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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삼위일체론과 욕동

삼위일체론에서 성자는 "나심" 성령은 "나오심"으로 설명한다.

이 때 성부가 인격적 주체가 되어서 성부의 "낳으심"이며 성부와 성자의 "내심"이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심"이 되고 성부는 성자를 "낳으셨"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심"이 되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내셨"다.

이 때 성부는 본질로부터 분리된 인격체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본질로부터 성자의 인격을 낳으셨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는 그 본질에서 "동일본질"이 되신다. 성부와 성자의 성령을 "내심"도 어떤 능력이나 에너지를 내심이 아니라 인격을 "내심"이며 그렇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구별되는 인격과 동일 본질을 지닌다.

만물은 그 창조로부터 창조주의 영광을 지향하는 "분출" 혹은 "산출"의 힘이 있다. 12세기 이슬람 철학자, 아베로에스가 주석을 붙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론’(Περὶ οὐρανοῦ)의 라틴어 번역판에서 최초로 사용된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이란 용어는 중세 스콜라 신학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 산출의 힘을 인간 내면적 용어로 바꾸면 프로이트가 사용한 "욕동"이란 용어다. 욕동은 몸에 에너지며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주 사용했던 리비도의 힘을 가리킨다. 이 욕동은 우리 정신에 특정한 이미지들을 투사하고 이 투사된 이미지들이 개별적 실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을 "인격"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인격은 본질의 필연적 일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취하신 "인성(영혼과 몸)"은 "인격이 없는" 인성이며 그 안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이 "내인격화"함으로 참 사람이 되셨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이 교리의 함의는 사람이 날 때 인격을 가지고 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정에서 산출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인격없는 몸과 영혼을 그리스도가 취할 수 있는 것이며 고대 교부들의 진술대로 "취하여지지 않은 것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구원론의 범주에 영혼과 몸은 들어도 인격은 들지 않는다. 인격은 몸과 영혼이 산출하는 것이다.

인간 본성 곧 영혼과 몸은 그 자체로 소산적 자연으로서 산출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산출의 정점에 인격이 있다. 인격은 그런 점에서 이성적인 주체이며 도덕적인 주체이다. 본질인 영혼의 기능인 이성과 의지를 사용하지만 이성과 의지가 산출해내는 도덕적 주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영"이라는 동일본질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그리스도와 그 교회도 "몸"이라는 동일본질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조직신학자들이 "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받기도 한다.

우리 안의 욕동은 우리 마음에 이미지를 투사하고 그 투사체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교류하게 된다. 이 투사체의 왜곡을 빚는 것이 바로 핵심감정이며 원래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으로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으신 습관 믿음을 통해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함으로 우리 안에 은혜가 주입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은혜의 지배를 받을 때 원래 소산적 자연인 인간이 능산적 자연이신 하나님을 닮은 인격을 산출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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