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가 주신 선물
노승수 목사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엡 4:7-11, 개정)
에베소서 4장의 대략의 문맥은 1-6절은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일치를 이뤄야 할 이유를 간략히 설명을 하고 7-16절은 이 일치가 어떤 성격의 것이냐는 것을 말합니다. 그중에서도 오늘의 본문인 7-11절은 시편을 인용하면서 일치의 성격을 규명하고 12-16절은 일치를 위해 주어진 교회의 직무의 다양성을 설명합니다. 그럼 오늘의 해석의 주된 본문인 7-11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바울은 교회의 일치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 시편을 인용하는데요. 시편 68:18절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시 68:18, 개정)
그런데 유심히 보시면 뭔가 약간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게 됩니다. 에베소서 본문에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셨다'고 되어 있는 것이 해당 인용 본문인 시편에는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라고 되어 있다는 점이죠.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요? 인용에 오류가 난 걸까요?
이 문제를 규명하기 앞서 바울의 의중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시편을 언급하기 전에 바울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7절입니다.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죠.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선물'입니다. 좀더 확장을 하자면, '그리스도의 선물'이죠. 그리스도의 선물이 뭘까요? 신약에 의하면, 이 선물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전문맥인 1-6절에서도 일치가 성령으로 된 것이라 언급하고 더 거시적으로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나서 '성령의 선물'을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약속하신 성령'이라고 언급하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가 승천하시면서 하신 약속으로 언급이 됩니다(8절). 확대문맥을 보자면, 에베소서 1:13에서도 이 약속의 성령이 나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기를 당부하시면서 몇 날이 못되어 성령을 받을 것이라면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말씀하십니다. 이건 다음에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설명드리기로 하구요.
암튼 본문의 인용의 의도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심을 확증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제는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시편과 바울의 인용이 정반대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왜일까요? 이 인용 본문인 시편의 탈굼 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하늘로 올라가서... 토라를 받아 사람들에게 선물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시는대로 오순절은 성령 강림절입니다. 그런데 유대 전통에 의하면 이 오순절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40일을 머물다가 내려와서 백성들에게 토라를 선물한 축일로 여겼습니다. 탈굼의 이 본문은 바로 이런 전통의 반영인 것이지요. 이 행적은 예수님의 행적과도 괘적이 매우 흡사합니다. 유월절에 돌아가시고 3일만에 부활하셔서 40여일을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약속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오순절에 친히 성령과 함께 강림하신 것이지요. 이런 궤적은 흡사 유대 전통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오르며 내리는 시간을 포함해서 율법을 받던 장면의 성취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것을 의도한 것 같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았다면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예수에 대해서 10절까지 설명을 합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바로 10절 하반절에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말씀이 11절입니다.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곧 교사가 나오는데 여기서 주동사는 '주다'입니다. 개역개정에는 삼으셨다로 번역했는데요 예전 개역한글판에는 '주셨으니'로 번역했습니다.
이 11절의 '주다'는 동사는 크게 앞부분에 성령을 '주다'와 의미상 같은 맥락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오순절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토라를 받아 백성에게 전해준 절기이고 그리스도는 바로 이 절기의 성취자로서 성령을 주셨는데, 이것이 단지 성령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만물을 충만케 하고 12절에 나오는대로 성도를 온전케 할 목적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이 성령이 바로 위에 언급한 직분자들을 교회에 주셨는데, 이들은 모두 '말씀 사역자'라는 사실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사도와 선지자'는 에베소서 2:20에 언급된 대로 이 교회의 터입니다. 그리스도가 터가 아니라 사도가 터가 되는 게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요. 이 사도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고 그들이 받은 복음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니케아 공의회가 정의한 교회의 4가지 지표 중의 하나도 바로 이 '사도성'입니다. 그래서 장로교회 헌법에 이 사도와 선지자를 '비상직원'으로 언급합니다.
그리스도가 승천하시면서 성령만 주신 것이 아니라 더불어 말씀 사역자를 주셨다는 사실에 주목해달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적어도 에베소서 4장에서 성령은 말씀의 해석자로서 성령이고 이 해석을 통해서 성도와 교회 공동체를 온전케 하고 만물을 충만케 하고자 '말씀 사역자'를 주셨다는 점입니다.
복음 전하는 자와 목자와 교사가 이어져 나오는데요. 복음 전하는 자가 말씀 사역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혹 자들이 성경에 목사라는 직분이 없다는 논거로 드는 구절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제가 좀전에 언급하기를 '목자'라 언급했는데요 이게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유심히 보면, 이 목자와 교사는 하나의 정관사로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순접을 의미하는 '와'라는 접속사는 성경에서 여러 용례로 쓰입니다. 예컨대, '물과 성령' '나라와 의' '목자와 교사' 이게 다 같은 해석을 가질 수 있는 예들입니다. '곧'으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물 곧 성령' '나라 곧 의' '목자 곧 교사' 이렇게 번역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목자와 교사를 합치면 그게 바로 목사입니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바울은 성도가 일치를 이뤄야 하는 이유를 1-6절에서 간략히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7-16절은 그 일치의 이유를 설명한다고 했는데, 그게 다른 것이 아니라 성령이고 성령을 통해서 어떻게 일치하느냐 모세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가 승천하심으로 성령을 보내시고 그의 말씀을 전할 말씀 사역자를 보내신 것은 교회의 일치됨이 바로 이 말씀과 그 강단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케아 공의회는 사도들의 전통을 따라 교회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일치된 하나의 교회, 사도적 교회, 거룩한 교회, 그리고 보편(캐토릭) 교회입니다. 이 4가지의 정의의 중심에 바로 말씀과 성령이 있는 것이지요. 특히나 성령은 모세가 받아 전한 토라의 성취라는 점과 이것을 위해서 성령을 주신 것과 동일하게 말씀 사역자들을 주셨다는 점 그리고 그 사도들의 전통을 이은 교회가 이와 같은 교회를 정의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성령은 바로 '말씀의 해석자'로서 오신 것이고 그 해석적 일치는 바로 그리스도가 주시고 세우신 말씀 사역자들의 교회로부터 나오는 일치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는 바로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2014.03.06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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