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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과 의 그리고 거룩

Lewis Noh 2018. 2. 10. 20:43

영광과 의 그리고 거룩 


노승수 목사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그 무게와 그 행하심과 성품, 존재의 빛남이 드러나는 것을 일컫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혹은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함으로 그것을 하나님이 영광으로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기에 우리가 그에게 영광을 드린다 혹은 돌린다가 우리에게 없는 그분의 그분되심을 우리 삶에 나타나게 하는 것임으로 엄밀히 말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라는 표현은 주님의 구원의 큰 일 및 그의 성품과 존재가 드러나는 사건이지 우리가 임의로 행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3:26에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3장의 문맥을 살피면, 그의 영광을 따라 행하심을 곧 의로우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적 선의 기준,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을 판단해서 옳다 말해줄 수 있는 외적 기준이 없으신 자존자이심으로 그의 행하심 자체가 의이며 선입니다. 즉, 그 영광을 따라 행하심을 의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은 그 의를 따라 
행하시며, 그의 자녀들 역시 그 의를 따라 행하기를 요구하시며 기대하십니다. 롬 3:21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고 말하는데 이는 율법이 바로 하나님의 의의 기준임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에 속한 의는 지키면 의롭고 지키지 못하면 불의한 자요, 범법자며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율법 자체로는 선한 것이지만 우리의 부패를 인하여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는 죄인으로 정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 정죄는 신자에게 복음의 일부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정죄 받음은 이미 그가 유효적 부르심에 들어섰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패와 죄의 심판의 엄중함, 진노의 두려움은 신자를 절망으로 이끌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이끕니다. 그래서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롬 3:21에 나타나 있는대로 이제 율법 외에 한 의 곧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행하심이 하나 드러났으니 바로 그리스도가 불의와 불법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화목제물로 드려짐으로 드러난 의입니다. 
요한복음에 드러난 대로 예수께서 얻으실 영광의 때와 하나님께 드릴 영광의 때는 바로 십자가의 때입니다(요 12:23). 특별히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러 나간 후에 주님께서 이르시길, "이제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다."(요 13:31)고 하심으로 십자가에 죄로 인해 팔려 죽으심이 영광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영광하면 마치 대중 가수가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찬사를 받고 조명이 집중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이런 상식적 통념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너무나 생경하고 이질적인 영광의 장면입니다. 십자가는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정점입니다. 십자가만큼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구속에 대한 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 십자가의 길이었듯이 주님의 제자인 우리 역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은 우리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죄를 죽이는 일을 통해서 신자의 삶에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율법으로선 하나님의 영광과 의에 도무지 이를 수 없던 우리가 이제 율법 외 나타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광과 의를 통해서 의로운 자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의의 행동인 십자가는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합니다. 신자됨은 믿음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이 믿음은 조나단 에즈워즈가 말한 것처럼, 거룩한 감정 곧 죄를 싫어하고 혐오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것에 대체로 참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죄와의 영적 전투가 시작됩니다. 때론 실패도 하지만 죄를 이기려는 영적 싸움이 곧 그에게 참된 믿음이 있음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종국에는 순종이란 행위의 열매를 거둡니다. 이것을 성경은 거룩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그 
믿음이 유효하게 작용하여서 우리가 거룩해짐 곧 성화의 과정 가운데 듦을 보여주는 것이고 우리의 믿음이 참됨은 바로 이 순간 판가름이 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벧전 1:14-17, 개역)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 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 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그러므로 십자가가 드러내는 하나님의 여러 성품과 그의 구원 계획, 그리고 십자가가 드러내는 우리의 죄의 심각성과 그 심판의 엄중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지속적이며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과 자비 앞에-하나님의 영광 앞에- 회개하고 죄로부터 하나님 향해 돌아서는 것이 신자가 날마다 해야할 일인 것입니다. 회개는 십자가 앞에 선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그 영광을 맛본 자는 이제 죄를 혐오하고 싫어하며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사모하고 바라며 즐기게 됩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슬픔이요 하나님의 거룩에 반하여 범죄 한 것에 대한 고통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어떤 범죄를 새로 짓게 됨으로 혹은 전에 하지 않던 어떤 일을 행함으로 우리의 주관적 양심에 꺼리낌과 개인적인 죄에 대한 기준 때문에 행하는 하는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에 한없이 모자라고 부족한 자신을 바라보면서 갖는 슬픔으로 말미암는 회개입니다. 이 지속적이며 점진적인 회개와 더불어 죄와의 영적 전투를 통해 영적 출생자는 점점 어린아이로 더 장성한 자로 자라가며 마침내 율법에 순종하는 의의 열매는 맺는 장성한 분량의 신자로 자라가게 됩니다. 죄를 
습관적으로 짓는 자들 그리고 회개가 필요 없다 주장하는 구원파나 지방교회의 주장들, 그리고 기타 회개의 기도를 게을리 하도록 만드는 어떤 종류의 미묘한 신학적 차이들은 우리가 죄에 둔감하게 만들고 반복적으로 죄를 짓게 만들며,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어 우리의 심령이 상하고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훼손되고 영적인 무력감과 무기력 그리고 우울증을 불러 오게 됩니다. 이런 신자들의 특징은 신앙 생활에 기도가 전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나기 같은 죄는 쉽게 피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서도 말하듯이 가랑비에 속옷 젓는 줄 모른다고 했듯이 사소하며 반복적으로 짓는 죄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 그리고 그의 의에 대해 얼마나 둔감한 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니다. 이런 신앙 생활을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마 13장의 천국 비유가 보여주듯이 그렇게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은 결코 구원이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이유입니다. 교의신학에서 믿음과 회개가 함께 설명되는 이유이기도 하며, 신자의 믿음과 회개는 결코 우리가 신앙에 입문하는 평생에 한 번만 들어오는 출입문이 아니라 일생을 반복하며 나아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을 항해하는 나룻배의 삿대이며 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