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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F와 전택과 후택 교리의 이해

Lewis Noh 2023. 1. 8. 04:36
1. 전택설과 후택설...
뭐 어렵고 현학적인 이야기인가 싶을 수도 있다. 최대한 쉽게, 학문적 엄밀성을 좀 양보하고 성도들이 알아 먹기 좋게 진술하려고 한다. 특히 WCF에 이것이 어떤 식으로 기술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사실 이건 큰 밑 그림이 있지만 이는 차후에 밝히기로 하고 어쨌든,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임은 틀림이 없다.
2. 이런 논의는 왜 출발했을까?
3. 알미니안들이 작정의 순서와 시간적 순서를 뒤섞는 데서 출발했다.
4. 이를테면, 하나님이 이미 구원받을 자를 다 정해놨다면 우리가 믿는 게 무슨 소용이냐 특히 이중예정 택자와 불택자를 이미 구분하고 그것이 정해졌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의로운 분 맞냐? 뭐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5. 여기에 주요한 혼동 중 하나는 작정을 시간의 맨 앞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시간적 존재라서 그런 이해가 자연스럽지만 작정은 시간과 무관한 "초월"의 영역이고 그것의 시행은 섭리, 곧 시간 안에서 이뤄지는 시간의 영역이다. 초월의 영역을 이해하는 데 좋은 예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이 블랙홀에 빠져 자기가 집을 더나기 전 딸의 방에 메시지를 남기는 장면이다. 블랙홀을 모든 시간대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도 이러하거든 초월자는 하물며...
6. WCF.5.2.에서 섭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제1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에 따라 모든 일들이 변동 없이 이루어져 간다. 그러나 그것들의 되어 가는 방편은 제2원인의 성질에 따라 필연적인 것, 임의적인 것, 혹은 우연적인 것으로 구성된다. 그렇게 되어가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다.
7. 제1원인과 제2원인이 동시발생하는 교리를 설명한 것이다. divine concurrence라고 한다. 그 동시발생은 때로는 필연적으로 때론 임의적으로 때론 우연적으로 발생한다. 아합이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죽거나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다다른 것처럼 우연도 다 작정 안에 있으나 그것이 우리 경험칙에서 우리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다.
8. 죄를 지을 작정도 동시발생한다. 여기서 죄인은 자신의 임의로 행하며 초월과 시간이 동시적으로 만나며 죄의 가까운 원인은 죄인 자신이며 그 먼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이미 경험하는 바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이 강제하신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욕심에 끌려 죄를 지은 것이다.
9. 작정은 마니교도들이 말하는 결정론이 아니다. 작정과 우리 자유의지는 양립한다. 그것이 어거스틴의 공리이다. 하나님은 초월에서 작용하시고 사람은 시간 안에서 작용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시며 자비롭게 돌아오는 자들을 기다리신다.
10. 그럼 본격적으로 전택과 후택은 왜 발생했을까?
11. 작정의 순서에 있어서,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시간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의 순서며 이것은 당연히 시간밖의 초월의 영역에 위치해 있다.
12. 전택이란 이런 것이다. 기준점은 "타락"이며 타락의 작정을 하기 전에 택자를 선택하는 작정을 먼저 하셨다는 것이다. 비유로 들자면, 이런 개념인데 화가가 인물화를 그릴 때, 여러 세세한 디테일이 있어도 최종적 인물의 초상이 먼저 머리 속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 집을 설계하는 설계자도 그가 완전한 지성의 소유자라면 최종 그림이 먼저 있고 그것이 목적이므로 그 목적을 기준으로해서 다른 것을 배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택자가 최종적 목저이니 당연히 택자가 가장 먼저 배치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13. 그런데 이 설명은 알미니안과 일반 대중에게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설명을 덧붙여도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준다기 보다 이미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보이는 것이다.
14. 그게 촉발한 것이 도르트 총회의 "항론"이자 "항론파"들의 주장의 핵심이다.
15. 그런 점에서 도르트 신조는 이 항론에 대한 답변이며 그 후에 작성된 WCF도 이 논리와 논의에서 연속선상에 있다.
16. 그럼 후택이란 무엇인가? 작정의 순서에 있어서 창조와 타락의 작정이 있고 그 다음에 선택의 작정이 위치하는 구조를 하고 있다.
17. 이 설명의 장점은 무엇일까? 구조적으로는 이렇다. 타락이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부르신다. 모든 이를 부르신다. 근데 어떤 이도 제대로 대답하는 이가 없다. 그게 타락이다. "전적 타락"의 의미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여기에서 택자도 마찬가지다.
18. 이를 잘 보여주는 비유가 혼인잔치 비유도 그 백성을 초청했음에도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강권하여 혼인 잔치를 채우는데, 거기에는 예복을 갖추지 않은 자가 있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주님의 말씀 "청함을 입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가 이 문맥에서 등장한다.
19. 이 설명은 하나님의 불공정하거나 부당하게 묘사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비와 긍휼을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20. 전택과 후택의 장단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이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는가가 더 중요한 논점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21. 그러면 성경은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까? 바울의 로마서를 보면, 후택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18-3:19까지, 설명하고자 하는 바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죄 아래 갇혔다는 것이다.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다도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22. 그리고 9장에 가서야 택정함의 논리가 등장한다. 심지어 한 배에서 난 야곱과 에서도 갈린다. 하나님의 택함은 혈통이 그 근거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여기서 문제점은 그러면 그동안 이스라엘은 뭐냐? 씹다 버린 껌이냐? 뭐 이런 당황한 지점이 생기게 된다.
23. 그래서 로마서의 서두에 먼저와 나중이 나오는 것이다. 마태복음 19-20장의 논의도 같은 논의인데 먼저된 유대인이 나중되고 나중된 이방인이 먼저되는 경륜의 구도를 설명한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가 대표적 표현인데, 여기서 헬라인은 혈통적 헬라인이 아니라 이방인의 대표라 할 수 있다.
24. 그러면 이제 WCF가 어떤 전택과 후택의 어떤 논리로 복음을 설명하는지를 살펴볼 차례다. 사실 그 전에 정말 이 논의가 WCF에 들었는지도 생각해봐야 하는데, 문제는 이게 위에 설명된 신학적 얼개가 없이는 안 보이느다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다.
25. 우선 구조적으로 전체 목차에서 이 부분을 보여줄 만한 부분을 살펴보자.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제4장 창조
제5장 섭리
제6장 인간의 타락, 범죄, 그리고 그에 대한 형벌
제7장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제8장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제9장 자유의지
제10장 효력있는 부르심
타락 후에 언약, 중보자가 나오고 자유의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 다음에 효력있는 부르심이 위치해 있다. 이 배열은 "후택설"을 고려한 배열이다.
26. 작정의 순서는 그 시행인 창조와 섭리에 의해서 어느 정도 그 윤곽이 드러난다. 이는 당연한데 "설계"는 "시공"에 의해서 그 실물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위에 보이는 WCF의 진술의 순서를 주목해서 보면, 타락이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을 주신다. 그 다음 "자유의지"의 진술이 있고 다음에 "효과적인 부르심"이 위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순서는 후택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위애 설명한 부분을 주의 깊게 읽었다면 이 부분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27. 언약을 주고 자유의지를 허락했는데, 제대로 안 된 것이다. 그 다음에 위치하는 것이 효과적인 부르심이라는 점에서 WCF는 후택의 관점에서 설명된 것이다.
28.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한데, 우리가 "전적 타락"과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는 교리와 말씀을 얼마나 단면적으로 흑백논리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미 포스트를 통해서 전적 부패가 "심도가 아니라 범위"의 문제라는 점을 밝힌 바 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를 일반적인 자연인이 아무런 종교적 반응을 할 수 없다고 읽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다.
29. 그러면 각론으로 들어가서 WCF의 본문을 살펴보자.
30. WCF.9.3. 자유의지 편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사람이 타락한 후에는 구원에 이르는 영적인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의지력을 완전히 상실 당했다. 그러므로 중생하지 못한 상태의 그 자손들은 영적인 선을 전적으로 싫어하여 죄로 인해 죽은 자가 되었으며,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회개하거나 회개를 위한 준비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구절을 읽으면 WCF는 회개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읽힌다. 물론, 진술한 바대로며, 전제는 "자신의 능력으로는"이다. 자력으로 불가능하다는 진술이며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1. 그러나 이 고백서를 우리가 단면적으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가 다음의 WCF.10.4. 효력있는 부르심을 설명하는 데서 나온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비록 말씀선포에 의해 형식적인 부름을 받아 성령의 어떤 일반적인 역사를 체험한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자들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설령 그들이 일반 계시로 인한 지혜와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적인 계율에 따라 열성을 다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런 자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단언하며 주장하는 것은 매우 해로우며 가증한 일이다.
32. 이 진술의 배후에 있는 개념이 장로교회의 핵심 가르침 중 하나며 박윤선 박사의 가르침에도 녹아 있는 "말씀과 함께(cum verbo)"이다. 얼핏 말씀으로 다 한다로 읽히지만 사실 이 말은 그 반대다. 루터파는 거듭남을 말씀을 통해서만(per Verbum)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에 비해 칼뱅과 장로교회는 주권자가 성령이시며 그가 역사하실 때, 말씀과 함께 통상적으로 일하시지만 주권적 역사에 따라 얼마든지 말씀 외로도 역사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는다. 본질적 부름이 주권자인 성령에 의한 부름이라는 점이 강조된 것이다.
33. WCF.10.4.을 보면, 말씀선포 곧 설교에 의해서 일반적 은혜로 부름을 받는 자들이 있고 은혜를 경험하기도 한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의 돌짝밭과 가시밭처럼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뿌리를 내리기도 한다. 문제는 진정으로 그리스도께로 나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안 부르신 게 아니라 부르셨는데 "우리 부패"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가지 않는 것이다. 진술 된 것처럼 그들은 일반 계시와 종교적 계명에 열성을 보일 수도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영적 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말씀에 의해서 수없이 부름을 받는데 거기에 응답지 않는다. 사실 택자의 형편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성령이 우리를 효력있게 부르시지 않는다면 말이다.
34. WCF.19.4.에서 율법을 진술하면서 율법이 불신자들에게 미치는 효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율법은 참된 성도들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그 이유는 이 법은 삶의 법칙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의무를 알려주며 그에 따라 그들을 지도하고 강제하며 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그들의 본성과 마음 및 삶이 죄악으로 오염되었음을 발견케 하며 그로 인해 율법에 의하여 자신을 점검케 하여 더욱 죄를 깨닫고, 죄로 인하여 겸손하게 되며 죄에 대하여 증오하게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그의 완전한 순종이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35. WCF.19.4.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겸손하게 되고 죄를 증오하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 율법과 말씀만으로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36. WCF.9.3과 WCF.19.4.을 종합해보면, 우리가 자력으로 회개를 준비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 은혜 안에서 말씀과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준비의 역할을 한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37. 타락이 있고 언약이 있고 다음 자유의지가 있다. 이 구조는 이미 25번에서 살폈다. 여기서 언약의 구체적 내용이 율법이며 말씀이다. 이는 모든 사람을 부른다. 이를 흔히 "일반적인 부르심"이라고 한다.
38. 그런데 이 부르심에 자력으로 순종함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게 WCF.9.3.의 진술이다.
39. 이 진술의 의미는 로마서에 표현된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없고 선을 행하는 사람도 없다"는 의미다.
40. 그렇게 다 불렀는데, 택자나 불택자나 의롭거나 선을 행하거나 스스로 구원의 도리로 나오거나 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41. 그래서 WCF.10.의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택자들을 부르셨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는 이미 설명한 대로 혼인잔치 비유다. 다 부르셨다. 아무도 응답지 않기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순전히 하나님께 이유를 둔 방식으로 택자들을 부르셨다.
42. 택자를 먼저 정해놨다고 항론한 항론파의 항의에 대해서 도르트 총회와 도르트 신조 및 WCF는 이렇게 답했다.
43. 그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아서 다 멸망시켜야 그게 하나님의 공의이며 자비이냐? 반대로 아무도불러도 안 오는데 다 구원한다면 그게 무슨 공의야 당연히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중 예정, 곧 택자와 블택자를 정하심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보내어 그중 몇이라도 당신의 긍휼하심과 자비를 따라 구원하시는 것이 공의이며 자비가 아니냐?
45. 이것이 로마서 3장의 다음 본문의 논리다.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Rom 3:3-6 NKR)
46. 로마서 3:25에서 자기 의로움을 의런 방식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_의로우심을_나타내려_하심이니 (Rom 3:25 NKR)
47. 성경도, 도르트 신조도, WCF도 "후택"의 논리에 의해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48. 전택설을 지지했던 주요한 학자들은 칼뱅, 베자, 고마루스, 페스투스, 홈미우스, 트리글란드, Hieron,Vogelius, Casp,Sibeliu 등이다.
49. 후택설을 지지했던 주요 학자들은, 불링거, Polyander,Walaeus, Thysius, Lubbertus와 도르트 총회의 영국 대표자들, 하이델베르그 대표자들, 제네바, 브레멘, 엠덴, 벨직, 북부 홀란드, 젤란드, 우트레이트, 프리스란드, 흐로링겐에서 온 대표자들이다.
50. 후택설은 핵심은 예정의 대상을 타락한 인간으로 제시하였다는데 있다.
51. 그러나 후택도 약점이 있다. 전택주의자들에게는 몇 가지 점에서 위험하게 보인다.
첫째, 죄의 허용적 작정이라는 문제가 난제로 남는다. "죄의 조성자"라는 문제뿐만 아니라 타락을 하나님께서 막지 못한 게 아니냐는 알미니안적 사고가 개입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미 섭리의 동시발생교리에서 설명했듯이, 이는 과한 걱정이다. 허용적 작정이며 전택설과 이점에서 일치한다.
둘째, 유기가 하나님의 공의로 설명되야 하는데 암시적이지만 이중 예정의 유기가 하나님의 선하신 기뻐하심의 행위라는 점을 부인하려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도 과한 걱정이다. 위 설명 어디에도 그런 것은 없다. 타락 후 택자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택하셨다면, 유기된 자들에게도 같은 방식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는 게 맞다.
52. 웨슬리는 이중예정은 성경에서 나온 해석이 아니라 권위를 수호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교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기록했다. 오히려 항론파나 일반의 반항과 반론에 맞춰서 후퇴한 설명을 오늘날 하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은 듯 싶다. 4포인트나 가정적 제한 속죄 등은 이런 지점을 잘 보여준다.
53. 그런 점에서 다수의 학자들이 WCF가 전택설을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구조적으로 그리고 진술상 WCF는 도르트와 같은 방식으로 후택을 지지한다고 본다.
54. 그리고 이것이 성경의 진술과도 일치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이중예정의 기뻐하심을 가장 잘 설명한다.
55. 개인적 의견이며 쉽게 설명한다고 했지만 어려운 부분이 계속 눈에 띤다. 추후 어설픈 부분은 좀더 다듬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