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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다시 읽기②

Lewis Noh 2018. 2. 11. 22:52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다시 읽기②
들어가며
그 동안 네 번에 걸쳐 프란시스 쉐퍼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어떤 질문을 갖고 있었으며 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려 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프란시스 쉐퍼는 독일계 미국 출신의 선교사요 목사로서 20세기 중반에 유럽으로 건너가 스위스 로잔을 중심으로 서구 사회에 복음을 전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동일한 언어로 전해지는 복음이 20세기 현대인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역사적이고 정통적인(개혁주의적인) 복음을 참되게 전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이론과 현장 속에서 씨름한 결과로 쉐퍼는 자신의 핵심 저작인<거기 계시는 하나님>,<이성에서의 도피>,<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삼부작을 저술하게 되었고, 20세기적 상황에서 복음을 정통적 방식으로 참되게 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알아야하는 문제와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비록 프란시스 쉐퍼의 첫 번째 관심은 복음 전도였지만, 그의 저술은 단지 불신자에게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현대적 사고방식 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던 수많은 20세기 복음주의자들에게 쉐퍼는 대답을 주었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복음은 유대인이건 헬라인(이방인)이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유일한 대답이다.(주1) 그렇다면 인본주의(합리주의)에서 나온 이 세상의 다른 모든 대답들은 비정상적 상황에 빠진 인간에게 대답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은 유일하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대한 구원을 주는 능력이 있다.(주2) 문제는 이 복음을 고백하는 20세기 복음주의자들이 이와 같은 위대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사도신경을 ‘진심으로’ 고백하면서도(이 글을 읽는 당신은 ‘사도신경’을 의식적으로 거짓으로 고백하는가? 그들도 우리처럼 ‘진심으로’ 고백했을 것이다.) 복음이 약속하는 총체적 구원이 무엇인지 깨닫지도 체험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지만, 이는 엄연한 현실로 우리에게도 경험되는 바다.) 이에 대해 쉐퍼는 ‘현대적 사고방식이라는 바탕 위에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따라서 한 마디로 그의 삼부작의 핵심을 이야기한다면 바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20세기 복음주의자들은 현대적 사고방식을 전제한 채 복음을 받아들였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 ‘현대적 사고방식’이라는 가공(可恐)할 만한 ‘전제’가 무엇인지를 삼부작을 통해 밝히고 있으며, 동시에 근대 이전 소위 전통적인 시대에 복음을 받아들였던 믿음의 선배들이 어떤 ‘사고방식’을 전제했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오늘은 쉐퍼 삼부작의 제1권<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1부와 2부를 중심으로 이와 같은 현대적 사고방식이 내용과 역사적 등장 과정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겠다.(주3)

1. 현대적 사고방식, 이단보다 더 무서운 적그리스도
우선 아래의 그림을 보자.(주4) 이 그림은 현대적 사고방식이 출현하게 된 역사적 과정을 도식화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림1>키에르케고르까지의 사고방식(진리관)의 변화(주5)
<그림1>은<거기 계시는 하나님>27쪽에 나온다. 쉐퍼가 설명하고자 하는 진리관의 역사적 변천 과정은 이 그림과 더불어 다음 번 연재에서 소개할 다른 그림에 모두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칸트, 헤겔, 키에르케고르)은 모두 철학자들이다. ‘철학’이 등장하기 시작하니 벌써 머리가 아파오는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려울 것 없다. ‘철학자’란 쉽게 말해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다. 이들이 생각하고 말한 방식이 당시의 지적 흐름(사고방식)을 주도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그 당시의 사고방식을 설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 설명할 것은 ‘절망선’이다.<그림1>에서 ‘헤겔’이라는 이름 왼쪽에 선이 하나 그어져 있고 그 왼쪽에 ‘절망선’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절망선은 전통적 사고방식과 현대적 사고방식의 결정적 분기점을 가리키는 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점차적으로 변하다가 철학자 ‘헤겔’에 이르러 결정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주6)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헤겔이라는 19세기 철학자가 만들어놓은 틀 속에서 (나도 모르게) 사고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헤겔의 사고방식의 핵심은 무엇인가? 쉐퍼에 따르면, 그의 사고방식의 핵심은 ‘변증법’이다.(주7) 변증법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반정립’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정립이란, ‘A는 非A가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진리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조금 거칠지만 이렇게 설명해 보자. 예를 들어, ‘닭은 새다’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명제①). 명제①이 ‘참’이라고 전제할 때, 이와 반대되는 명제인 ‘닭은 새가 아니다’(명제②)는 ‘거짓’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명제①과 명제②가 동시에 ‘참’이 되는 방법은 없다.(주8) 이렇게 사고하는 것이 전통적인 사고방식, 쉐퍼의 용어로 ‘반정립’적 사고방식이다. (상당히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그럼 헤겔은 어떻게 사고했는가?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헤겔은 전통적인 사고방식, 즉 ‘반정립’적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헤겔은 이제부터 서로 대립되는 명제, 즉 명제①과 명제② 둘 중에 하나만이 참이 될 수 있다는 논리학적 방법론을 버리고 명제①과 명제②의 관계 즉 서로 대립되는 명제들을 ‘종합’시켜서 새로운 제3의 명제인 명제③을 추론해 내자고 주장한다. 바로 여기에 헤겔의 핵심이 있다(고 쉐퍼는 주장한다). 이와 같은 헤겔의 방법론을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철학적 배경이 없는 경우, 헤겔의 이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궤변’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예를 들어서 좀 더 설명해 보자. 
종교다원주의 문제를 살펴보자. 헤겔 이전에 전통적인 ‘반정립’적 방법론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기독교가 진리다’라는 명제를 ‘다른 종교는 거짓이다’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했다. 즉, ‘기독교가 진리’라는 명제와 ‘불교가 진리’ 또는 ‘힌두교가 진리’라는 명제는 동시에 성립될 수 없는 명제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보자면, 어떤 사람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할 때, 스스로 아직 해답을 얻지 못해서 기독교와 불교, 힌두교를 동시에 공부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이든, 불교든, 힌두교든 어떤 한 가지가 진리임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 말은 그 이외의 (본인이 믿은 종교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다른 종교는 ‘거짓’으로 인정하고 배격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헤겔’식의 변증법적 사고가 지배하는 현대가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헤겔의 논리는 서로 모순이 되는 두 가지의 명제가 ‘종합’되면 하나의 새로운 명제(진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기독교와 불교와 힌두교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버릴 필요가 없다. ‘기독교와 불교와 힌두교’의 내용을 모두 ‘종합’하면 구원으로 가는 더 좋은(더 분명한) 길이 열리게 된다. 종교다원주의를 헤겔이 ‘의도’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하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그러나 헤겔의 ‘의도’와 상관없이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론으로 진리를 인식하게 되면, 이와 같은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것을 이해하면, 왜 현대인들이 ‘정상에 오르는 여러 갈래의 길’로 각 종교를 파악하고, 모든 종교들은 제각기 구원에 이르는 서로 다른 길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기에 ‘기독교의 배타적 진리 주장’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공격하는지 알게 된다. 바로 진리를 인식하는 방법론이 바뀐 것이다. 헤겔은 이와 같은 현대적 사고방식이 세상을 지배하게 만든 결정적 인물이다. 그리고 이 현대적 사고방식은 어떠한 이단보다 복음주의 교회를 무력화시킨 가장 강력한 ‘보이지 않는 적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진리가 상대화되자, 바로 뒤따라오는 것은 윤리의 상대화이다. 전통적인 반정립적 방법론이 지배했던 시대에는(절망선 이전) 도덕이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인식되었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론이 지배하는 현대에 이르자(절망선 이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인식하기 시작했다. 즉, A라는 도덕 규범은 한국에서는 옳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옳지 않다(공간적 차이). 또, A라는 도덕 규범은 16세기에는 옳지만, 20세기에는 옳지 않다(시간적 차이). 공간과 시간이라는 차이는 서로 다른  ‘상황(context)’을 만들어 내고, 도덕이란 이와 같은 상황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상황에 종속된다. 즉, 보편 윤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상황 윤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최근에 ‘박철 VS 옥소리’의 ‘간통죄’ 문제를 예로 들자. ‘간통’은 보편적이고 절대적 의미에서 죄인가? 아니면 상황에 따라 ‘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가? 다시 말해, 여론과 사법적 판단이 ‘죄!’라고 외치면 유죄이지만, 그 반대로 ‘무죄!’라고 외치면 무죄가 될 수 있는가?
2. 현대적 사고방식이 받아들여지기까지 : 합리주의의 절망적 결론
그렇다면 헤겔의 이런 괴상망측한 방법론이 어떻게 현대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게 된 걸까? 헤겔이 아무리 천재라지만, 한 사람의 사고방식이 전 세계를 이렇게 뒤집을 수 있는가? 헤겔 한 사람의 생각이 전 세계의 사고방식을 바꿨다고 말한다면, 누가 보아도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실제로 헤겔의 생각이 사람들에게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많은 과정이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프란시스 쉐퍼는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칸트’와 ‘루소’ 등의 다양한 사상의 변화를 자신의 글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또, 그는 헤겔의 변증법이 보다 구체적인 결과로서의 ‘실존주의’(키에르케고르)로 발전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내용을 설명하려면 앞으로 몇 회의 연재가 더 이어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왜 현대인들이 헤겔의 현대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였는가?’에 대해서만 답해 보자. 쉐퍼가 볼 때,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로 점점 사람들은 이 세상(자연)에 대한 참된 지식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말씀하심’이라는 근거에서 떠나 자율적인 상태가 되어갔다고 말한다. 근대 이후 사람들은 굳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고 (그런 사실들을 제외시킨 채) 우리의 눈에 보이는 ‘자연’ 또는 그 자연을 인식하는 ‘인간’(으로서의 나)을 출발점으로 해서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서, 우선 내가 ‘확실히 존재한다고 느끼고 알 수 있는 나’라는 존재에서부터 진리를 증명해 나가기 시작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존재한다고 의심없이 ‘확신’할 수 있는가? 없다.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의심없이 확신할 수 있는가? 역시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데카르트식으로 말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즉, 다른 건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생각하고 있는 나’는 아무리 봐도 존재하는 게 틀림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을 무한한 능력으로 창조하고 자신의 도덕적인 성품에 따라 윤리적 질서를 부여하였으며, 자신의 인격을 닮은 인격적인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존엄한) 존재인 인간과 다른 모든 비인격적 피조물을 만드셔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절대적 주권(주인된 권리)을 갖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아무리 봐도 의심스럽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생각의 전제에서 제외시켜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의심스러운’ 하나님의 존재를 제외시키고 무언가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해 ‘자기 자신’(즉 인간)에게서 출발한 사고방식은 큰 절망에 부딪히게 되었다.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존재가 인간과 세상을 창조했다는 전제가 사라져 버리자, 더 이상 인간이 ‘왜 도덕적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근거가 없어진 것이다. 좀 더 분명히 이야기해서 근거를 찾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가 도덕적으로 행동해야할 이유가 있는가? 동물원의 코끼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그렇다면,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갖고 있다는 것 이외에 달리 동물과 차이가 없는 인간이 ‘도덕’적이어야 하는 근거가 있는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감정’(양심)은 있을지 모르나,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이유’(객관적 토대)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 찰스 다윈이<종의 기원>(1859)을 통해 시대를 바꾼 것은 단지 생물학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이 ‘인격적인 존재로부터 존엄하고 도덕적으로 창조되었다’는 전제에서 ‘우연과 시간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라는 전제로 인간관을 바꾸어버렸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도덕의 근거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의미’의 근거도 사라져 버렸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의미를 갖는가? 이 말은 ‘의미를 갖고 싶은 감정(욕구)이 있는갗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존재한다는 객관적 근거가 있는갗를 묻는 것이다. ‘의미’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가캄라는 말로 바꾸어볼 수 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이 과연 ‘가캄가 있는가?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가 살아가는 삶과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과연 다른 ‘가캄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집에서 키우는 ‘개’를 죽여도 된다면, ‘인간’은 왜 죽여서는 안 되는가? 인간에게 개와 다른 ‘가캄가 있는가? 이 말을 극단적으로 확장시키면 이렇게 된다. 조류 독감으로 수천 마리의 닭을 몰살시켜도 된다면, 히틀러가 ‘가스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유태인들을 집단적으로 몰아넣고 죽이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 지금부터 하나님이 없다고 전제하고 대답해 보자. 이 세상에 ‘도덕’이란 근거가 있는가? 인간에게는 ‘가캄가 있는가? 당신의 삶은 ‘의미’가 있는가?
정리해 보면, ①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창조 ②하나님이 인간에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로 말씀하셨다는 전제를 포기해 버린 현대인들은 ‘존재하는 나’에서 출발해서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해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것을 ‘인본주의’ 또는 ‘합리주의’라고 말한다.(주9) 따라서 근대 이후에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의 핵심은 ‘인본주의’ 또는 ‘합리주의’다.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진리를 정립하려고 했던 시대를 ‘근대’ 또는 ‘모더니즘(Modernism)’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 인격적이고 도덕적으로 창조된 인간이라는 전제를 내던져버리자, 인간은 비인격적인 근원에서 우연적으로 시작된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 보다 더 존엄해야할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도덕적이어야 할 근거를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남달라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인간으로서의 삶이 죽는 것 보다 더 나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졌다. 그래서 인본주의의 논리적 결론은 ‘허무주의’가 된 것이다.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 박테리아 보다 더 나아야 할 이유가 없다.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나아야 할 이유가 없다. 쉐퍼의 표현을 빌자면, 잔인한 것이 잔인하지 않은 것과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허무주의다. 끔찍하지 않은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맞이한 현실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인간의 존엄성도 인격성도 찾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이로써 인간은 기계가 되었다.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수많은 자살 사건들은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의 결과였다. 그러나 쉐퍼가 강조하는 것처럼, 인간은 이와 같은 생각 속에서 결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인간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 ‘가캄가 있어야 한다. 다른 동물과 달리 살아가야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인간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도덕적이어야만 ‘존엄’한 존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일관되게 이렇게 살아왔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더 이상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논리적으로) ‘사실’에 근거해서 존엄성, 의미, 가치, 도덕을 찾아낼 수 없게 되었다. 아무도 이와 같은 것들이 인간에게 존재한다고 ‘근거 있게’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인간 내부에 분열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쉐퍼가 말하는 ‘절망’이다.
3. 현대적 사고방식의 결정판 :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이러한 절망을 견딜 수 없었던 인간은 새로운 사고방식을 찾아내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존엄성, 의미, 가치, 도덕’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낀다. 따라서 근거는 찾을 수 없지만, "인간에게는 존엄성, 의미, 가치, 도덕이 존재한다고 그냥 믿자!" 이것이 바로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다. 이렇게 거칠고 단순하게 얘기하면 키에르케고르를 잘 아는 사람들은 매우 화를 내겠지만 쉐퍼가 말하는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키에르케고르의 ‘신앙의 도약’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합리적이고(잘 보아야 한다. 합리적이라는 말은 합리주의적이라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말씀하심을 믿을 방법은 없으니, 근거가 없더라도 그 분을 믿자는 것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 이후에 현대 신학은 종교적 실존주의의 믿음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합리적으로 근거를 갖고 객관적으로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하심을 믿었던 종교개혁자들과 달리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근거가 없이 논리적인 비약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주10) 쉐퍼의 설명에 따르면, 키에르케고르의 ‘비합리적인 신앙’이라는 개념은 현대 신학자인 칼 바르트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후 폴 틸리히 등의 현대 신학자들이 전제하는 기독교 신앙의 형태가 되었다(기독교 실존주의).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신앙은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는 전혀 다르다.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이란 합리주의적이진 않지만(즉,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합리적인(이성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질문하고 검증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신앙은 비합리적인 것으로서 ‘질문하거나 검증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신앙이란 지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서 ‘체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은 ‘지식’에서 출발하여 ‘감정’과 ‘의지’로 이어지는 전인적인 것이었는데, 키에르케고르의 신앙은 ‘지식’은 불가능하고 ‘체험’에서 ‘감정’과 ‘의지’로 이어지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변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이것이 포스트모던적 영성에 치우친 현대 복음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이 주로 말하는 ‘새로운 기독교’의 핵심이다). 키에르케고르주의자들은 이것을 세속적 사상에 대해 기독교 신앙의 자리를 확립한 ‘위대한 승리’라고 말하겠지만, 프란시스 쉐퍼는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고 타락시킨 현대적 사고방식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시작된 실존주의는 칼 바르트에게 이어져서 ‘종교적 실존주의’로, 사르트르, 카뮈, 야스퍼스, 하이데거 등에게 이어져 ‘세속적 실존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20세기를 지배하는 현대적 사고방식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나오며 프란시스 쉐퍼 삼부작의 핵심 중 하나인 헤겔과 키에르케고르를 다루어 보았다. 쉐퍼가 수백페이지에 걸쳐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단 몇 페이지에 쉬운 말로 설명하려고 했기에 상당 부분 거칠고 미흡한 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쉐퍼의 글을 완벽하게 소개하려는 것이 이 연재의 목표가 아니라, 쉐퍼를 보다 쉽게 이해하고 독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려는 것이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혹시나 철학적 배경지식이 없어 조금 어려웠다면, 시간을 두고 반복해서 공부해가면 반드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다음에는 쉐퍼의 두 번째 그림을 중심으로<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나머지 내용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 참고문헌
김정훈. “쉐퍼가 본 기독교 세계관의 철학적 기초.”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성인경 엮음. 1996. 『프란시스 쉐퍼 읽기』. 예영커뮤니케이션
성인경. “프란시스 쉐퍼의 교훈.”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이우재. “칸트, 헤겔, 그리고 쉐퍼의 진리관.”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주도홍. “프란시스 쉐퍼의 생애와 영성” (강의안)
Parkhurst, L. G. 1985. Francis Schaeffer. Kingsway Publications [국역: 성기문 역. 1995. 『프란시스 쉐퍼』. 두란노]
Schaeffer. F. A. 1968. The God Who Is There. Inter-Varsity 
Press, England [국역: 김기찬 역. 1994. 『거기 계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68. Escape from Reason. Inter-Varisty 
Fellowship, England [국역: 김영재 역. 1970. 『이성에서의 도피』.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72. 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 
Tyndale House [국역: 허긴 역. 1973.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76. How Should We Then Live? Fleming H. 
Revell [국역: 김기찬 역. 198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명의말씀사]


주1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 1장 16절)
주2 - 여 기서 ‘구원’(salvation)이란 총체적인 것인데, 시간적 측면에서 보면 ‘칭의’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 칭의(과거), 성화(현재), 영화(미래)의 ‘전시제적 구원’이며, 우리가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듯 ‘영적’이고 ‘종교적’인 구원만이 아닌 ‘전인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복음이 주는 구원이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모든 비정상적 문제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 된다는 것이다(이 개념은 우리들에게 매우 생소해서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모든 비정상적 문제’란 창조 이후 타락으로 발생된 모든 피조 세계의 뒤틀림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①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분리/영적 비정상성) ②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분리?소외/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모든 인간 사회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비정상성) ③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분열/심리적 비정상성) ④나와 자연과의 관계(파괴/환경적 비정상성) 등 우리 삶의 총체적 영역을 가리킨다. 복음은 이 모든 비정상적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대답이 된다.
주3 - 나의 개괄적인 소개를 읽는데서 머무르지 말고 프란시스 쉐퍼의<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직접 읽는다면 더욱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주4 - 쉐퍼는<거기 계시는 하나님>에서 더 많은 그림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지면상 제약으로 인해 그 중 두 개만을 사용하겠다.
주5 - 프란시스 쉐퍼, 1994, p.27
주6 - 칸트 1724~1804, 헤겔 1770~1831, 키에르케고르 1813~1855
주7 - ‘ 변증학’과 ‘변증법’은 전혀 다른 말이다. 변증학(또는 변증론, apologetics)이란 신학의 한 부분으로, 복음을 지적으로 변호하기 위한 학문 분야를 가리킨다. 그러나 변증법(辨證法, dialectic)이란,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주8 - 이것을 철학에서는 모순율(矛盾律)이라고 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논리학의 기본이 되어 왔다.
주9 - 반대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에서 시작하는 것을 ‘신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10 - 여 기서 어떤 분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의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는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즉, 믿음이 지식에 선행한다. 프란시스 쉐퍼가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내 생각으로는 믿음이 지식에 선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말씀하심’이라는 전제에서 논리적으로 출발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유일한 인간의 해답이라는 쉐퍼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키에르케고르처럼 ‘합리적인 근거는 없으나 믿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비합리적 신앙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