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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시편강해

시편 76편 강해 : 주께서 판결하신다

노승수 목사


[1] [아삽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2]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3]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셀라) [4]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5]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 [6]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 [7]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8]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9]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 [10]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11]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12]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이름이 크고 위대하시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세상 왕들의 두려움이시다는 것으로 마칩니다. 시종일관, 전쟁에 나아가시는 거룩한 용사로 묘사됩니다. 시편 74편이 예루살렘과 그 백성의 수치로 인한 탄원이었고, 75편은 이제 그 교만한 자를 꺾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이제 76편은 전쟁에 승리한 왕으로 묘사됩니다.

1. 사자 왕이신 하나님이 적들을 깨치고 구원을 베푸시다(1-3)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을 찬양하며, 주님의 구원이 '유다'와 '이스라엘'에 나타났음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자녀는 결코 버리심이 없습니다. 때론 버림받은 것 같아 보이는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와 '성도의 견고한 인내'가 참된 신앙의 열매를 내도록 하며, 끝내 이기게 합니다. '하나님이 유다에 알려졌다'는 표현은 최근에 하나님이 유다에 구원의 기사를 행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진다'는 '피난처로 알려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시 48:3)의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다에 알려졌다'는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제 그 구원의 소문이 유다와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서 크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송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패망한 것 같은 순간이 있었으나, 그 시간도 다 지나가고 하나님의 승리가 나타나는 순간이 도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피난처이심을 알리십니다. 나는 누구에게 피합니까?
2절에서 '장막'과 '처소'가 상징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표현입니다. 근데 이 두 단어는 모두 맹수의 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막'은 사자의 굴(시 10:9)을 '처소'는 야수들이 사는 굴(욥 38:40, 암3:4)을 의미하는 단어로 성경에서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백수의 제왕 사자로 묘사되고 그 처소 곧 예루살렘에서 그의 먹잇감을 사로 잡는 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의 단축형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평행을 이루듯이, 살렘과 시온이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자 왕이십니다. 누가 그를 대적하며 누가 감히 그 앞에 서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이 위엄과 그 말씀 앞에 참된 겸비함이 있는 백성입니까?
3절은 이제 사자이신 하나님께서 적들의 모든 무기를 깨치시고 전쟁에서 이기시는 거룩한 용사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자와 같은 용사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용사로 자주 묘사됩니다.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만군의 하나님'은 모든 군대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75편이 심판의 선포였다면, 76편은 이제 정복하는 사자 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2. 죽음을 맞는 대적들(4-6)

개역 성경의 4절은 맛소라 본문의 정확히 번역한 것이지만 그 뜻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NIV는 '사냥감이 풍부한 산보다 존귀하다.'로 번역했는데 이 번역은 앞의 사자이신 하나님과의 일관성을 보여줍니다. 사냥감이 풍부한 산은 앞절의 시온산일 것입니다. 약탈자가 예루살렘을 약탈하는 시편 74편의 대적들의 훤화를 기억하십니까? 이제 하나님이 사자가 되시어 이 먹잇감들을 사냥하러 오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

주는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다

"는 고백은 "모세의 노래"(출 15장)를 연상시킵니다. 홍해를 건너고 애굽의 모든 군대가 바다에 수장된 뒤 이스라엘 백성들 바닷가에서 주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장면인데, 이 모티프는 성경에서 여러차례 반복이 됩니다.
예컨대, 계시록 15장에서도 구원의 이미지를 바로 홍해 곁에서 구원의 노래 곧 모세의 노래를 부르는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하여 설명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인데, 5-6절은 출애굽의 모티프를 그대로 가지고 온 것으로 보입니다. 사자이신 하나님이 그 먹잇감인 대적들을 탈취하심으로 마음이 강한 자, 장사가 모두 자기 잠을 자고 손을 놀리지 못합니다. 여기서 잠은 아마도 죽음이나 죽음의 공포로 인해 마비된 상태를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6절의 꾸짖다는 천둥과 같은 호통을 묘사한 표현입니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에 빠졌다는 표현에서 출애굽의 사건이 떠오릅니다. 이제 과거에 그 구원의 큰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 이제 다시 최근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위하여 그 대적이 가득한 시온산에서 그 때의 구원의 기사와 같이 사자와 용사가 되시어 대적을 탈취하는 자로 묘사됩니다. 대적들은 우리 주님 앞에서 모두 하찮은 먹잇감이 될 것입니다. 깊은 바다에 모두 수장될 것입니다.
나는 그 주님을 신실하게 의뢰합니까? 출애굽의 기사를 기억해보십시오.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가만히 있어 오늘날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 사건에 있어서도 이 시편 76편에 있어서도 구원을 위해 싸우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우리가 그 일에 협력하거나 조력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라고 하십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말의 뜻입니다. 우리의 행함이나 공로가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일에 안식하여야 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요. 내가 이룬 것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0장의 안식일 설명은 창조에 의한 즉, 자연적 원리에 의한 안식을 설명하지만 신명기 5장의 안식일의 설명은 구속의 하나님을 인한 안식입니다. 특히 신자는 주일을 성수함에 있어서 이 구원의 공로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키 위해서 안식해야 합니다. 오늘 4-6절까지 대적을 먹잇감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리의 공로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나의 구원의 공로는 그리스도께만 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길 소원해봅니다.

3. 거룩한 용사, 재판장의 권세(7-9)

이제 모든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당연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이제 전쟁에 따른 전범 재판이 치루어지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주 곧 주는'에서 주님이 반복된 것은 주님의 두려움에 대한 강조로 보입니다. 개역성경은 경외할 자라 번역하였지만 문맥의 흐름으로 보면 두려운 분이시다고 번역하는 것이 다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앞의 흐름도 그렇고 뒤의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대한 표현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 곧 주는 두렵습니다'로 읽는 것이 다 자연스럽습니다. 개역 성경의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는 직역을 하면, '그 때로부터 주의 분노'입니다. 아마도 4-6절의 상황을 염두에 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이제 맹렬하던 전투는 끝이나고 전쟁의 공과를 재판하는 시간이지만 그 맹렬했던 전투 당시에 하나님의 위엄과 분노의 두려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제 재판을 하려는데, 그 분노를 기억하니 그 앞에 설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누가 주의 눈 앞에 설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주께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으니 곧 하나님이 땅의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입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를 구원합니다.
여러분 온유하다 하니 부드러운 자가 연상이 되지요? 그러나 성경의 온유함이란 부드러움이 아닙니다. 온유는 곧 겸손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에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주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신 적이 있습니다. 겸손이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우는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자신을 낮추는 것을 겸손이라 착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1달란트 받은 자는 주님도 자신도 오해했습니다. 주님은 그를 결코 겸손하다 칭찬치 않으셨습니다. 겸손은 말씀을 그대로 받는 자입니다. 온유란 바로 이와 같은 성품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일꾼 곧 목회자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말씀 베푸시는 경륜을 기뻐하셔서 지금과 같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목회자의 영적 권위를 우습게 압니다. 이것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우습게 아는 것입니다. 목사가 다 잘한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함이 아닌 줄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 선포된 말씀을 통해 그의 백성을 다스리고 거느리시길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받아 전하는 목사를 목사인 줄 뻔히 알면서 목사를 '누구누구 씨'라고 부르는 사람이 과연 그리스도의 형제이겠습니까? 주님은 온유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 목회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십시오, 그가 신앙고백에 어긋난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바울 사도도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고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보십시오. 왠지 싫고 미운 선생님 과목은 공부도 하기 싫습니다. 그래서 공부하지 않으면 누구 손해입니까?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말씀을 선포하시고 그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이것이 온유함의 증표입니다. 목사와 좋은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치고 온유한 사람 찾아보기 힘듭니다.

4. 신앙의 본질 :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10-12)

이제 판결이 끝이 났습니다. 10절은 번역이 까다롭습니다. 짧은 행간이라 번역이 쉽지 않습니다. 새번역 성경의 번역을 보면, "

진실로, 사람의 분노는 주님의 영광을 더할 뿐이요, 그 분노에서 살아 남은 자들은 주님께서 허리띠처럼 묶어버릴 것입니다.

" 재판이 끝나고 나면, 사람들이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밖에 내어 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에 이 새번역과 유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마 22:13).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10절의 내용은 문맥의 행간을 가장 잘 살린 의역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번역도 가능한데, 뒷 부분의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는 새번역으로 보면, "그 분노에서 살아 남은 자들은 주님께서 허리띠처럼 묶어버릴 것입니다."인데, 7-9절에 재판장이신 주님의 판결이 있고, 그 판결을 들을 대적자들의 분노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허리띠처럼 묶어 버리실 것입니다. 그 판결은 이제 법정 구속으로 이어져 묶인 채로 밖에 내어 쫓기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11절의 내용은 이제 그 백성들로 하여금 이 엄위로우신 심판을 보고 주를 경외할 것을 촉구합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면 그 행실을 조신하게 가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두려움이 없으면 오만하고 방자해지는 것이 인간 본성의 성품입니다. 이제 주의 백성들에게 주님의 이 위엄있으신 심판과 정벌을 목격하고 주님 앞에 자신의 서원을 하고 갚을 것을 촉구합니다. 나는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합니까?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에 대해 우리 자신을 서원하여 드립니까? 이것이 신자의 마땅한 도리인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경외는 신앙의 근본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경건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감정"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원하는 마음입니다.
현대는 흔히 영성의 시대라 하지만 개혁교회는 영성이란 신비적 용어를 싫어합니다. 참된 영성이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고자 하는 결단입니다. 내 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 내어 버리는 마음 말입니다. 조나단 에즈워즈 목사님도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경건이 없는 자는 죽은 신앙을 가진 자입니다. 왜 오늘 본문이 경외하며, 서원하고 갚으라고 합니까? 이것이야 말로 참된 신앙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참으로 경건합니까? 바울의 권면처럼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며, 경건의 훈련을 합니까? 아니면 육체에 연습만 일삼지는 않습니까?
12절은 이 서원의 동기에 대해서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세상의 방백 곧 관원들의 심령을 꺾으시고 세상의 군왕들도 두려워 떤다면 우리는 어떠해야겠습니까? 잠언 말씀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하게 행한다 했습니다. 여기서 묵시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증거가 무엇이냐 바로 방자함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방자해질 것을 교육합니다. 자기 자랑을 일삼고 자기를 높이고 어떻게해서든 자신의 스펙을 높이고 자기의 가치를 올리기에 열과 성을 다합니다. 말씀은 어쩌다 쳐다봅니다. 주일 설교를 듣지만 일주일 내내 한 번도 그 말씀을 묵상해본적조차 없습니다. 이게 바로 방자함입니다. 그렇게해서 우리에게서 어떻게 경건을 기대하며 찾을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는 참으로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예물을 드리며 주께 서원하고 그것을 갚기 위해 힘씀이 있습니까? 내가 지금 주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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