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언제나 선택이다.
원어의 한 단어를 옮길 때, 번역자는 그 단어가 가진 여러 의미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
그 선택이 독자에게는 전부가 된다.
그러나 때로, 번역자의 선택이 원문 저자의 의도를 살짝 가려버리는 일이 생긴다.
누가복음 12장에서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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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프쉬케(ψυχή)는 번역하기 까다로운 단어다.
이 단어는 본래 '숨', '호흡'을 뜻했고, 거기서 '생명', '목숨'의 의미로 확장되었다.
더 나아가 '영혼', '자아', 심지어 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자신'의 의미로도 쓰였다.
영어 번역들도 이 단어 앞에서 갈린다.
어떤 구절에서는 soul로, 어떤 구절에서는 life로, 또 어떤 곳에서는 self로 옮긴다.
한국어 성경도 마찬가지다.
'영혼'이 되기도 하고, '목숨'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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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같은 본문 안에서 같은 단어를 다르게 옮길 때 생긴다.
누가복음 12장 19절과 20절에서 개역개정은 프쉬케를 '영혼'으로 번역한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런데 22절과 23절에 오면 번역어가 바뀐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헬라어 원문에서는 네 곳 모두 동일하게 프쉬케(ψυχή)다.
번역은 달라졌지만, 누가는 같은 단어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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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알면, 본문이 다르게 읽히기 시작한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다시 보자.
그 사람은 풍성한 소출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프쉬케에게 이르되, 프쉬케야,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그는 자신의 프쉬케를 향해 말을 건넨다.
마치 자신 안에 깊이 간직된 그 무언가에게, 진정한 자아에게 속삭이듯.
그러나 하나님은 그날 밤 그의 프쉬케를 도로 찾으신다고 하신다.
그리고 곧바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프쉬케를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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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단어가 세 번 울린다.
부자가 프쉬케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그 프쉬케를 가져가셨다.
예수님이 프쉬케를 염려하지 말라 하신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같은 단어를 반복하며 하나의 논리를 엮어낸다.
프쉬케가 주제어다.
비유는 그 주제에 대한 극적인 예화이고, 뒤따르는 가르침은 그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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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결이 살아있을 때, 본문의 논리가 더욱 선명해진다.
부자는 자신의 프쉬케를 만족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의 프쉬케는 결국 그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 직후에 말씀하신다.
"바로 그 프쉬케를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
프쉬케의 진정한 필요는 창고에 쌓인 곡식이 채울 수 없다.
프쉬케는 음식보다 크고, 의복보다 귀하다.
그 프쉬케를 아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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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어가 갈리는 순간, 이 연결은 보이지 않게 된다.
19절과 20절의 '영혼'과 22절과 23절의 '목숨'은 독자에게 서로 다른 주제처럼 느껴진다.
비유와 교훈이 하나의 단어로 꿰어진 실임을 알아채기 어렵다.
번역자의 선택은 문맥마다 자연스러웠을지 모르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원문의 수사적 설계를 지워버렸다.
⠀
원문을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반드시 헬라어 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번역 성경을 손에서 놓으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번역이란 본래 해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번역자는 언제나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이면에는, 번역으로 옮겨지지 않은 원문의 결이 남아 있다.
때로는 그 결 속에 저자가 가장 공들여 새긴 의미가 숨어 있다.
프쉬케처럼.
p.s.
누가복음 12장은 프쉬케가 5번이나 나와서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이다.
#김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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