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와 무천년설
보통 성령께서 노아 홍수를 기점으로 땅의 백성들을 떠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창 6:3). 창세기의 이 범죄는 단지 혼사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 질서의 혼돈의 문제였습니다. 혼돈의 상징처럼 묘사되는 고대의 압수처럼 태도의 혼돈과 공허로 되돌리는 홍수 심판이 이런 지점을 방증해주기도 합니다. 저명한 오경학자 고든 웬함은 이 범죄가 천사와 인간의 혼인관계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성경에 이런 흔적은 꽤 있는데 바울이 천사를 인해서 여자의 머리에 수건을 쓰게 하도록 하는 것이라든지 유다서가 인용한 에녹서의 인용이 이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방주와 홍수는 구원 사건의 대표적인 모티프로 성경에서 반복되게 됩니다. 창조질서의 혼란은 언어의 혼란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언어의 혼란이란 달리 말하자면, 통치 질서의 혼란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동물들을 이름짓는 것은 개똥이 말숙이로 부르기 좋게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설계의 반영이자 창조 원리를 이해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군대 귀신에게 그 이름을 물어보심 역시 지배권에 대한 표시입니다. 그런데 그 언어의 혼란이 온 것입니다. 그들이 시도한 바벨탑이 바로 권력의 상징이며 지배력의 상징이기도 했죠.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통한 다스림이 아니라 인간의 부패와 악함이 다스림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혼돈을 혼돈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은 홍수에서도 언어의 혼잡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렇게 성령은 땅의 백성의 곁을 떠나십니다. 부패와 죄악으로 인해서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이것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닌 질서의 하나님이신 성령의 자연스런 선택이셨습니다.
이것이 다시 회복되는 사건이 바로 오순절입니다. 이를 "성령의 역사적인 오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속과 순종을 통해서 이 질서를 회복하셨기 때문입니다. 방주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구속 모티프의 대표적 예입니다. 이 방주는 모세에게 이르러 갈대 상자로 묘사되었으며 바로의 압제 중에서 물에서 건저낸 구원의 표상으로 제시됩니다. 이는 다시 마태복음에 오면 바로와 같이 영아 살해를 하는 헤롯과 구유에 누우신 예수는 새로운 모세로 그가 구원의 방주임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태초에 성령께서 고대적 압수와 같은 혼돈의 물에서부터 질서를 부여하시는 방식으로 창조를 이루신 것처럼 물과 성령으로 베풀어지는 세례는 새로운 창조이자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이 세계 전체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요한이 계시록에서 말하는 첫째 부활입니다. 성령의 내주가 그런 것이죠. 이 상징은 창세기에 나타나 있는데 홍수 이전의 사람들의 계보가 나타나 있는 창세기 5장의 아담의 계보를 보면 모두 천 년이 차기 전에 죽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직 성령이 그들을 떠나시기 전에 창조의 질서 가운데 있었던 고대 인류들이었죠.
우리가 사도 신경에서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고 고백할 때, 이는 장래적인 사건으로서 다시 말해서 인자가 다시 오실 때의 사건으로서 부활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부활이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었음을 믿는 것을 의미하죠.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 사실을 잘 설명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물리적이며 육체적인 사망이 우리에게 있기 전에도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죽은 자인 것처럼 물리적인 몸의 부활이 있기 전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바로 부활을 이미 얻은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은 우리 부활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 아니라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우리를 그리스도와 묶어주시는 영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신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