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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의 영적성숙을 방해하는 10가지 요소

Lewis Noh 2018. 2. 12. 11:12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성숙을 방해하는 10가지 요소 
R.C. Sproul 
<방해요소 4: 신(新) 수도원 제도, 방해요소 5: 논쟁을 꺼림>

교회사에 나타난 수도원 제도에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미화하는 성격도 있었다. 수도원으로 도피한 이들은 죄악된 사회의 전횡적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은신할 장소를 찾고 있었다. 수도원은 영적 정결함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피난처가 되었다. 
수도원 생활에 입문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기도와 영적 예배의 생활을 추구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수도원 생활을 세상과 격리되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옛날 수도원 제도의 한 요소였던 깊은 신학 연구가 신 수도원 제도에서는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신 수도원 제도란 일부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서 나타나는 바, 세상으로부터 “이탈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나는 그들의 생활 방식은 물론, 마음가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속성을 부인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의 1차적 활동 무대인 세상을 거부한다. 신 수도원 제도는 그리스도인들의 활동 범위를 영적 고립 지역 안으로 제한시킨다. 또한 여기에는 명백하게 “복음과 관계된 것”이 아니면 연구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런 거부 반응도 포함된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2년째 되던 해에, 대학 2학년이었던 나는 서양 철학 수업 시간에 영혼이 깊이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강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소론에 관한 것이었다. 그 강의는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여러 놓았다. 어린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보다 깊이 있는 믿음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 목표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읽었다. 
그리고 전공을 성경에서 철학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전공을 바꿀 때쯤 나는 우리 학교의 복음 동아리에서 거의 탈퇴한 상태였다. 친구들은 나의 그러한 공공연한 변절을 보고 반감을 가졌다. 나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골 2:8)는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다. 
친구들의 그러한 반응 때문에 혼란스러웠고 상처도 받았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약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굳건히 하기 위해서 철학을 배우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성경이 더 이상 전공 과목은 아니었지만, 성경 혹은 성경 공부를 거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무엇인가를 먼저 정확히 “알지”(aware)도 못한 채 어떻게 “주의할”(beware)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속 철학 공부는 나에게 성경에 계시된 것들의 깊이와 부요함에 대한 이해를 증가시켜 주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중대한 과제인 변증론의 문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주었다. 이교도들의 손에 이 세상을 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 수도원 제도는 무지를 낳는다. 문화와 문화를 형성하는 사상에 대한 무지뿐 아니라 신학에 대한 무지도 낳는다. 이것은 믿음의 힘보다는 믿음의 결여를 드러낸다. 
신 수도원 제도의 영향력은 파괴적이다. 세상에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서 은둔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무 태만으로 인한 패배를 겪어왔다. 미국 문화의 세속화를 비통해 하며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의아해 하는 것이다. 
신학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언제나 그렇다. 신학을 연구할 때면 반드시 논쟁이 뒤따른다. 우리 모두는 평화와 연합의 관계를 원한다. 성경이 다툼, 분열, 쟁론, 비판을 금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온유, 오래 참음, 자비 등 성령의 열매를 드러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툼의 영을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신학 연구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미국의 격언 중에 “종교와 정치에 관해서는 토론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생활의 기본 에티켓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종교와 정치에 관한 토론이 사람들에게 빛을 밝혀 주기보다 열을 올리게 만든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우리는 역사상 신학 논쟁으로 빚어진 중상 모략, 박해, 종교 전쟁에 신물이 났다. 
그러나 반면에 논쟁은 신학 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논쟁자 그리스도(Christ the Controversialist)라는 책에서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생애가 격렬한 논쟁의 삶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도들 역시 선대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논쟁을 벌였다. 바울은 자신이 날마다 시장에서 사람들과 논쟁을 한다고 말했다. 논쟁을 회피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회피하는 것이다. 우리는 평화를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진리가 길가에 버려지는 곳에서 얻는 평화라면 그것은 비굴하고 육적인 평화이다. 
하나님이 없는 논쟁을 피해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논쟁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논쟁의 긍정적 측면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신학 논쟁을 벌이는 것은 진리, 특히 신학적 진리는 영원토록 중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 없는 논쟁은, 논쟁하는 사람들이 신학을 잘 알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다. 그들은 비중 있는 쟁점들과 문제가 되지 않는 사소한 쟁점들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한다. “적은 지식은 위험을 초래한다”라는 또 하나의 격언이 있다. 사소한 일을 문제 삼는 것은 신학을 아직 잘 모르는 소치이다. 사소한 것에 과민 반응하고 다투는 사람은 아직 신학적 훈련이 덜 된 사람이다. 신학에 정통해 갈수록, 협상 가능하고 견딜 만한 문제가 무엇이며 힘을 다해 싸워야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 
<방해요소 10: 불순종>불순종을 우리의 성장을 막는 개별적인 원인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일 것이다. 불순종의 문제는 이미 밝힌 다른 모든 장애 요인들에 하나같이 어느 정도는 내포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불순종을 다른 모든 요인들에 공통적으로 포함되는 요인으로 말하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신학 연구를 소홀히 하는 이유들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신학을 해야하는 이유를 살펴보겠다. 더 깊이 있는 신학의 이해를 위해 가는 길에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우리에게는 시급한 과제이다.
신학은 영혼의 양식이다.
사람의 영혼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붙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의 이성이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관한 지식으로 채워져야 한다. 먼저 생각 속에 자리잡지 않은 것은 결코 마음에 자리잡을 수 없다. 영혼을 꿰뚫는 것이 없이 머리로만 신학을 아는 일은 가능하지만, 먼저 이성으로 이해하지 않고 영혼을 꿰뚫을 수는 없는 것이다.
교리를 지적으로 깨닫는 일은 영적 성장의 필요 조건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장의 충분 조건은 아니다. 필요 조건은 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이다. 그것 없이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산소는 불을 붙이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나 산소만 있다고 해서 곧 불이 붙는 것은 아니다. 산소가 자동적으로 불을 일으킨다면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즉, 산소는 불이 붙기 위해 있어야할 필요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 하나만으로는 불을 붙일 수 없다. 산소가 불을 붙이는 데 필요 조건이되 충분 조건은 아닌 것처럼, 교리는 우리 마음의 불을 밝히는 데 필요 조건이지 충분 조건은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은혜롭게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교리를 안다 해도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교리라 할지라도 우리는 냉랭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하라고 명하셨다
신학적 지식을 추구해야 할 두번째 긍정적인 이유는 신학의 연구 대상이신 하나님 그분이 우리에게 교리적 깨달음에 있어 진보할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고전 13:11)고 권고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적 이해라는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전 14:20). 이것은 우리가 지식을 가지고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 가운데서 자라가기 위한 것이다. 성숙한 지혜는 성숙한 삶의 기초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는 것은 큰 기쁨이자 특권이다. 그것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특권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충만하심까지 자라가라고 명하신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쉐마(Shema)를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 지니라”(신 6:4~9). 
이 성스러운 계명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법을 배우고 그분의 계시를 습득해야 한다는 엄숙한 의무가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부주의하게 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해지려면 신학 연구에 깊이 빠져들어야 한다.
이제 다시 한번, 올바른 생활 없이 올바른 신학을 갖는 것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올바른 신학 없이 올바른 생활을 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추상적인 학문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 그것은 삶과 죽음, 심지어는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의 문제이다. 이 책은 신학적 조망 위에서 그러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찰하는 여행의 안내서로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