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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복음주의에 ‘영성’이 있는가?
Lewis Noh
2018. 2. 7. 11:22
과연 복음주의에 ‘영성’이 있는가?
지난 12월 28일자로 실린 이승구 교수의 글 “영성 개념의 문제점과 성경적 경건의 길”을 읽으며 반성했다. 교회와 학교에서 영성이라는 단어를 충실한 고민 없이, 개운치 않은 상태로 영성과 영성훈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전력이 있어서다. 최근 개신교 복음주의 내부에서 영성운동에 대한 관심과 예찬이 급증하고 있지만, 아직 몸에 딱 맞는 옷 같지는 않다. 관상기도와 같은 고대 수도원의 영성운동이 실제 교회 현장에서 적용되기에는 여전히 생경하고 요원했고, 무언가 석연찮기도 했다. 이 불편함의 실체는 단순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 아니다. 그 기저에 놓인 신학적 분별력의 빈곤 때문임을 이 교수의 글은 상세하게 밝힌다.
영성운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인 성경,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조명하는 성령에 의존하는 삶에 정초시키기보다 인간 내면의 종교성에 주목하고 신적 소통을 고양하기 위한 규칙화된 방법을 더욱 반영한다는 혐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와 기술문명 속에서 정신적 공황 상태사태에 빠진 현대인에게 영성적 가치가 삶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현상은 선교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이에 관해서는 패트리샤 에버딘의 「메가트렌드 2010」 (1장 영성의 발견)이나 이지훈의 「혼 창 통」(쌤앤파커스, 2010)과 같은 책들에서 현대인들의 관심사가 인생의 내적 가치를 지향하는 영성으로 흐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조성돈과 정재영의 「그들은 왜 가톨릭 교회로 갔을까」(예영커뮤니케이션, 2007)은 성스러움에 대한 현대인들의 종교적 욕구를 심층 취재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뉴에이지나 선불교와 같은 현대인에게 매력적인 영성운동의 프레임에서 정당성을 인정받고 설득력을 갖추려는 시도는 ‘문화화된 기독교’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다.
지난 12월 28일자로 실린 이승구 교수의 글 “영성 개념의 문제점과 성경적 경건의 길”을 읽으며 반성했다. 교회와 학교에서 영성이라는 단어를 충실한 고민 없이, 개운치 않은 상태로 영성과 영성훈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전력이 있어서다. 최근 개신교 복음주의 내부에서 영성운동에 대한 관심과 예찬이 급증하고 있지만, 아직 몸에 딱 맞는 옷 같지는 않다. 관상기도와 같은 고대 수도원의 영성운동이 실제 교회 현장에서 적용되기에는 여전히 생경하고 요원했고, 무언가 석연찮기도 했다. 이 불편함의 실체는 단순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 아니다. 그 기저에 놓인 신학적 분별력의 빈곤 때문임을 이 교수의 글은 상세하게 밝힌다.
영성운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인 성경,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조명하는 성령에 의존하는 삶에 정초시키기보다 인간 내면의 종교성에 주목하고 신적 소통을 고양하기 위한 규칙화된 방법을 더욱 반영한다는 혐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와 기술문명 속에서 정신적 공황 상태사태에 빠진 현대인에게 영성적 가치가 삶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현상은 선교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이에 관해서는 패트리샤 에버딘의 「메가트렌드 2010」 (1장 영성의 발견)이나 이지훈의 「혼 창 통」(쌤앤파커스, 2010)과 같은 책들에서 현대인들의 관심사가 인생의 내적 가치를 지향하는 영성으로 흐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조성돈과 정재영의 「그들은 왜 가톨릭 교회로 갔을까」(예영커뮤니케이션, 2007)은 성스러움에 대한 현대인들의 종교적 욕구를 심층 취재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뉴에이지나 선불교와 같은 현대인에게 매력적인 영성운동의 프레임에서 정당성을 인정받고 설득력을 갖추려는 시도는 ‘문화화된 기독교’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다.

▲ 메마른 땅에서 길을 찾아나서는 사람
영성 관련 논의와 기독교 신앙의 실체 사이를 미묘하게 짚어주는 이 교수의 치열한 진단은 이른바 ‘영성의 시대’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의 지점을 깊이 성찰하도록 해줄 것이다. 필자는 영성운동에 대한 그의 지적과 경계에 공감하면서, 결론부에서 그가 내린 한국교회를 위한 제안들을 다른 각도에서 성찰하고자 한다. 첫째로 영성이라는 용어의 지적소유권에 대해서, 둘째로는 영성훈련에 관해서, 셋째로는 영성을 통한 신앙의 전인성과 일상성 회복의 문제이다.
1. 영성의 지적소유권을 유보해야 하는가?
영성 관련 논의와 기독교 신앙의 실체 사이를 미묘하게 짚어주는 이 교수의 치열한 진단은 이른바 ‘영성의 시대’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의 지점을 깊이 성찰하도록 해줄 것이다. 필자는 영성운동에 대한 그의 지적과 경계에 공감하면서, 결론부에서 그가 내린 한국교회를 위한 제안들을 다른 각도에서 성찰하고자 한다. 첫째로 영성이라는 용어의 지적소유권에 대해서, 둘째로는 영성훈련에 관해서, 셋째로는 영성을 통한 신앙의 전인성과 일상성 회복의 문제이다.
1. 영성의 지적소유권을 유보해야 하는가?

▲ 폴 스티븐스 지음, 윤종석 옮김, 복있는사람 펴냄
"영성. 뭔가를 약속하는 단어다. 때로는 전부를 약속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실망과 불행이 넘쳐나는 세상이고 보면 이 말이 많이 쓰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 있으며 어쩌면 그 이상이 맛과 멋과 가치를 지닌 삶을 가는 티켓일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영성이라는 말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단어 자체는 한낱 힌트, ‘어림짐작으로 이어지는 힌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림짐작은 기하급수적으로 난무하고 있다.(중략) 현실 속 실생활의 시험에 부딪칠 때마다 성경은 영성에 관한 숱한 ‘어림짐작’ 중 또 하나가 아니라 영성 자체로 입증된다. 성경에서 우리는 영성에 관하여 읽는 것이 아니라, 영성에 대한 신중한 정의나 정교한 기술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영성을 만난다.(중략) 뭔가 참되고 진정한 것을 찾아 잡다한 영성들 속을 정처없이 헤매는 사람들의 손안에 영성의 이 필수적이고 검증된 원전을 쥐어주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커다란 책임이자 특권이다.” ( 폴 스티븐스 • 마이클 그린의 「그분의 말씀 우리의 삶이 되어」를 위한 유진 피터슨이 쓴 서문에서)
영성이라는 개념의 혼동을 막기 위해서 당분간 이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이 교수의 제안을 보면서, 필자는 위의 책을 다시 펼쳐 보았다. 기독교적 영성의 고유함을 이교적 용례로부터 지키려는 노력은 소중하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본다면 이는 영성이라는 용어의 지적소유권을 쉽게 포기하자는 것이 아닐까? 유진 피터슨의 말대로 기독교는 오히려 영성이라는 단어를 통해 어림짐작 인생의 참된 가치를 찾는 현 시대에 최고의 선물을 줄 수 있는 위대한 자산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폴 스티븐스 • 마이클 그린, 「그분의 말씀 우리의 삶이 되어」윤종석 역 (복있는사람, 2006) 유진 피터슨의 서문, 9.) 특히 선교적 관점에서 이 영성에 대한 관심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영성적 가치의 추구는 물질적 욕구와 속도 경쟁에서 지친 현대인들에게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를 바라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필자는 영성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요4:22)하며, ‘알지 못하는 신’(행17:23)을 더듬어 찾으려는 사람들의 깊은 영적 갈망을 포착하는 서술적 용어로 유효하다고 본다.
복음주의 저술가인 로드니 클랩은 현 시점에서 시대와의 소통 가능성을 생각할 때 영성이라는 단어를 대체해줄 단어가 딱히 없음을 토로한다. 종교는 제도적인 형식성을 풍기며, 경건(piety)은 기백이 없고 지루한 느낌을 주고, 거룩은 냉랭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순결(purity)이 한때 영성을 대체하기도 했지만, 결백함과 순진함의 이미지가 강해서 자유로움의 시대와 어긋난다고 한다. 그는 영성이라는 단어가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깨달아야 할 진리, 살아야 할 가치, 인간으로서 의미 있는 삶과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중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Rodney Clapp, Tortured Wonders (Brazos, 2004), 11-13. 한글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로드니 클랩, 「사람을 위한 영성」홍병룡 역 (IVP, 2006).) 동시에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영성이라는 용어를 제한적으로 신중하게 사용해야 필요성도 대두된다. 기독교 신앙에서 영성은 인간의 상황을 서술하지만, 결국 그 영성은 더 이상 중립적이고 느슨한 개념으로 머물지 않고 본래의 지향점인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가며,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주야로 실천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성이라는 용어를 어느 정도로 쓸 수 있을까? 일단, 필자는 교회에서 기도와 예배를 수식하거나 대체하는 표현으로 영성을 끌어들이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고 본다. 이 용어가 세속적 의미와 혼동되어있다는 이승구교수의 주장에 수긍한다. 다만, 영성이 갖는 순기능적 차원에서 전략적인 사용은 가능하다고 본다. 필자가 사역하는 교회에서 신앙특강의 제목을 ‘가정의 영성과 문화’로, 어머니 모임의 주제를 ‘엄마의 영성’으로 정했던 선례가 있다. 전자는 영과 육이 분리되지 않는 공간으로서 가정의 의미를 고찰하려 했고, 후자는 자녀의 성공을 위한 정보통과 매니저 역할에 몰두하는 이 시대 엄마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고려한 것이다. 이원론적이고 경쟁적인 시대에 파묻혀 있는 현대인을 각성시키는 차원에서 영성이라는 개념은 사용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영성을 개발하라든지, 영성을 고양하라든지 하는 인간 중심적인 표현은 삼가야 한다.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그 초점은 성경과 성령에의 의존으로 맞춰져야 한다는 데에는 조금도 이견이 없다.
2. 영성훈련/영성수련, 가능한가?
이 교수는 영성훈련이나 영성수련이라는 용어는 전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성에 관한 그의 신학적 논리를 따르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동의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나아가는 영적 여정을 돕는다고 규범화된 단계를 만들거나, 인간의 종교성 고양 기술이나 방법을 통한 신비한 내적 훈련에 의존한다는 차원에서 사실 일부 영성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은 외양은 다르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영성훈련이나 영성수련과 같은 용어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지속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단순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간의 공적과 자기 확신을 추구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견이지만, 요즘 신학교에 영성훈련 관련 과목들은 인기 있는 반면, 왜 ‘기도학’은 없을까 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다. 영성훈련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결국에 가르치고 나누고 싶었던 내용은 깊은 말씀묵상과 기도의 전통이었는데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도들의 고유한 역할은 말씀 사역과 기도하는 일이 아니었던가(행6:4). 그런데 막상 기도학이라는 과목을 정하려니 어딘가 모르게 학문의 격에 맞지 않는 듯한 어감을 준다. 설교학은 필수과목으로 존재함에도 말이다. 실제 목회 현장에서는 다양한 정황과 삶의 문제들 속에서 목회적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감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영성훈련’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교회역사에서 늘 강조해왔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신앙성장을 근사하게 포장하려는 것은 아닐까?
"영성. 뭔가를 약속하는 단어다. 때로는 전부를 약속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실망과 불행이 넘쳐나는 세상이고 보면 이 말이 많이 쓰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 있으며 어쩌면 그 이상이 맛과 멋과 가치를 지닌 삶을 가는 티켓일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영성이라는 말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단어 자체는 한낱 힌트, ‘어림짐작으로 이어지는 힌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림짐작은 기하급수적으로 난무하고 있다.(중략) 현실 속 실생활의 시험에 부딪칠 때마다 성경은 영성에 관한 숱한 ‘어림짐작’ 중 또 하나가 아니라 영성 자체로 입증된다. 성경에서 우리는 영성에 관하여 읽는 것이 아니라, 영성에 대한 신중한 정의나 정교한 기술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영성을 만난다.(중략) 뭔가 참되고 진정한 것을 찾아 잡다한 영성들 속을 정처없이 헤매는 사람들의 손안에 영성의 이 필수적이고 검증된 원전을 쥐어주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커다란 책임이자 특권이다.” ( 폴 스티븐스 • 마이클 그린의 「그분의 말씀 우리의 삶이 되어」를 위한 유진 피터슨이 쓴 서문에서)
영성이라는 개념의 혼동을 막기 위해서 당분간 이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이 교수의 제안을 보면서, 필자는 위의 책을 다시 펼쳐 보았다. 기독교적 영성의 고유함을 이교적 용례로부터 지키려는 노력은 소중하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본다면 이는 영성이라는 용어의 지적소유권을 쉽게 포기하자는 것이 아닐까? 유진 피터슨의 말대로 기독교는 오히려 영성이라는 단어를 통해 어림짐작 인생의 참된 가치를 찾는 현 시대에 최고의 선물을 줄 수 있는 위대한 자산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폴 스티븐스 • 마이클 그린, 「그분의 말씀 우리의 삶이 되어」윤종석 역 (복있는사람, 2006) 유진 피터슨의 서문, 9.) 특히 선교적 관점에서 이 영성에 대한 관심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영성적 가치의 추구는 물질적 욕구와 속도 경쟁에서 지친 현대인들에게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를 바라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필자는 영성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요4:22)하며, ‘알지 못하는 신’(행17:23)을 더듬어 찾으려는 사람들의 깊은 영적 갈망을 포착하는 서술적 용어로 유효하다고 본다.
복음주의 저술가인 로드니 클랩은 현 시점에서 시대와의 소통 가능성을 생각할 때 영성이라는 단어를 대체해줄 단어가 딱히 없음을 토로한다. 종교는 제도적인 형식성을 풍기며, 경건(piety)은 기백이 없고 지루한 느낌을 주고, 거룩은 냉랭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순결(purity)이 한때 영성을 대체하기도 했지만, 결백함과 순진함의 이미지가 강해서 자유로움의 시대와 어긋난다고 한다. 그는 영성이라는 단어가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깨달아야 할 진리, 살아야 할 가치, 인간으로서 의미 있는 삶과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중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Rodney Clapp, Tortured Wonders (Brazos, 2004), 11-13. 한글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로드니 클랩, 「사람을 위한 영성」홍병룡 역 (IVP, 2006).) 동시에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영성이라는 용어를 제한적으로 신중하게 사용해야 필요성도 대두된다. 기독교 신앙에서 영성은 인간의 상황을 서술하지만, 결국 그 영성은 더 이상 중립적이고 느슨한 개념으로 머물지 않고 본래의 지향점인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가며,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주야로 실천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성이라는 용어를 어느 정도로 쓸 수 있을까? 일단, 필자는 교회에서 기도와 예배를 수식하거나 대체하는 표현으로 영성을 끌어들이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고 본다. 이 용어가 세속적 의미와 혼동되어있다는 이승구교수의 주장에 수긍한다. 다만, 영성이 갖는 순기능적 차원에서 전략적인 사용은 가능하다고 본다. 필자가 사역하는 교회에서 신앙특강의 제목을 ‘가정의 영성과 문화’로, 어머니 모임의 주제를 ‘엄마의 영성’으로 정했던 선례가 있다. 전자는 영과 육이 분리되지 않는 공간으로서 가정의 의미를 고찰하려 했고, 후자는 자녀의 성공을 위한 정보통과 매니저 역할에 몰두하는 이 시대 엄마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고려한 것이다. 이원론적이고 경쟁적인 시대에 파묻혀 있는 현대인을 각성시키는 차원에서 영성이라는 개념은 사용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영성을 개발하라든지, 영성을 고양하라든지 하는 인간 중심적인 표현은 삼가야 한다.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그 초점은 성경과 성령에의 의존으로 맞춰져야 한다는 데에는 조금도 이견이 없다.
2. 영성훈련/영성수련, 가능한가?
이 교수는 영성훈련이나 영성수련이라는 용어는 전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성에 관한 그의 신학적 논리를 따르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동의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나아가는 영적 여정을 돕는다고 규범화된 단계를 만들거나, 인간의 종교성 고양 기술이나 방법을 통한 신비한 내적 훈련에 의존한다는 차원에서 사실 일부 영성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은 외양은 다르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영성훈련이나 영성수련과 같은 용어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지속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단순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간의 공적과 자기 확신을 추구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견이지만, 요즘 신학교에 영성훈련 관련 과목들은 인기 있는 반면, 왜 ‘기도학’은 없을까 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다. 영성훈련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결국에 가르치고 나누고 싶었던 내용은 깊은 말씀묵상과 기도의 전통이었는데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도들의 고유한 역할은 말씀 사역과 기도하는 일이 아니었던가(행6:4). 그런데 막상 기도학이라는 과목을 정하려니 어딘가 모르게 학문의 격에 맞지 않는 듯한 어감을 준다. 설교학은 필수과목으로 존재함에도 말이다. 실제 목회 현장에서는 다양한 정황과 삶의 문제들 속에서 목회적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감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영성훈련’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교회역사에서 늘 강조해왔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신앙성장을 근사하게 포장하려는 것은 아닐까?


▲ 영성훈련에 관한 다양한 책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 ‘훈련’이라는 단어가 갖는 위험성은 사실 영성훈련에 그치지 않는다. 가령 같은 논리에서 ‘제자훈련’ 이라는 용어는 어떻게 볼 것인가? 소정의 훈련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제자가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애초에 제자로 부름 받은 것이지, 신자로 부름 받은 다음에 훈련을 거쳐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경(특히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제자는 우리가 무엇을 해서 될 수 있는 명사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움직임을 규정하는 동사이다.(이에 관한 논의는 Gordon Smith, Beginning Well (IVP, 2001),113쪽을 보라. 한국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고든 스미스, 「온전한 회심, 그 일곱가지 얼굴」임종원 역(CUP, 2010)) 물론 제자훈련이라는 특정 프로그램이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율법적, 혹은 계층적으로 이해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훈련이라는 용어 사용이 지닐 수 있는 잠재적 오해의 가능성을 우려한다면 이를 재고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혹자는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제자도’라는 성경적인 개념에 훈련을 붙이는 것과 ‘영성’이라는 일반적이고 중립적 개념에 훈련을 붙이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제자) 훈련이라는 개념은 신앙의 성품을 위한 연단과 의지적 순종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이를 율법적 맥락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관리해주는 목회적 가르침과 돌봄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영성훈련이 제자도에 비해 더욱 불필요한 오해와 모호함을 내포한다면, 영적형성(spiritual formation)이라는 용어를 통해 영성의 기독교적 의미를 추구할 수 있다. 영적형성은 우리가 하는 무엇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평생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성품을 형성하시도록 맡기는 것이다.(Eugene Peterson, "Spirituality/Spiritual Formation" in Dictionary for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ed. by Kevin J. Vanhoozer (Baker Academics, 2005), 768.) 그러나 필자는 목회 현장에서 특별히 ‘훈련’이나 ‘형성’과 같은 단어를 사용해야 할 강력한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간략히 말하자면, 필자는 그리스도인 됨을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며 ‘사는 것’이지 종교적 활동을 더 많이, 더 길게 늘리는 것은 해법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영성의 의미를 오히려 일상적이고 전인적인 차원에서 더욱 중요하게 본다.
3. 복음주의 영성의 일상성과 전인성 회복
이승구 교수는 그의 글에서 프란시스 쉐이퍼의 ‘참된 영성’을 복음주의권에서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효시로 본다. 확실히 쉐이퍼와 그의 아내 이디스, 그리고 그가 일으킨 라브리 사역의 후계자들은 영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그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그것은 사적, 관념적 영역에 머물던 신앙의 역동성을 지극히 일상적이고 전인적인 삶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매일매일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모든 삶, 즉 학교공부, 부엌일, 음식차리기, 손님접대, 여가시간, 청소, 영화나 음악감상, 산책 등과 같은 미세한 영역들을 영적 공간으로 재구성하게 해주었다.(이러한 생각과 실천을 담은 서적으로는 쉐이퍼의 아내인 이디스 쉐이퍼(Edith Schaeffer)의 The Hidden Art of Homamaking(Tyndale House, 1971)과 Common Sense Christian Living(Thomas Nelsom, 1983)을 참고할 필요가 있으며, 한국 라브리 선교회의 대표인 성인경 목사의 “참된 영성이란 무엇인가”(www.labri.or.kr)를 권한다. 또한 미국 헐리우드 장로교회의 목사이며 풀러신학교의 전도학 교수를 역임한 로버트 멍어의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IVP, 2004)는 그리스도를 내 삶의 구석구석에 모시는 경건한 삶을 마음의 집이라는 비유로 풀어간 복음주의권의 쉽고 탁월한 영성 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범신론적이거나 모호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며, 영성훈련과 같은 용어를 사용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교수가 경계한 방법주의와 이원론적 영성을 철저하게 지적하고 비판한다.(쉐이퍼와 라브리의 영성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서로 다음의 자료를 권한다. Ranald Macaulay와 Jerram Barrs의 Being Human: The Nature of Spiritual Experience(IVP, 1978). 특히 1장~4장까지의 논의에서 기독교적 영성이란 인위적 방법을 통해서 고양되는 상위적 개념의 정신상태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저자들은 기독교 내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이러한 영성운동을 성경이 아닌 헬라철학의 이원론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즉, 쉐이퍼와 라브리 사역자들의 저작에서는 영성이라는 단어가 복음주의 신앙이 간과해 온 신앙생활의 전인성과 일상성을 드러내는 촉매제 역할을 해내었다. 영성이라는 개념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 것이다. 쉐이퍼의 라브리 사역은 “우리의 삶과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실재를 드러내는 것”(이디스 쉐퍼, 「이디스 쉐퍼의 라브리 이야기」양혜원 역 (홍성사, 2001), 21.)을 모토로 삼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확고하게 견지한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 ‘훈련’이라는 단어가 갖는 위험성은 사실 영성훈련에 그치지 않는다. 가령 같은 논리에서 ‘제자훈련’ 이라는 용어는 어떻게 볼 것인가? 소정의 훈련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제자가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애초에 제자로 부름 받은 것이지, 신자로 부름 받은 다음에 훈련을 거쳐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경(특히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제자는 우리가 무엇을 해서 될 수 있는 명사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움직임을 규정하는 동사이다.(이에 관한 논의는 Gordon Smith, Beginning Well (IVP, 2001),113쪽을 보라. 한국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고든 스미스, 「온전한 회심, 그 일곱가지 얼굴」임종원 역(CUP, 2010)) 물론 제자훈련이라는 특정 프로그램이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율법적, 혹은 계층적으로 이해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훈련이라는 용어 사용이 지닐 수 있는 잠재적 오해의 가능성을 우려한다면 이를 재고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혹자는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제자도’라는 성경적인 개념에 훈련을 붙이는 것과 ‘영성’이라는 일반적이고 중립적 개념에 훈련을 붙이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제자) 훈련이라는 개념은 신앙의 성품을 위한 연단과 의지적 순종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이를 율법적 맥락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관리해주는 목회적 가르침과 돌봄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영성훈련이 제자도에 비해 더욱 불필요한 오해와 모호함을 내포한다면, 영적형성(spiritual formation)이라는 용어를 통해 영성의 기독교적 의미를 추구할 수 있다. 영적형성은 우리가 하는 무엇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평생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성품을 형성하시도록 맡기는 것이다.(Eugene Peterson, "Spirituality/Spiritual Formation" in Dictionary for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ed. by Kevin J. Vanhoozer (Baker Academics, 2005), 768.) 그러나 필자는 목회 현장에서 특별히 ‘훈련’이나 ‘형성’과 같은 단어를 사용해야 할 강력한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간략히 말하자면, 필자는 그리스도인 됨을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며 ‘사는 것’이지 종교적 활동을 더 많이, 더 길게 늘리는 것은 해법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영성의 의미를 오히려 일상적이고 전인적인 차원에서 더욱 중요하게 본다.
3. 복음주의 영성의 일상성과 전인성 회복
이승구 교수는 그의 글에서 프란시스 쉐이퍼의 ‘참된 영성’을 복음주의권에서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효시로 본다. 확실히 쉐이퍼와 그의 아내 이디스, 그리고 그가 일으킨 라브리 사역의 후계자들은 영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그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그것은 사적, 관념적 영역에 머물던 신앙의 역동성을 지극히 일상적이고 전인적인 삶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매일매일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모든 삶, 즉 학교공부, 부엌일, 음식차리기, 손님접대, 여가시간, 청소, 영화나 음악감상, 산책 등과 같은 미세한 영역들을 영적 공간으로 재구성하게 해주었다.(이러한 생각과 실천을 담은 서적으로는 쉐이퍼의 아내인 이디스 쉐이퍼(Edith Schaeffer)의 The Hidden Art of Homamaking(Tyndale House, 1971)과 Common Sense Christian Living(Thomas Nelsom, 1983)을 참고할 필요가 있으며, 한국 라브리 선교회의 대표인 성인경 목사의 “참된 영성이란 무엇인가”(www.labri.or.kr)를 권한다. 또한 미국 헐리우드 장로교회의 목사이며 풀러신학교의 전도학 교수를 역임한 로버트 멍어의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IVP, 2004)는 그리스도를 내 삶의 구석구석에 모시는 경건한 삶을 마음의 집이라는 비유로 풀어간 복음주의권의 쉽고 탁월한 영성 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범신론적이거나 모호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며, 영성훈련과 같은 용어를 사용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교수가 경계한 방법주의와 이원론적 영성을 철저하게 지적하고 비판한다.(쉐이퍼와 라브리의 영성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서로 다음의 자료를 권한다. Ranald Macaulay와 Jerram Barrs의 Being Human: The Nature of Spiritual Experience(IVP, 1978). 특히 1장~4장까지의 논의에서 기독교적 영성이란 인위적 방법을 통해서 고양되는 상위적 개념의 정신상태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저자들은 기독교 내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이러한 영성운동을 성경이 아닌 헬라철학의 이원론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즉, 쉐이퍼와 라브리 사역자들의 저작에서는 영성이라는 단어가 복음주의 신앙이 간과해 온 신앙생활의 전인성과 일상성을 드러내는 촉매제 역할을 해내었다. 영성이라는 개념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 것이다. 쉐이퍼의 라브리 사역은 “우리의 삶과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실재를 드러내는 것”(이디스 쉐퍼, 「이디스 쉐퍼의 라브리 이야기」양혜원 역 (홍성사, 2001), 21.)을 모토로 삼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확고하게 견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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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ri(라브리)는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을 찾기 위해 잠시 머물 수 있는 영적 피난처를 의미한다
필자는 복음주의권의 영성에 대한 관심이 지금까지 교리와 성경공부 중심의 인지적 배움과 교회 ‘안의’ 생활에 국한된 신앙 양태를 극복하려는 시도와 맞물렸다고 본다. 또한 이러한 전인적, 일상적 영성은 쉐이퍼와 라브리의 사역을 볼 때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의 견고한 세계관을 기반으로 모색된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예배당 안에서만 주가를 날리는 신앙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삶에서 지성과 감정의 성스러운 성장을 도모하는 신앙의 영향력을 거론할 때, 이를 표현하는 용어인 영성은 모호하고 느슨한 개념의 정신성(spirituality)이 아닌 성령의 인격적 교통하심(Spirit-uality)(폴 스티븐스 • 마이클 그린, 28.)을 의미하는 용례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오히려 영성의 참된 기독교적 핵심을 더욱 또렷하게 부각시켜주는 강점도 지니고 있다.
가톨릭은 의식과 예문으로 구성된 ‘예전에 참여함’을 신앙생활의 중요한 동력으로 본다. 동방 정교회는 이콘(성화)을 ‘보며’ 기도하고, 예배에 들어가면서 이콘에 ‘입맞춤’도 한다. 이에 반해 개신교는 설교자의 말씀을 ‘들음으로’ 영적 진리를 깨닫고 ‘눈을 감고’ 기도하며 결단한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예전에 참여하여 자신을 성스러운 사이클에 동화시키는 가톨릭에 반해, 개신교는 주관적인 차원의 영적 경험과 결단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동방정교회의 시각적이며 촉각적인 영적 경험보다는 청각적이며 인지적인 영적 교류를 더 중시하는 것이다. 필자는 개신교의 말씀 중심 신앙에 무한 감사하며 자랑스럽다. 그러나 인간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자칫 우리의 신앙 양식이 한쪽 감각기관으로만 신앙을 소통케 함으로 삶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청각과 인지력을 통한 신앙 경험은 주관적 감정 중심의 신앙이나 분석적이고 지식적 신앙으로 발전할 잠재성이 있다.(커뮤니케이션의 측면에서 인간의 감각기관이 어떠한 생활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가에 대해서는 인간의 다감각적 소통을 연구한 Ruth Finnegan, Communicating: The Multiple Modes of Human Interconnection (Routledge, 2002)을 참조하라.) 물론 성례전이 이러한 면을 보완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례와 성찬의식에 수반되는 신체적, 관계적 경험보다는 내용의 인식과 기념으로만 치우치지 않았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이런 면에서 온전한 영성에 대한 관심은 뇌와 감정의 자리에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물질, 지역사회와 자연세계에 거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숨결을 느끼게 할 것이다. 영성이라는 단어를 쓰느냐, 안 쓰느냐 와는 별개로, 필자는 영성운동이 이와 같은 신앙의 전인성과 일상성, 그리고 관계성을 주목하게 해주는 기여를 했다고 본다. 따라서 향후 복음주의의 영성운동은(그게 가능하다면) 고립된 개인의 금욕적, 수덕적 신비주의 영성이 아니라, 우리의 총체적 삶을 그리스도의 주권에 맡기며 그의 영에 철저히 순종하며 의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글을 맺으며
단어가 가져다주는 심상이 있다. 필자는 영성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일단 마음이 진정되고 차분해지는 기분이다. 숨 가쁘게 달리다 천천히 걸어야 할 것 같다. 그러다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며 하늘과 나무와 새를 한 동안 감상하게 만든다. 평소 무심히 스쳤던 사람들과 별 일 없이도 담소를 나누게 한다. 인생을 꾸미고 애쓰기 보다는 더 큰 리듬에 맡기고 싶어진다. 그리고 내가 걸어온 삶, 내 내면을 조용히 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영성적 욕구는 필자의 주관적이기도 하지만, 필자 또한 동시대인의 자화상을 비출 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영성으로 반영되는 시대의 고민과 물음에 줄 것이 너무도 많다. 너무도...
김선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며, 예수소망교회의 교육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가톨릭은 의식과 예문으로 구성된 ‘예전에 참여함’을 신앙생활의 중요한 동력으로 본다. 동방 정교회는 이콘(성화)을 ‘보며’ 기도하고, 예배에 들어가면서 이콘에 ‘입맞춤’도 한다. 이에 반해 개신교는 설교자의 말씀을 ‘들음으로’ 영적 진리를 깨닫고 ‘눈을 감고’ 기도하며 결단한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예전에 참여하여 자신을 성스러운 사이클에 동화시키는 가톨릭에 반해, 개신교는 주관적인 차원의 영적 경험과 결단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동방정교회의 시각적이며 촉각적인 영적 경험보다는 청각적이며 인지적인 영적 교류를 더 중시하는 것이다. 필자는 개신교의 말씀 중심 신앙에 무한 감사하며 자랑스럽다. 그러나 인간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자칫 우리의 신앙 양식이 한쪽 감각기관으로만 신앙을 소통케 함으로 삶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청각과 인지력을 통한 신앙 경험은 주관적 감정 중심의 신앙이나 분석적이고 지식적 신앙으로 발전할 잠재성이 있다.(커뮤니케이션의 측면에서 인간의 감각기관이 어떠한 생활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가에 대해서는 인간의 다감각적 소통을 연구한 Ruth Finnegan, Communicating: The Multiple Modes of Human Interconnection (Routledge, 2002)을 참조하라.) 물론 성례전이 이러한 면을 보완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례와 성찬의식에 수반되는 신체적, 관계적 경험보다는 내용의 인식과 기념으로만 치우치지 않았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이런 면에서 온전한 영성에 대한 관심은 뇌와 감정의 자리에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물질, 지역사회와 자연세계에 거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숨결을 느끼게 할 것이다. 영성이라는 단어를 쓰느냐, 안 쓰느냐 와는 별개로, 필자는 영성운동이 이와 같은 신앙의 전인성과 일상성, 그리고 관계성을 주목하게 해주는 기여를 했다고 본다. 따라서 향후 복음주의의 영성운동은(그게 가능하다면) 고립된 개인의 금욕적, 수덕적 신비주의 영성이 아니라, 우리의 총체적 삶을 그리스도의 주권에 맡기며 그의 영에 철저히 순종하며 의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글을 맺으며
단어가 가져다주는 심상이 있다. 필자는 영성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일단 마음이 진정되고 차분해지는 기분이다. 숨 가쁘게 달리다 천천히 걸어야 할 것 같다. 그러다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며 하늘과 나무와 새를 한 동안 감상하게 만든다. 평소 무심히 스쳤던 사람들과 별 일 없이도 담소를 나누게 한다. 인생을 꾸미고 애쓰기 보다는 더 큰 리듬에 맡기고 싶어진다. 그리고 내가 걸어온 삶, 내 내면을 조용히 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영성적 욕구는 필자의 주관적이기도 하지만, 필자 또한 동시대인의 자화상을 비출 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영성으로 반영되는 시대의 고민과 물음에 줄 것이 너무도 많다. 너무도...
김선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며, 예수소망교회의 교육목사로 사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