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으로 영화 ‘밀양’ 읽기
신학으로 영화 ‘밀양’ 읽기
신광은 목사
들어가는 말
영화 ‘밀양’은 기독교 영화일까? 감독 이창동님은 기독교 영화가 아니라고 했다는데.. 그러면 안티기독교 영화일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러면 밀양은 기독교 영화도 아니고, 반기독교 영화도 아닌가? Maybe.. 영화를 기독교 영화, 비기독교 영화로 재단하는 것은 절대로 좋은 영화보기 방식이 아니다. 내 생각에 영화는 진지한 영화와 진지하지 못한 영화가 있다. 그리고 진지한 영화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았든 아니면, 반기독교적 메시지를 담았든, 그도 아니면 기독교와 아무 상관이 없는 소재를 다루었든 기독교인이 눈여겨보아야 한다. 반대로 진지하지 못한 영화는 아무리 기독교적인 내용으로 떡칠을 한다고 해도 기도교인으로서 박수쳐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진지한 영화란 어떤 영화를 말하는가? 그것은 솔직한 영화다. 영화가 시대와 장소, 문화를 뛰어넘어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솔직하고 진실되게 보여줄 때 우리는 그 영화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러한 점에서 ‘밀양’은 진지한 영화다. 확실히 영화, 밀양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보편적인 실존적 고뇌와 번민을 만난다.
그러나 ‘밀양’은 진지한 영화 그 이상이다. 밀양은 감독이 의도하건 하지 않았건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를 정면으로 건드렸다. 이것은 ‘밀양’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밀양’은 성경이 가장 강조하여 가르치고, 또 신학이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다루는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직접화법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밀양’이 건드린 그 기독교의 메시지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초두에 ‘밀양’이 기독교 영화인지를 물었던 이유다. 이 영화를 기독교 영화로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 물음에 답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밀양’을 한 번 더 곱씹어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리라 믿는다. ‘밀양’이 기독교 영화인지 아닌지에 대한 탐구를 하기 위해서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첫째, 신애의 구원 체험은 참되었나? 둘째, 사형수의 사죄 체험은 참된가? 셋째, 신애는 결국 하나님께 돌아왔는가?
1. 신애의 구원 체험은 진짜였나?
첫째, 신애의 구원 체험은 참되었는가? 이 영화는 서론이 매우 길다. 이 영화가 진짜로 던지고 싶은 질문들, 하고 싶은 말들은 신애가 구원체험을 하고 난 뒤부터 나타난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까지 오기 위해서 영화는 거의 절반 이상의 분량을 배경을 설명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전반부의 긴 서론은 관객들로 하여금 신애의 고통을 공감하도록 만드는 데 훌륭하게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신애의 절절한 절규, 가슴에 통증을 유발하게 하는 처절한 한을 느낀다. 길을 걷다가 주저앉아 가슴을 부여 앉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신애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 역시 숨이 턱에 차오는 것을 느낀다. 관객의 이러한 공감은 영화가 던지는 실존적이고 신학적인 질문들을 자신의 문제처럼 실제적이고 생생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제는 ‘고통’이다. 그런데 그 고통에서 신애는 거짓말처럼 벗어났다. 평생을 소리로 엮어내기에도 벅찰 것 같던 신애의 아픔과 절규는 목사님의 한 번의 안수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과연 이러한 신애의 구원 체험은 참되었는가?
신애의 구원 체험이 참되었는지 묻는 것은 이 영화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지, 그리고 신애는 진짜로 그 신과 만났는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신애의 구원 체험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그의 가슴의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신애에게 일어난 그 신체적 변화가 일종의 심리적인 최면효과는 아닌지를 묻게 만든다. 왜냐하면 신애의 변화가 너무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슬픔이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는가 말이다. 또 사실 이 질문을 유발하게 만드는 것은 감독의 연출과 전도연씨의 연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애가 안수를 받는 장면은 조금 이상하게 그려졌다. 그토록 절규하던 신애가 목사님의 안수와 함께 갑자기 울음을 멈추다니.. 차라리 신애가 더 크게 절규하고, 더 크게 눈물을 터뜨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애의 구원체험의 진실성 여부를 묻게 만드는 이유는 그가 신앙을 포기하는 모습 때문이다. 물론 관객은 충분히 신애와 정서적으로 동일시되었고, 이 때문에 관객은 신애의 실족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만일 신애가 진짜로 하나님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반대의 상황을 가정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신애의 구원체험이 거짓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신애에게 일어난 변화는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문제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김종찬은 신애의 동생이 교회에 다니냐고 묻자 마음이 조금 편해지기 때문에 교회에 다닌다고 답한다. 그러니까 종찬식으로 표현하자면 신애는 워낙 마음이 갈급한 상태였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고, 그래서 기도회에 참석해서 목사님의 안수 기도를 붙잡은 것이다. 이것을 쉴라이에르마허식으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전적인 정서적 의존을 경험한 것이고, 마르크스식으로 말하자면 종교적 아편 한 방을 맞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이 존재하느냐, 그 신을 만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신애의 구원체험이 이렇게 순전히 심리적인 것이었다면 신애가 사형수를 만난 뒤 굳이 신을 향해 삿대질을 할 필요는 없었다. 신애가 만일 처음부터 신을 만난 것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그녀는 처음부터 마음의 평정을 간절히 찾는 과정 중에서 일종의 정서적 의지처를 얻은 것에 불과했다면, 그가 사형수를 만난 뒤 깔끔하게 자신의 종교 체험을 부정하면 될 일이다. 마치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시73:20] 그는 자신이 교회의 속임수에 속았다, 목사에게 속았다, 그 부흥집회가 자신의 감정을 조작했다는 식으로 무시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형수를 만난 뒤 더욱 더 하나님을 맞대면했다. 그녀는 신을 마주했고, 신을 노려보았으며, 신에게 저항했다. 모든 교회 신자들이 그녀가 신앙에서 떨어졌다고 판단하는 그 순간에도 신애는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정면으로 주시했다. 비록 그 눈빛이 불손하고, 신성모독적이고, 참람하게 보일 지라도 그녀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럴 필요까지 없었다. 최초에 그녀는 보이지 않는 것도 안 믿고, 보이는 것도 다 안 믿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약국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햇빛을 더듬으며 “아무 것도 없어요”라고 내뱉듯이 신을 무시하지 않았는가? 믿음을 가지기 그 전으로 돌아가면 될 일을, 그녀는 하나님께 점점 더 다가가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의 구원 체험이 단순히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것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확실히 그녀는 안수기도를 받는 순간 하나님을 만났다!
2. 사형수의 사죄 체험은 진짜인가?
둘째로 사형수의 사죄 체험은 참된가? 사형수는 과연 감옥에서 진짜로 하나님을 만난 것인가? 그리고 그는 진짜로 그가 주장하는 대로 죄 용서를 받은 것인가? 사형수의 경우에도 신애와 마찬가지로 그의 마음 속에 모종의 효과가 있었다. 최소한 그에게도 마음에 평안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고 확신 있게 간증하고 있다.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지금 감옥 안에 있지 않는가? 그러나 문제는 만일 그가 만난 사죄 체험이 참되다면 어떻게 그렇게 도도하고 당당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교만할 수 있고, 또 어떻게 그렇게 오만할 수 있는가? 회개를 했다고? 회개를 한 녀석이 어떻게 그렇게 자신이 행한 끔찍한 일을 그렇게 간단히 잊을 수 있는가? 지금 자신 앞에는 자신이 죽인 그 아이의 엄마가 앉아 있지 않는가? 그런데 그렇게 태연히, 미안한 구석은 조금도 없이 그렇게 앉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신애가 차로 칠 뻔했던 젊은 부부는 말한다. “사람을 죽여 놓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다야?” 확실히 부조리하다. 사형수는 신애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딱 한 번 했는데, 그것도 자신의 살인죄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애가 생각보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하니까 립 서비스로 살짝 한 말이었다. 과연 이것이 용서받은 자의 태도인가? 과연 이것이 기독교의 용서인가? 다 떠나서 만일 사형수가 진짜로 하나님을 만났다면 어떻게 그 놈은 신애에게 그렇게 여전히 잔인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사형수가 했다고 하는 그 사죄 체험에 대한 문제와 그가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전달하는 자세의 문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구분이 정당한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아 있지만 그러나 사형수가 주장하는 자신의 사죄 체험이 진실한지의 여부를 논하는 마당에서 그가 교만한 듯 보이는 자세로 자신의 체험을 간증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묵인해 줄만한 아량도 필요할 것 같다. 만일 우리가 그의 거들먹거리고 위선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의 간증 태도를 눈감아 준다면 이제 우리는 그가 주장하는 사죄 체험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문제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과연 그가 주장하는 대로 그는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진짜로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일까?
신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반대 상황을 가정해 보자. 그러니까 사형수가 주장하는 사죄의 체험은 가짜였던 것이다.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준을 납치했고, 그 어린 것을 살해했다. 그의 납치와 살해로 준의 엄마의 인생은 송두리째 망가지고 말았다. 오직 한 아이만 바라보고 살던 아이의 엄마의 삶은 처절히 짓밟혔다. 그는 이미 그의 딸 아이를 망치고 있었다. 그의 몰인정과 폭력으로 말미암아 그의 딸은 중3인데도 탈선의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자신의 범죄에 동원했으며, 결국 그가 체포된 되 딸 아이는 학교를 때려 치우고, 사고를 쳐서, 소년원까지 가게 된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악하다. 그는 체포되어 끌려가면서도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를 똑바로 쳐다볼 줄 아는 뻔뻔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감옥에 들어갔다. 아마 그는 사형언도를 받을지 모른다. 잘 처신한다고 해도 무기징역이다. 그의 인생은 이제 끝장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존심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사형? 누가 자신을 사형시킨단 말인가? 죽는다면 스스로 선택하여 죽는 것이다. 무기징역? 누가 자신을 감옥 벽에 가두어 둔단 말인가? 그저 그가 선택해서 감옥에 있을 뿐이다. 세상에 사는 삶이 너무 번잡하여 푹 쉬러 제 발로 들어온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선택이다. 그러자니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해 줄만한 뭔가가 필요했다. 만일 그가 더 이상 살 수 없다면 차라리 순교자가 될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기독교였다. 그런 목적에서라면 기독교만큼 괜찮은 종교가 또 어디 있겠는가? 결국 그는 종교를 빙자하여 스스로 자신의 죄에 대한 합리화를 시도한 것이다. 기독교는 손쉽게 양심의 가책을 잠재울 수 있는 수단이요, 자신의 비참한 형편을 힘들지 않게 변명할 수 있는 구실이다. 이것이 사형수의 사죄 체험의 본질이라고 해보자.
만일 신애의 구원 체험은 참되지만 사형수의 사죄 체험은 거짓이라고 가정할 경우 신애가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는 소멸된다. 사형수는 진짜로 용서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를 이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그 끔찍한 죄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또 하나의 큰 죄를 추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사형수가 자신이 용서받았다고 주장하면 할수록 그의 죄악은 더욱 커지며, 그는 더욱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다. 만일 사형수가 더욱 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 아래 있을 뿐이라면 무엇 때문에 신애가 하나님을 원망하겠는가? 그는 더욱 더 사형수를 긍휼히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사형수의 악마성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지를 목격하고 더욱 더 간절히 눈물로 그에게 자신의 용서의 진정성을 알리고, 그에게 거짓 회심이 아니라 진짜 회심을 간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만일 사형수의 사죄 체험이 가짜라면 신애는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말한다. “벌써 용서를 받았다는데 어떻게 용서해요?” 신애가 하나님을 원망한 이유는 하나님이 사형수를 진짜로 용서했다는 뜻이다. 사형수는 진짜로 용서받았고, 진짜로 그의 죄가 사라졌다. 그러니까 사형수가 그저 자기 확신에 차서, 혹은 자기 정당화를 위해 용서받은 척 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신애의 아들, 준을 죽인 죄가 사라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애를 분노에 떨게 만든 것이다. 신애는 준의 시신이 유기된 현장에서도, 준이가 불에 타 재가 되는 화장장에서도, 그리고 사망신고를 마치고 동사무소를 휘청거리며 빠져나오는 중에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형수를 면회하고 난 뒤 그녀는 쓰러졌다. 왜인가? 신애가 계속 살 수 있을 최후의 이유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신애에게는 불행당한 자의 채권의식이 있었다. 이 채권 의식은 신애가 살 수 있는 마지막 남은 힘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애의 그 채권 의식을 빼앗아가 버렸다. 최소한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빼앗겼다는 불행한 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었다. 또 그녀는 자신의 그 권리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불행을 안겨준 살인마를 용서해 줄 아량을 베풀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애의 통장에 남아 있던 최후의 잔고마저 빼앗아 가버렸다. 아량은 그녀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사형수가 베풀고 있다. 신애가 하나님을 만난 것도 사실은 사형수의 기도 덕분이다. 그녀는 아들도 빼앗겼고, 용서할 권한도 박탈당했으며, 아량도 베풀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3. 신애의 분노는 정당한가?
영화를 통해 우리는 위의 두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답을 내리게 된다. 신애는 참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사형수는 진짜로 죄의 용서를 받았다. 그렇다면 신애의 분노는 정당한가? 사실 우리는 신애 앞에 자신의 사죄 체험을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사형수에게서 역겨움을 느낀다. 그의 감격스러운 간증은 도리어 가증스러움과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관객은 신애와 동일시되어 그녀의 분노에 참여한다. 신애와 동일시된 관객에게 신애의 분노는 정당하게 느껴진다. 옳다, 신애의 분노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녀의 분노는 누구를 향하는가? 자신을 교회로 인도한 약국 집사님? 아니면 목사님? 살인범? 아니다. 그녀의 분노는 하나님을 향한다. 그녀를 화나게 한 이는 교회도 아니고, 살인범도 아니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그녀를 분노하게 한다.
신애가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기에 그녀의 분노는 실존적이고, 또 신학적이다. 이 점에서 영화,<밀양>은 심각한 신학적 논쟁을 유발시킨다. 이 논쟁은 신정론, 곧 신의 정당성에 관한 문제이면서 또한 기독교 은혜 교리의 근본을 문제 삼는다. 영화,<밀양>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죄에 관한 기독교 교리의 취약점, 곧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의 무차별성을 정확히 노출시킨다.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유대인과 헬라인, 의인과 죄인, 남녀노소, 빈부귀천은 동일시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애와 살인범마저 동일시한다. 그러나 어떻게 아들을 잃은 신애와 똑같이 신애의 아들을 죽인 살인범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피해자나 가해자가 똑같아진단 말인가? 어떻게 똑같을 수 있는가? 한 사람은 살인범이고 한 사람은 자식을 잃었는데.. 만일 두 사람을 똑같게 여기는 것이 기독교의 은혜라면 그것은 부조리하다. 무차별적인 하나님의 은혜, 이것은 분명 부조리하다. 아무리 종교가 좋은 것이고, 또 용서나 은혜가 좋은 것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다. 어떻게 피해자와 가해자가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한 사람은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는데 어떻게 두 사람이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만일 기독교가 이런 식의 은혜 교리를 전한다면 기독교는 범죄를 조장하는 저급 종교임에 틀림없다. 결국 기독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죄인들을 향한 복음이 아닌가? “죄인들이여, 죄를 지어라, 마음껏 악을 행하라, 그대들이 죄를 짓기도 전에 그대들의 죄는 이미 다 용서되었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애의 분노는 부당하다. 그녀가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녀의 분노는 정당화될 수 없다. 신애가 사형수에게도 자신과 동일한 은혜를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분노하는 것이라면 그녀의 분노는 용납될 수 없다. 어째서 그런가? 예수님은 이에 대해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통해 답하셨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구하러 아침 일찍 저자 거리에 나섰다가 오전 9시경에 일단의 노동자들을 만난다. 그들에게 하루 일당을 주고 고용한다. 아직 노동자가 부족해서 또 거리에 나섰다가 오전 11시에 또 몇 명을 고용한다. 오후 3시경에도 또 몇 명을 고용하고 일과가 끝나기 1시간 전인 오후 5시에 마지막으로 몇 사람을 더 고용한다. 오후 6시, 포도원 주인은 오후 5시에 온 사람부터 오전 9시에 온 사람까지 똑같이 하루 일당을 준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은 이게 웬 횡재냐며 좋아 난리지만, 오전 9시에 온 사람들은 분노하며 주인이게 대든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20:12] 그러나 주인은 9시에 온 일꾼들의 분노가 부당하다며 물리치신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20:13-15]
그렇다. 9시에 온 일꾼들의 분노는 정당화될 수 없다. 주인은 일찍 온 사람들에게 덜 준 것이 아니라 늦게 온 사람들에게 더 준 것이다. 하루 일당을 주기로 한 주인의 약속은 모두에게 지켜졌으며 따라서 주인은 불법을 행하지 않았다. 이것은 신애에게도 마찬가지다. 만일 신애가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고 있다면 그녀는 스스로 9시에 온 일꾼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내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준이를 잃어 죽을 고통당하고 있는 나와 같게 하였나이다.” 그러나 그런 신애에게 하나님은 답하신다. “딸아,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평화와 안식, 구원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구원이나 간직하라. 살인범에게 너와 같은 평화와 안식, 구원을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신애가 하나님께 분노하는 것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사실 신애는 단지 하나님이 살인범을 용서해서 분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보다 ‘먼저’ 살인범을 용서해서 문제인 것이다. 그녀는 절규한다. “어떻게 내가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가 있나요?” 신애는 사형수의 심판과 정죄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녀는 사형수를 용서하고 싶어 했고 또 그가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용서받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용서받기를 원했다. 어쩌면 그녀는 진심으로 사형수가 자신의 말을 듣고 죄책감과 두려움에서 해방되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자신으로 말미암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신애의 주도권을 앗아가 버리신 것이다. 하나님은 신애보다 먼저 살인범을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신애가 살인범을 용서할 아무런 사면권을 남겨놓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다 용서했으니 신애가 용서할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것이 그녀를 분노하게 한 것이다.
사실 이 점에서 영화는 다소 과장하고 있다. 성서는 사죄가 대신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대인적 차원이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모든 범죄와 용서는 이중적이다. 우리는 인간에게 죄짓는 동시에 하나님께 죄지으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받고 동시에 인간에게도 용서받아야 한다. 성서는 신애가 살인범을 용서해 줄 여지가 남아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비율은 고작 1만 달란트 대 100데나리온 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비율이나마 신애에게는 여전히 100데나리온 어치의 사면권이 있으며, 살인범은 자신의 채무를 변제해 주기를 겸손히 신애에게 구해야 했다. 그러나 영화는 신애와 살인범의 채권 채무관계를 소멸시켜 버렸다. 확실히 이것은 과장이다. 그러나 영화가 ?기독교 강요?와 같은 조직신학 서적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밀양>의 과장은 상당히 심각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영화요 예술이다. 미학적 과장으로서<밀양>의 과장은 용납될만 하다.
그러나 설령<밀양>의 과장을 눈감아 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신애의 분노는 정당화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살인범의 사면이 아니라 자신의 사면권에 대한 권리 주장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살인범이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용서하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자신의 사면이 앞서야 하고 하나님보다 자신의 용서가 주도적이어야 한다. 이 점에서 그녀는 하나님과 대결하려고 한다. 만일 그녀의 분노가 하나님보다 자신이 먼저, 더 나아가 자신이 전적으로 용서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면 그녀의 분노는 부당하다.
신애의 분노가 부당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함부로 신애의 분노가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애의 분노는 부당하면서도 동시에 정당하기 때문이다. 신애가 하나님을 향해 분노할 때 하나님 앞에서 그녀의 분노는 부당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만 내릴 수 있는 판단이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누구도 신애의 분노가 부당하다고 비난할 수 없으며 그녀를 고소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이외의 누구도 신애를 비난할 ‘자격’을 갖춘 이가 없기 때문이다. 자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통이다. 고통당하는 자로서 신애의 분노는 정당하며 아무도 그를 비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는 부당하지 않다. 우리는 영화에서 그녀를 고소하는 여러 사람들을 보게 된다. 신애의 시어머니는 신애를 고소한다. “너는 눈물도 없니?” 또 신애가 사형수를 면회하고 난 뒤 교회를 나가지 않자 교인들은 신애를 고소한다. 신애가 시험에 들었다고.. 교인들은 말하기를 신애가 구원에서 떨어졌으니, 다시 구원받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를 빙자한 고소다. 신애가 목사님의 기도를 방해할 때 약국 집사님은 신애를 고소한다. 감히 목사님의 기도를 방해한다고.. 그러나 이 모든 고소는 다 틀렸다. 왜냐하면 신애는 고통당하고 있지만 고소자들은 고통당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신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말할 때 신애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그녀의 고통이지 그녀의 변증이나 주장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애에게서 또 한 사람의 욥을 본다. 욥도 신애처럼 하나님께 분노했다. 그는 자신이 왜 이유 없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따져 물었다. 고통 중에 있는 욥은 하나님이 부당하게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며 하나님을 고발했다. 이때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변호인으로 자처하고 나섰다. 그들은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하여 욥을 비난했다. 그리고 그들의 비난은 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있으며 신학적으로 타당했다. 반면에 이들과 논쟁에 나선 욥은 덜 논리적이고 일관성이 떨어지며 불경건하고 참람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고발하는 욥을 법정으로 불러 세운다. 법정에 나선 욥은 하나님과 대면하고 논쟁을 벌이지만 그는 결국 패배한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고소는 부당하게 판명되었으며 욥은 회개하며 자신의 고소를 취하앴다. 하나님을 향한 욥의 고소는 부당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이 아니라 욥의 손을 들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욥42:7] 욥이 더 정당하다. 왜 그런가? 그것은 고통 때문이었다. 욥에게는 고통이 있었으나 욥의 친구들에게는 고통이 없었다. 욥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은 그의 고통이지 그의 말이 아니다. 이것은 신애에게도 마찬가지다. 고통 받지 않는 자는 누구도 신애를 고소할 자격이 없다.
만일 그를 고소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고통당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고통이 없다면 입을 다물라! 이것이 욥기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고통당하기 때문에 욥은 정당했고, 고난 중에 있기에 신애는 정당했다. 그래서 그의 분노도 정당했다. 고통이 없는 사람은 고통당하는 사람을 고소할 수 없다. 여기서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인 ‘고통에의 참여’를 보게 된다. 준이의 장례식을 마치고 난 뒤 준이의 할머니는 신애를 비난한다. 그 비난의 내용은 신애가 자신의 고통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준이의 할머니는 고통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고통만큼만 정당했다. 따라서 그녀보다 더욱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신애를 비난할 때 그녀의 비난은 더 이상 정당할 수 없다. 식구들이 만류하여 떠밀리듯 물러가는 신애의 할머니를 종찬이 따라가며 비난한다. 종찬의 비난의 내용은 신애의 할머니가 신애의 고통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이었다. 분명 종찬의 이 비난은 옳았으나 정당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종찬은 준이네 가족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이며, 가족이 아니라는 말은 가족의 고통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구들은 묻는다. “당신이 뭔데?” 신애의 동생도 묻는다. “지금 뭐하는 거에요?” 종찬의 말이 맞건 틀리건 종찬은 준이 할머니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종찬에게 필요한 자격은 바로 고통이었던 것이다.
확실히 종찬은 자격이 없었다. 최소한 처음에는 그랬다. 신애가 유괴범으로부터 처음 전화를 받고 달려간 곳은 종찬의 카센타였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종찬은 가게 안에서 노래방 기기를 틀어놓고 노래하고 있었다. 물론 그 모습이 그리 즐거운 모습은 아니었다. 어딘가 우울하고 어딘가 쓸쓸하고 외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종찬과 신애의 사이에는 심연의 간격이 있었다. 유리문은 그러한 점에서 두 사람의 실존적 간격을 상징한다. 서로 마주볼 수 있으나 영원히 건너지 못할 거리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애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것이 종찬의 자격 없음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종찬은 점점 신애의 고통에 참여한다. 경찰서에서 살인범이 신애를 쳐다보았다고 분노하는 순간, 장례식장에서 신애를 비난하는 준이 할머니를 비난할 때, 신애를 따라 교회당을 따라 나오고 노방전도마저 마다하지 않는 순간, 종찬은 점점 신애의 고통에 참여하게 된다. 항상 종찬은 그림자처럼 신애 곁을 따라다닌다. 물론 그러한 중에도 여전히 종찬과 신애 사이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살인범을 면회할 때 종찬은 신애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신애가 한 밤중에 살인범에게서 전화가 온 환청을 듣고 종찬에게 도움을 구했을 때 종찬은 신애를 나무랐다. 신애가 하나님을 향해 저항하고 있을 때에도 종찬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신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는 신애의 머리카락 냄새나 맡는 변태 같은 이요, 어떻게든 노총각 신세를 면해보려고 과부나 찝적대는 속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엇갈림에도 불구하고 종찬은 지속적인 노력으로 신애의 고통에 참여한다. 신애가 장로의 유혹에 실패하고 늦은 밤 종찬의 카센타를 찾아서 종찬에게 섹스하고 싶으냐고 물을 때 종찬은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어쩌면 그녀는 꿩대신 닭이라는 심산으로 종찬을 유혹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끊임없이 탐하는 종찬에게 싼 값에 자기 몸뚱아리를 내 던져 줌으로써 신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찬은 이를 거절하며 도리어 분노한다. 종찬의 불같은 분노는 그가 얼마나 진실하게 신애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그래서 얼마나 깊이까지 그녀의 고통 가운데 참여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애가 정신병원을 퇴원할 때에도 종찬은 신애 곁에 있다. 신애의 동생마저 잠깐 신애를 면회하고 사라지는 순간에도 종찬은 신애 곁을 떠나지 않는다. 종찬의 이러한 동행은 점차 신적인 동행이 되어 간다. 마치 햇빛이 항상 신애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종찬은 신애를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신애가 머리를 하고 싶다고 하자 종찬은 그녀를 미장원에 데려다 준다. 그런데 그곳에서 신애는 살인범의 딸을 만난다. 살인범의 딸이 그녀의 머리를 만지는 순간 신애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누구를 향한 분노였는가? 그렇다. 신을 향한 분노였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머리를 함으로 과거를 잊고 새롭게 출발하려고 마음먹은 바로 그 날, 어김없이 신의 섭리는 신애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하나님은 신애의 머리카락을 살인범의 딸의 손에 맡기게 함으로써 신애가 과거로부터 달음박질하지 못하도록 막아선다. 결국 그녀는 신의 섭리에 굴복할 수가 없어서 미장원을 뛰쳐나온다. 놀라 함께 뒤어 나온 종찬을 향해 신애는 분노를 쏟아놓는다. “왜 오늘 같은 날, 나를 왜 하필 이 미장원으로 데리고 왔느냐구요?” 확실히 이 분노는 종찬을 향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그러나 신애는 하늘을 향해 소리치고 있지 않았다. 종찬을 향해 분노하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종찬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애는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요, 피할 수 없는 햇볕같은 종찬을 향해 분노하고 있었다.
종찬은 신애의 고통에 참여하면서 점점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루고 있었으며,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로 쓰임받고 있었다. 고통의 참여는 인간적인 행위가 아니라 신적인 행위이다. 참으로 놀라운 신학이다! 종찬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그가 신애를 향해 거울을 들어주는 마지막 장면이다.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신애 앞에서 거울을 들어주는 종찬의 모습은 그가 완전히 신애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고 있으며, 그의 사랑은 완전한 아가페를 이루었고, 두 사람은 그런 점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었음을 놀랍게 보여주고 있다. 거울을 들어주는 종찬에게서 속물이나 변태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강도만난 자의 이웃으로 신애 곁에 있는 그리스도다.
이 점에서<밀양>에 비쳐진 기독교는 한심한 기독교다. 약국 집사님도, 장로님도, 구역원들도, 목사님도, 부흥사도 어느 누구 하나 종찬과 같은 참여를 보여주지 않고 있지 않다. 그저 신애 한 사람을 전도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물론 자신의 교회로 끌어 가려는 추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약국 집사님이 신애에게 다른 교회를 소개할 때 일면 그 집사님은 진심으로 신애가 치유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관심과 애정은 어디까지나 개종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그저 신애가 기독교로 개종하느냐의 여부, 교회를 출석하느냐의 여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밀양>의 기독교의 가장 큰 잘못은 신애의 고통과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형수의 사죄 체험을 접한 신애는 분노로 몸을 떤다. 하지만 목사님과 교인들은 신애의 그 분노가 용서가 잘 안 되어서 그러는 거라고 넘겨짚는다. 사실 이러한 오해는 종찬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종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 반면 교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해는 참여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즉 고통에 참여하지 않음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신애의 고통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도리어 신애의 고통을 부당하다고 고소한다. 고통에 참여하지 않는 기독교는 고통당하는 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요, 이들은 말로만 사랑을 운운할 뿐 자신들이 하는 말을 전혀 실천하지 않는 위선적인 자들이다.<밀양>의 이러한 비판은 그 깊이나 정확성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밀양>속에 비춰진 기독교는 가장 속물스러운 종찬만도 못한 기독교다. 고통당하는 자의 고통에 참여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 고통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 기독교다. 하나님의 은혜를 운운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다. 말은 하면서도 말대로 실천하지 않는 기독교, 그래서 영화는 기독교를 실랄하게 비판한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4. 신애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는가?
사형수의 사죄체험을 전해들은 신애는 하나님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을 떠나는 방식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었다. 교회당에 쳐들어가서 의자를 두드리며 교인들의 기도를 방해할 때, 레코드숍에서 음반을 훔쳐 달아날 때, 산속 부흥회를 망쳐놓을 때, 장로를 유혹할 때, 그리고 끝내 자신의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할 때 그녀의 눈빛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다. 비록 그 눈빛이 분노와 살기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을 향하여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분노가 커질수록, 그녀의 저항이 강렬해 질수록, 그녀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 질수록 하나님은 점점 더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장로가 그녀의 몸을 탐하고 있을 때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관객은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카메라가 점점 그녀에게 다가갈 때 그녀가 하나님을 향해 “보여?”라고 외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신애에게 다가가는 카메라는 관객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이었다. 그녀는 하나님을 응시하고 있었고 카메라를 빌어 하나님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카메라가 다가간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점점 그녀에게 다가간다는 의미다. 그녀가 하나님께 저항하면 할수록 그녀는 점점 더 하나님께 다가가고 있었으며 하나님도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신애는 진짜 신앙을 하게 된 것이다.
신애의 저항은 결국 자살을 감행하게 한다. 자살만큼 강력한 저항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맞서 자기 주권의 가장 강력한 주장이다. 자살은 자신의 생명, 자기 운명에 대한 주권 선언이며, 자살은 하나님에게 은총과 용서를 베풀 기회를 허락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신에 대한 인간의 최종적 독립선언이다. 그러나 신애는 결국 삶은 선택한다. 자살의 문턱까지 이른 신애는 다시 삶으로 돌아선다. 신애의 자살이 실패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애 자신에 의해서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주권을 선언하고 독립을 주장했으나 결국 그녀는 도움을 구하고 말았다. “도와줘요.” 신애의 구조요청은 결국 하나님을 향해 내뻗는 손짓이었다. 그녀는 반항하지만 여전히 하나님 곁을 맴돈다. 그녀는 저항하지만 하나님을 완전히 떠날 수 없었다. 물론 삶을 선택했다는 것이 그녀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말은 아니다. 그녀는 다만 하나님을 아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병원 치료를 마친 신애는 새 출발을 결심한다. 머리부터 하고 싶어 하는 것에서 우리는 신애의 새 출발에 대한 각오가 상당함을 알 수 있다. 뭘 새롭게 출발하겠다는 말인가? 남편의 죽음을 계기로 새롭게 출발하고 싶어 밀양으로 내려왔던 신애는 준이의 죽음을 결산하며 또 한 번 인생의 새 출발을 결심한다. 어쩌면 자신의 스타일도 아닌 김종찬을 반려자로 선택함으로써 시작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모르긴 해도 그녀가 새 출발을 하면서 잊고 싶었던 것에는 남편과 준이의 죽음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구원 체험과 교회 생활의 기억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그녀는 애초의 무신론자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을른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가 머리하러 들어간 미용실에는 사형수의 딸이 근무하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인연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해서 참으로 지독한 신의 섭리다. 벗어 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그래서 그녀는 소리친다. “왜 오늘 같은 날, 왜 하필 이 집이어야 했느냐?” 그의 분노는 종찬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벗어날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에 그녀의 새 출발의 각오는 또 다시 좌절된다.
그녀의 머리를 사형수의 딸이 만지작거릴 때 신애는 하나님을 향한 분노로 몸서리친다. 새 출발을 하고 싶어서 미장원엘 들렀는데, 과거의 기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머리카락을 잘라버림으로써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는데 바로 그 머리카락을 사형수의 딸이 자르고 있다. 참으로 지독한 아이러니다. 이것은 신애에게만이 아니라 사형수의 딸에게도 지독한 고문이었다. 결국 신애는 도저히 그 순간을 참아낼 수 없어 미장원을 뛰쳐나온다. 영낙없이 미친 여자다. 반만 잘라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도망한다. 그리고 그 집 마당에 앉아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자른다. 하나님 없는 곳에서 다른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스스로 잘라내는 신애는 아직도 반항 중이다. 그녀는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으며, 여전히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다. 신애의 이러한 반항은 앞으로도 신애가 쉽게 하나님께 돌아가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앞으로도 신애는 계속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저항할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신애가 하나님께 돌아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신애가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있을 때 종찬이 들어와 거울을 들어준다. 신애가 잘라낸 머리카락은 땅바닥에 떨어져 바람에 밀려 마당 귀퉁이에 쌓인다. 그 마당 귀퉁이에는 락스병처럼 보이는 큼지막한 플라스틱 병도 모이고 시궁창 물인지 아니면 그냥 빗물인지 모를 물이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다. 그냥 누구네 집이든 다 있을 법한 지저분한 마당 한 귀퉁이를 비추는 카메라.. 그리고 음악이 들려온다. 아마도 그 음악은 신애가 밀양으로 내려오던 때의 그 음악인듯 싶다. 마당 귀퉁이를 한참 보여주던 화면은 어느 순간 암전된다. 쓰레기 말고 무엇이 있었던가? 물이랑, 신애의 머리카락 말고 무엇이 있었던가? 햇볕이 있었다. 비밀의 햇볕.., 그렇다. 밀양이다. 밀양은 하나님의 임재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햇볕으로 가득 차 있다. 준이의 죽음 이후 그 햇볓은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신애가 약국으로 흘러들어오는 햇볕에 손을 내 밀며, “여기에 뭐가 있어요? 이건 그냥 햇볓이에요. 아무 것도 없어요.”라며 도발적으로 대들 때 햇볕은 하나님의 숨은 임재라는 사실을 영화는 드러냈다. 햇볕은 항상 신애네 집 마당에 한 가득히 들어와 있었고, 종종 거실까지 뻗쳐 들어와 있었다. 바로 그 햇볓이 신애가 제 손으로 머리를 깎고 있는 순간, 그 마당 귀퉁이에 슬며시 들어와 있었다. 신애의 잘려진 머리카락이 도망을 가 보지만 그러나 결국 머리카락은 밀양을 피하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가 결코 신애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예언적 약속을 보게 된다. 신애는 계속 하나님을 피해 보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신애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낮고 낮은 곳, 쓰라린 상처로 몸부림치는 신애를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 할 것이며, 그녀가 피해보려 하고, 저항하며, 반항하려 하지만, 결국 그녀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5. 거울 앞에서
거울이란 무엇인가? 왜 신애는 거울 앞에 서는가? 우리는 종찬이 들어준 거울을 통해 신애의 얼굴을 본다. 신애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우리도 거울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본다. 이것은 신애가 자기 자신과 대면함을 상징한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실존을 대면하는 것이다. 실존이란 자신의 가장 정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그녀가 밀양으로 이사온 것도 사실은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숨어든 것이다. 자신을 모르는 곳이라면 쉽게 가면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밀양은 손쉽게 자신이 아닐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곳이다. 그녀는 밀양에서 돈이 많은 척 했다. 땅 투기에도 관심이 있고 좋은 땅 나오면 집도 짓고 살 것이라고 했다. 없는 데 있는 척, 가난한 데 부자인 척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준이의 유괴와 피살도 신애의 허영 때문이었다.
종찬이도 허영이 가득한 사람이다. 간간히 걸려오는 종찬 어머니와의 통화 내용을 보면 종찬은 식구들에게서 멸시받는 천덕꾸러기다. 그런 종찬에게 신애는 자신의 본 모습을 모르는 사람으로 종찬에게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종찬은 신애 앞에서 가면을 쓴다. 신애 피아노 학원에다 유명 콩쿨 대회 상장을 걸어주는 종찬은 가면이 처세의 기본임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부동산 사장을 꽉 잡고 있는 사람으로, 시의원과도 관계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떠벌인다. 그의 이러한 떠벌임은 신애보다 수준이 낮다. 종찬의 가면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질낮은 가면이다. 마치 덜 받은 화장처럼 종찬의 허영은 역겹다. 그래서 신애는 종찬을 ‘속물’이라고 부른다. 신애의 동생도 종찬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종찬이가 자기 누나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는 것조차 싫어한다. 그러나 종찬만 가면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영화,<밀양>은 특별히 교회의 가면에 주목한다. 이 영화는 다른 영화와는 다르게 교회와 기독교인의 위선을 유치한 식으로 비아양거리지 않는다. 이 영화는 일부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의 윤리적 치부를 드러내거나 통성기도의 광란을 혐오스럽게 비추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교회의 가면을 폭로하는 방식은 훨씬 더 진지하고, 훨씬 더 신학적이고, 훨씬 더 실제적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가면이란 무엇인가? 신애의 유혹 앞에 쩔쩔매는 장로나, 산속 부흥회 강사의 거룩한 척하는 집회 인도 장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교회의 가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신애가 살인범을 면회하고 난 뒤 분노할 때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에서다. 교회는 신애의 분노와 저항을 ‘이해’조차 못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관객은 신애의 분노를 이해한다. 그러나 왜 교회는 이해하지 못할까? 그것은 교회가 신애의 고통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는 어느 정도는 신애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함께 기도하였고 위로하였으며 축복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살인범이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아멘..”하며 외치는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신애의 고통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교회는 말로는 가난한 자, 고통 받는 자, 불행한 자들과 함께 한다고 하면서도 전혀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있다. 교회의 고통에의 동참은 참을 수 없이 가볍다.
그러나 교회의 외식은 훨씬 더 깊다. 교회는 신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말하는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용서를 말하지만 그러나 그 용서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용서는 폭력이다. 용서의 복음이 범죄자에게는 은혜의 복음이겠지만 피해자에게는 폭력이다. 만일 영화 속의 교인들이 자신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용서가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면 그들은 신애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9시에 온 포도원 일꾼으로서의 신애는 오후 5시에 온 일꾼인 살인범에게 자신과 똑같은 은혜를 베푸는 주인에게 분노하고 있다. 이 분노가 설령 하나님 앞에서는 부당하다 할지라도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충분히 정당하다. 주인의 기준은 일관성 없으며,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 은혜의 본질이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신애처럼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교인들은 항상 자신을 오후 5시에 온 일꾼이라고 간단히 생각한단 말인가? 누군들 신애처럼 피해당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누군들 신애처럼 오전 9시에 온 일꾼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신애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는 실상 하나님의 은혜에 무지한 교회다. 약국 이름도 은혜고, 성당이름도 은혜였다. 은혜라는 말이 범람하지만 그러나 교인들은 은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신애는 교인들보다 더욱 은혜에 가깝다.
물론 가면은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친구들 앞에 자신의 정력을 자랑하는 종찬의 친구도, 값싼 눈물로 손자의 사랑을 과시하는 준이의 할머니도 모두 가면을 쓴다. 살인범이 밀양에 학원을 차릴 때 그는 자신을 대단한 사업가로 떠벌였다. 모르긴 해도 살인범은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범죄를 감행했음이 틀림없다. 가면은 범죄의 원인이다. 모두가 가면을 썼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교회의 가면은 더욱 역겹다. 왜냐하면 교회는 스스로를 모든 가면을 벗은 자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가르침이 그러한 가면을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사한 예배당, 소그룹의 따뜻한 분위기, 역전 노방 전도, 엄숙한 분위기를 내는 교회 지도자들과 거룩한 느낌의 집회들.. 이 모든 것들은 다 가면이지 실제가 아니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고통은 가면을 벗겨낸다. 신애가 은행에서 돈을 찾아서 나올 때 그녀의 돈 가방에는 종이돈 뭉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왜 그녀는 종이돈을 쇼핑백에 넣었을까? 유괴범이 많은 돈을 요구했기 때문에 많은 돈처럼 보이기 위해서였을까? 하지만 그 가방은 유괴범에게 전달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유괴범이 가방을 열어보고 가짜 종이돈 뭉치를 발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종이돈을 보고 유괴범은 얼마나 분노할 것인가? 그런데도 왜 그녀는 그런 위험한 일을 감행했을까? 추측컨대 그녀는 겨우 800만원 남짓한 단촐한 종이가방을 유괴범에게 내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에게 겨우 그 돈 밖에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아들이 유괴당해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에서도 신애는 자신의 가난을 숨기고 싶은 허영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질기고도 무서운 가면의 힘이다. 그런데 그녀가 종이돈 위에다 현금뭉치를 쌓아놓는 순간 유괴범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전화를 받고 난 뒤 신애는 쇼핑백 안의 종이돈 뭉치를 쏟아버린다. 모르긴 해도 순간 신애는 유괴범이 종이돈을 보고 분노하여 준이의 신상에 무슨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찾아들었을 것이다. 고통이 절실해지자 그녀는 자신의 허영심을 비워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애의 가면은 구원 체험이 있은 뒤에도 계속된다. 확실히 그녀에게 놀라운 체험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애는 자신에게 일어난 그 체험이 진짜 신앙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린다. 그녀는 자신이 진짜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노라고 간증한다. 그러면서 신애는 종찬의 신앙이 가짜라고 타박한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이 진실한지를 증명하라고 몰아세운다. 여기서 신애는 자신은 진짜고 종찬은 가짜라는 위선적인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신애가 사형수를 용서하겠다는 것도 실상은 위선이다. 그녀는 사형수의 딸이 얻어맞고 있는 상황조차 지나치지 않았는가? 사형수를 용서하기 위해서 꼭 면회까지 가야 하느냐고 걱정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직접 살인범에게 자신의 용서를 전해야 한다며 성자처럼 말한다. 이에 종찬이 한 마디 내뱉는다. “신애씨가 무슨 성자도 아니고..” 이 말이 신애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왜요? 나는 그러면 안 되나뇨?” 신애의 면회와 용서가 완전히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는 가면이 드러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살인범이 신애에게 자신의 사죄체험을 말할 때 그녀는 더 이상 성자연(聖者然)하는 가면을 쓰고 있을 수 없었다. 살인범은 두 번째로 신애의 가면을 벗겨낸다. 신애가 하나님께 분노하는 것은 가면이 발가벗겨진 것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누구나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은 무참히도 자신의 가면을 발가벗긴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하나님께 반항하는 모습조차 또 다른 형태의 가면이라는 것이다. 신애는 하나님께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 또 다른 가면을 쓰기로 작정한다. 그녀는 스스로 도둑이 되기로 작심하고, 또 간부가 되기로 작심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참 모습이 아니다. 다만 그녀는 하나님을 화나게 할 목적으로 그런 가면을 쓰는 것이다. 거룩한 척하던 신애는 이제 악한척한다. 한쪽 극단을 달리던 신애는 이번에는 반대편 극단으로 치닫는다. 참으로 끈질긴 가면의 힘이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 장면에서 거울을 본다. 그녀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제 그녀는 가면을 벗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토록 대면하기 싫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자신의 실존과 마주하겠다는 말이다. 이는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겠다는 결연한 의지요, 더 이상 허영과 외식, 가면을 쓰지 않겠다는 초탈이다. 비록 그 모습이 비참하고 부끄럽고 초라할지라도 외면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결심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이다. 비로소 그녀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녀의 곁에 밀양이 비밀스럽게 비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