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과 희극의 치유적 의미
로미오와 줄리엣이 세익스피어의 비극에 들지 않는 것은 그 비극적 결말이 주인공이 지닌 인간적 결함과 부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 비극이 로미오에게 전한 편지의 전달자가 페스트 때문에 봉쇄 지역에 갇히는 우연적 사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우리 삶의 고통이 자기 결함에 그 원인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비극의 주인공의 삶을 우리 자신의 삶에 그대로 미메시스(mimesis)하게 만든다.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다는 사실 사이에 미메시스가 생겨서 일련의 동일시에 의한 죄책과 그 감정으로부터 해방이 일어나는 것과 유사하다. 적어도 심리적 과정에서 유사성이 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이런 류의 카타르시스가 신앙이 가져다주는 본질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는 같을 수는 없다.
마치 기름 떼를 빼기 위해서는 기름으로 지워야 하듯이 우리 내면적 감정과 외적 상황이나 사건이 지닌 동질성 때문에 일어나는 내적 카타르시스는 단지 부정적 에너지의 방출만을 의미하지 않고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전향적인 변화를 불러온다. 우리는 이런 것을 성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긍정의 심리학이 미국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자기 계발서들이 넘쳐났고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경향들이 일어났다. 종교계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10여 년 전에 대유행을 했던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로버트 슐러나 노만 빈센트 필 같은 류의 자기고양의 심리학적 종교가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과연 자기 긍정은 이런 형태의 것이었을까? 아마도 자기 긍정을 더 추적해 올라가면 그리스 희극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쉽게도 희극은 남아 있지 않다.
그리스 희극이 남아 있었다면 이런 형태였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희극의 본질은 사실 비극과 맞닿아 있다. 어느 코메디언은 코메디를 "자기를 비웃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실제 우리가 코메디와 관련한 어법으로 "희화화"라는 말을 쓰는데 삶의 어느 국면의 우스꽝스러움을 비웃어 줄 수 있음으로 해서, 비극적 카타르시스 이후에 찾아드는 자기 삶에 대한 직면 같은 것이다. 비극의 정황과 내 삶의 정황에 미메시스가 일어나는 것처럼 희극에서의 자기 삶을 비웃는 주인공의 정황은 나 자신의 상황에 대입되면서 내면에 긍정을 형성한다. 예컨대, 웃음을 일으키는 여러 포인트가 있을 수 있지만 내가 흔히 하는 실수나 내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부조리를 희극인이 무대에서 과장된 화법으로 드러낼 때, 우리는 웃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거기서 내가 보인 허세나 위선들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코메디 같은 짓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애써 감추어 왔던 일이 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고 웃게 되는 것이다. 실제 우리 주변의 유머 코드도 이와 유사해서 유머는 바로 그와 같은 동질감이 주효한 이유가 된다.
그런데 자기 긍정은 사실 자기를 비웃거나 자기 결함을 직면할 용기가 없을 때 주로 일어난다. "긍정의 배신"이란 책을 보면 유방암 환자들의 자기 긍정은 대 실패로 돌아간다. 오히려 자신이 유방암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더 오래 산다. 진정한 의미의 희극은 비극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다. 그런데 자신의 비극적 결함을 마주하지 못하는 자들이 자기 헌 데를 핥는 자기 긍정은 그런 류의 힘을 갖지 못한다. 오늘날 많은 심리학과 심리학적 종교들은 어줍잖게 이런 희극을 흉내내고 있다.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보면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서 살인의 동기는 바로 희극을 읽지 못하도록 범인이 독약을 묻혀둠으로 일어난 사건이란 것이 소설이 전개되면서 점차 드러난다. 창문 하나 없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어두운 수도원은 그리스 비극미와 맞닿아 있고 성경에서 흑암과 어둠에 계시는 하나님과 맞닿아 있다. 우리 삶의 비참을 깨닫고 흑암 속에서 조용히 자기 내면을 침잠해가는 수도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희극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범인의 이러한 살인의 의도는 희극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죄와 비참에 집중하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기쁨을 도려낸 것, 역시 자기 긍정만큼이나 자기 삶을 직면하지 못하는 데서 빚어진 왜곡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에는 애통과 기쁨이 공존한다. 자신의 결함을 깨닫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그리스도 앞에서 그 죽음의 당사자가 자신이어야 함을 깨닫고 애통하는 비극적 미메시스가 먼저 있어야 한다. 이 힘이 방출되고 그리스도께 수납된 자신을 알게 될 때, 용납되고 받아들여지고 용서된 자신을 알게 될 때, 더 이상 어리석게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긍정에 의지하지 않고 희극적 미메시스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유연하게 관조하면서 가볍게 비웃어 줌으로 유연하게 인생의 어려움들에 대처하게 된다. 거기에 참된 자유가 있고 기쁨이 있다.
나는 핵심감정 공동체 훈련에서 이런 국면을 "나의 불행이 남의 행복"이라고 말해준다. 내 삶의 비극적 결함에 대한 애통과 맞딱뜨림은 어느새 자기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리에 이르게 하고 그런 희극적 관조는 타인에게 위로가 되며 그 위로를 인해서 진정한 의미의 자기고양을 경험하게 된다. 잘난 체와 똑똑함으로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라 탁월함이나 고지를 점령함으로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상처를 인하여서 내가 지닌 인간적인 결함과 부패를 인하여서 타인이 위로를 받는 자유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진정한 기독교 공동체는 여기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