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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열왕기강해

열왕기 상 19:9-18, 영적 어둔 밤이 찾아 올 때....

영적 어둔 밤이 찾아 올 때....


열왕기 상 19:9-18
 
[9]엘리야는 거기에 있는 한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냈다,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이제까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큰 열정으로 일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의 언약을(혹은 주를) 버리고 저버리고 주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주의 선지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저만 홀로 남았는데, 그들이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11]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에, 여호와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쪼개고, 여호와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12]그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불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짧은 침묵의 소리(a brief sound of silence)가 들려왔다. [13]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서,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에 나와 섰다. 바로 그 때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4]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이제까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큰 열정으로 일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의 언약을(혹은 주를) 버리고 저버리고 주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주의 선지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저만 홀로 남았는데, 그들이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돌이켜, 광야길로 해서 다메섹으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서, 아람의 왕으로 세우고, [16]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므홀라 출신인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네 뒤를 이을 선지자로 세워라. [17]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는 예후가 죽일 것이고,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는 엘리사가 죽이리라. [18]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입을 맞추지도 않은 칠천 명을 모두 남겨두리라"
 
노승수 편역
 
본문의 구조 
9a. 도입
9b-12. 첫번째 논쟁
13-19. 두번째 논쟁
 
기독교의 복음은 지난 2000년간 은혜의 복음을 가르쳐왔습니다. 이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항시 독버섯처럼 피어오르던 사상이 바로 공로주의 사상입니다. 바울 당시에도 할례당이라던 공로주의사상을 배격해서 갈라디아서가 기록되었습니다. 어거스틴 때에도 펠라기우스라는 사람이 일어나 역시 공로주의를 말했고, 어거스틴에 의해서 오직 은혜로만 구원얻는 교리는 지켜졌습니다. 루터의 시대에 면죄부가 팔리고 공로주의사상이 팽배할 때, 역시 오직 믿음으로라는 교리로 교회는 공로주의 사상을 배격하고 은혜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지켜왔습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복음주의권의 교회들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만 구원얻는다는 교리를 가르치며 설교합니다. 그러나 유독 기도의 문제에만 오면, 교회는 이상한 양상을 띠게 됩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기도를 보면 기도공로주의를 연상케 됩니다. 수능100일 작정기도회라든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라든지,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는 문구들은 기도의 공로가 쌓이면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여서 우리에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이 대개, 하나님 나라나 그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일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영달, 명예, 자식을 위한 것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무식이 용맹이라는 말이 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지 않는 열심은 거의 치유가 불가능한 불치의 병에 가깝습니다. 롬 10:2에 보면,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공로주의들은 은혜를 메마르게 만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열왕기의 엘리야의 호렙산 사건은 이와같은 공로주의가 가져다 준 영적 어둔 밤을 우리에게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둔 밤이 무익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 더욱 더 주님을 닮도록 기능한다는 점을 또한 보여 줄 것입니다. 
 
먼저 본문 9절을 보면, 엘리야가 굴에 거하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개역성경에는 번역이 안되었지만, NIV로 보면, he went into a cave and spent the night라고 되어 있습니다. 번역하지만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거기서 밤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관사를 보면, 동굴 앞에는 a를 붙이는데 밤앞에는 the가 붙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밤을 보낸 것이 아니라 특별한 그 밤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의 원어는 '삼' 그곳이라는 장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이 장소는 모세가 이스라엘의 배도후에 하나님의 현현을 목격한 장소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영적 어둔 밤 가운데 있었습니다. 마치 요한 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오는 장면은 그의 영적 무지를 보여주듯이, 이 영적 어둔 밤은 그때까지 함께 하시던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 버린 것 같은 부재의 경험으로 다가왔습니다. 
 
16세기의 영성가 십자가의 요한에 의하면 이 영적 어둔 밤은 진정한 사랑을 배우기 위한 필수적 단계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부름에 매혹된 영혼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누리다가 그 확신이 떨어져 나가고 비참한 순간이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사랑은 이 어둔밤에 의한 경험이 소멸되는 시기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이 사건 이전,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합니다. 3년 반이나 비가 오지 않게 하고 갈멜산의 바알선지자와의 대결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산정에서 기도한 즉 비가 내리고 아합의 마차 앞을 슈퍼맨처럼 달려 갑니다. 그가 성에 도착해서 듣게 된 것은 아합의 처 이세벨의 그를 죽이리라는 메시지 였습니다. 아마도 엘리야는 이때를 하나님이 나라를 회복하실 때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단순히 도망을 생각했다면, 요나처럼 다시스로 도망하거나 다른 지형학적으로 유리한 곳으로 도망할 터인데, 굳이 남쪽으로 내려와 여호와의 산 호렙에 이른 것은 그의 목적이 단순히 도망이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특히 로마서 11:2은 그의 목적이 이스라엘을 고소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 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그는 지금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장이 정확히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본문의 행간은 틀림없이 하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지 않는 것 같은 이 영적 어둔 밤과 같은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 너 여기서 뭐하니? 라고 묻고 계십니다. 
 
그 때 그가 고소합니다. 고소의 내용은 네가지 입니다.
 첫째, 이스라엘 자손이 출19장에 맺어진 하나님과 언약을 저버렸다. 
둘째, 뿐 아니라 주의 제단을 헐었다. 
셋째,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다. 
넷째, 나마저도 죽이고자 찾는다. 
 
사실 이 고소 내용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언약은 이미 파기 되었으며, 파기된 언약의 갱신을 위한 제사의 제단들을 다 헐었으며, 거기에 더해, 그것을 기억하고 돌이키도록 하는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싫어해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보다 악질이기 힘듭니다. 사실 모세시대의 배도는 언약의 파기 정도로 끝나지만, 엘리야의 고소는 언약이 파기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의 회복을 위해 주신 제사제도의 근간인 제단을 헐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돌아오고 싶은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언약을 상기 시키는 것을 싫어 하여 그들을 칼로 죽였습니다. 엘리야의 이 고소는 언약의 율법들로 볼 때, 매우 정당한 고소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답변은 그의 현현으로 이루어집니다. 11-12에 그가 현현하시는데, 부재의 표지가 셋, 임재의 표지가 하나로 나타납니다. 부재의 표지는 바람, 지진, 불입니다. 그런데 공교로운 것은 이것은 출 19:16-19에선 임재의 표지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19장의 세가지 임재의 표지는 사도행전 성령강림에 나타난 표지와도 동일한 측면이 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불, 모인 곳의 진동, 이 세가지 표지는 제가 지난 주일 낮예배에서 사도행전 2장1-4절을 설교할 때, 설명 드렸던 것처럼 심판의 표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선 그 구약적이며 신약적인 선명한 임재의 표지 가운데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 표지를 제시하는데, NIV에서는 a gentle wishper 또 RSV에서는 a still small voice로 번역하지만 이것은 수수께끼 같은 히브리어의 정확한 뉘앙스를 전달해주지 못합니다. 이 히브리어의 더 정확한 번역은  "짧은 침묵의 소리(a brief sound of silence)"입니다. 제가 편역한 본문이 그렇게 옮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폭풍 뒤의 침묵속을 지나고 계셨음을 암시적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항상 극적으로 일하시는 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생히 증거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도 증거하며, 동시에 구속사적으로는 이 "짧은 침묵의 소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이기도 합니다. 
 
또 한가지 주의 할 점은 이 장소와 사건 자체가 모세가 언약의 율법을 받은 후,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배도했을 때, 모세가 중보하면서,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한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입니다. 40주 40야를 호렙을 향해 가는 것이(출34:28 vs 왕상19:8) 그렇고 동굴과 반석의 틈 사이에 두시고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것도 그렇습니다(출33:18-23 vs 왕상 19:9-13). 다만 차이점은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를 했고, 엘리야는 고소한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국면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대해서는 두 사람의 입장이 같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우리를 고소하는 이가 예수님 당신이 아니라 모세라고 말씀하십니다(요5:45)
 
우리는 이 "짧은 침묵의 소리"라는 계시의 의미를 유사한 계시인 모세 앞에 현현한 사건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 현현이 있고, 출애굽기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성품을 반포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출 34:6-7)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모세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한 이유는, 다 진멸하고 너로 새 백성을 만드시겠다. 나는 안올라가니 너네 끼리 가라 등등의 말씀을 하시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징표를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징표, 그래서 등을 보여주셨고, 그 임재의 징표 끝이 이 반포입니다. 
 
종합해 봅시다. 앞서, 세가지 부재의 상징 곧, 바람, 불, 지진은 사도행전 2장에서는 임재의 상징이며 심판의 상징이라고 했습니다. 또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을 하나님께 고소했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 세가지의 심판의 상징 가운데 하나님이 부재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네번째 표지인 "짧은 침묵의 소리"는 출34:6-7의 말씀과 일대일 대응을 이루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은혜로우신 분이시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임재로 알았던 사건들이 이제 부재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했건만, 하나님의 그의 그러한 공로주의와 열정을 우리가 죽여야 할 자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시며, 그의 곁을 떠나시는 부재의 메시지를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가 겪었던 영적 우울증은 이 비참함에서 비롯됩니다. 그의 표현을 보면, 나만 남았고 내 생명을 찾으려 한다는 말에서 우리는 그의 영적 허무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회복할 때라고 생각했건만, 자신의 죽음으로 돌아오는 이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비참함에 대한 자각의 순간입니다. 그가 얼굴을 가린 까닭은 죽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신의 비참함을 눈뜨고 볼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그가 굴 어귀에 얼굴을 가린 채 섰을 때, 하나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너 여기서 뭐하니? 그 때 다시 동일한 대답으로 대답합니다. 이것은 아직도 엘리야가 하나님의 이 계시에 승복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두번째 논쟁이 다시 시작됩니다. 첫 논쟁은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에 대한 논의 곧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면, 두번째 논쟁은 그 대상인 엘리야에 관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두번의 대답에서 강조한 것은 자신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라곤 자기 혼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엘리야 자신도 다 아는 자기 기만 입니다. 왕상 18:13에 오바댜와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기 위해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 그가 이런 사실을 다 알면서도 가멜산에선,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왕상 18:22)라고 말합니다. 그의 안중에 이들은 참 선지자가 아니거나 타협한 타협주의자 였을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혼자 사역했고, 다른 사람들의 영적 수준은 그의 안중에 들어오지 않는 영적 엘리트 였습니다. 그의 보기에 이스라엘의 영적 기상도는 암흑이었고, 도저히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이런 시각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7000명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원어에 '콜' 영어성경에선, 'all' 혹은 'every'가 따라 붙습니다. 그래서 제가 편역한 본문엔 '7000명을 모두 남겨두리라'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롬 11:2-4에서 언급된 것처럼 그의 택하신 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라는 의미를 담습니다. 동시에 7000이란 숫자 자체가 산술적 숫자라기 보다 신학적 함축을 담은 상징적 숫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계시록의 144000과 같은 함축을 담는 숫자입니다. 7이란 완전을 의미합니다. 1000역시 완전을 의미하는데, 솔로몬의 1000번제에서 알 수 있습니다. 번제 자체가 완전한 헌신인데, 거기에 다시 완전의 의미가 한 번 더 해진 것입니다. 이처럼 7000은 이런 영적 암흑기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늦거나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만 남았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공동체를 남기셨습니다. 그의 영적 오만이, 그의 영적 엘리트 주의가 이러한 사실을 보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열정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일했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적하십니다. "너만 남았다고 누가 그러드냐? 내 구원은 모자라지 않다. 완전하다" 고 말입니다. 
 
우리에겐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영적인 공로를 쌓을 때, 점점 주변 사람이 정죄의 대상으로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개 장로님은 교회에서 왕따라고 합니다. 그는 당회에만 오면 "김장로 왜 새벽기도 안나와, 박장로는 지난 심야 예배때 안나왔드만"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적 오만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그의 신앙공로주의가 은혜의 설자리를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오만을 볼 수 있는 대목은 아마도 아합의 마차를 앞서 달려 이스르엘 성에 이르렀을 때, 그는 하나님의 때를 자신의 공로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시간표를 제시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심판 있다는 것입니다.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니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이나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5-17까지 다른 세명의 사명자를 세우라는 명령이 기록됩니다.  
 
그제껏 혼자 사역했던 영적 엘리트 엘리야는 이제 사라지고 다른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는 섬기는 리더 엘리야만 있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생각했던 심판은 이 세명의 후배 동역자에게 맡겨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의 주권입니다. 누구도 그의 시간표에 그의 계획에 반대를 달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분별하고 거기에 순종해야할 의무만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열정과 열심이 특심하게 되면, 하나님의 이 시간표와 장소를 제대로 보는 눈이 마비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무지한 열정은 냉랭함보다 나쁜 것입니다. 보통 어떤 사람들이 더 이단에 잘 빠집니까? 열정적인 사람들이 빠지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열정이 그들의 자아요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것임을 자각하지 못함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어둔 밤이 찾아드는 것은 어떤 점에서 필연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나치게 가까이 할 때 오히려 우리를 멀리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아는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 왕자와 여우가 조우하는 장면과 흡사합니다. 왕자가 가까이 할 수록 여우는 도망갑니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은 사랑은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도망가는 이유는 여우를 여우 아닌 다른 것으로 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과의 밀월같은 만남이 끝나면 그분이 부재하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우리의 자아가 이기심을 벗고 영적 이타성에 눈을 뜨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 만큼이나 하나님의 부재의 경험 또한 우리의 영적 성장을 촉진합니다. 
 
다행히 엘리야는 열린 귀를 가졌고 그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그가 부재의 순간을 경험하고 매우 힘든 영적 어둔 밤과 메마른 광야를 사십주야를 지냈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진정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일하는 사역자로 거듭납니다. 동역자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순종하는 사역자로 거듭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영적 어둔 밤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먼저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손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부재라는 표현보다 '없이 계심'이란 표현을 선호합니다. 우리에겐 부재로 기억되고 경험되지만 그분은 없이 계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각보다 큰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논리의 범주에 다 들어오지 않으시는 신비가 존재함을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동시에 어둔밤은 우리의 영적 엘리트 주의와 교만 오만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면, 이런 부재의 순간에도 엘리야처럼 사십주야를 더욱 주를 사모함으로 기도의 끊을 놓치 말아야 합니다. 이 기도는 결코 기도 공로주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분께 듣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화 하나만 들고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어떤 노동자가 일을 하다가 결혼 예물 시계를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여러시간을 찾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다른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짧은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 때 들려오는 소리 "째깍째깍" 시계소리였습니다. 그소리를 따라 적재물 뒤에 있는 시계를 찾았습니다. 이것이 앞서 설명한 "짧은 침묵의 소리"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2007년 1월 26일 심야예배
선교교회에서 설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