나라 특색있는 거리의 원조격이 남산 아래 경리단길이었다. 이 길은 전국에 20여 개의 "~리단 길"의 원조가 되었다. 일본, 태국, 그리스, 멕시코 등 다양한 국적의 음식, 크래프트 비어와 분위기 좋은 칵테일바까지 다양한 맛집이 분포되어 있었다. 노홍철이 무한도전에서 자주 방문한다고 발언한 후 유명해졌고 그 유명새로 장사가 된다고 생각한 건물주는 임대료를 세배로 올리기 시작했고 결국 특색있는 가게들은 다 떠나고 말았다. 그 자리를 그저 그런 흔해빠진 프렌차이즈 자본의 업체들이 대체해버린 것이다. 흔히 이런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고 한다. 힘있는 자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욕심에 의해서 배를 갈라 버림으로 거리 자체가 가진 매력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그것이 도시이든지 교회이든지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하다. 관용이란 이처럼 계층의 차이, 가진 위치나 직분의 차이를 견뎌내고 상대에게 그럴 수 있는 권리를 줄 때 거기에 사람들이 몰리게 되어 있다. 대체로 개혁파 교회들이라고 자기 정체성을 생각하는 그룹들은 이것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옳음에 함몰된 자기 욕심에 특정 구획과 권리가 정당화됨으로 다른 그룹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쇠퇴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예컨대, 무슬림을 쫓아내었던 스페인의 몰락, 위그노를 핍박했던 프랑스의 추락, 왕위 계승자였던 오렌지공과 그를 따르던 위그노들을 수용함으로 산업혁명의 발판을 만들었던 영국 등에서 확인된다. 가장 최근에는 중국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욕심으로 합작 회사의 외국인 지분을 49프로 제한하고 자국 기업에는 혜택을 주고 외국 기업에는 제약을 가하는 방식 때문에 중국에 제조업 기지를 두었던 나라들이 중국을 떠나고 있으며 특히 샤드에 직격탄을 맞았던 한국 기업은 그 불공정에 리스크 때문에 중국에서 철수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 반도체 산업을 견제하려고 화이트리스트 배제와 수출 규제를 했는데 이런 불관용 정신은 일본이 추락하는 동력이 된다. 워렌 버핏, 조지 소로스와 함께 세계 3대 투자자로 꼽히는 짐 로저스는 "세상에서 가장 자극적인 나라"에서 이런 역동성을 갖춘 나라를 대한민국이라고 본다.

이것이 지난 70년 대한민국의 성장의 가장 큰 동력이었다. 교회 역시 성장하려면 첫째, 신학이 분명한 메시지를 드러내어야 하며 둘째, 그에 따라 다양한 은사가 교회 안에서 활용적으로 나타나야 하며,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 설혹 다른 모습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관용하는 분위기가 바로 성공하는 도시와 교회의 생태의 기본 조건이다. 일본과 중국의 사례들은 지난 80년대 한국 경제 뉴스에 항상 등장하던 메뉴를 떠올리게 한다. "관제 경제"가 그것이다. 지금 일본과 중국은 경제를 시장에 맡기지 않고 정치 논리에 의해서 좌우된다. 이것은 시장에서 신뢰성의 하락으로 이어진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옳은 것을 떠든다고 옳아지지 않고 신뢰란 상호이익이 되는 것을 서로 존중하는 관용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 관용은 신학과 은사에 의해서 충분히 조절되며 결국 하나님 나라의 생태계를 이루게 한다. 그러나 사소한 욕심과 근시안적 안목은 교회 생태계에 불필요한 개입을 하고 그것이 성장하는 교회의 발목을 잡게 된다. 특히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그룹에 이런 현상이 많아서 정말 영향력 있는 교회가 잘 나오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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