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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히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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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5:2에 자비로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을 묘사하는 “용납할 수 있는 것(Μετριοπαθεῖν)”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단어는 철학적으로는 스토아 철학의 핵심개념인 무욕(Απάτεια)의 반대어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중용”을 뜻한다. 이 말의 의미를 명료하게 이해하려면 우선 무욕, 혹은 금욕이라는 아파데이아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한다. 사람의 뇌는 경험을 그저 사실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이야기로 각색해서 인식한다. 예를 들어, 편안했던 출근하는 길이 지각을 하는 날 아침이면 유독 차가 더 밀리는 것 같다. 다른 날과 다를 바 없는 아침이지만 지각이라는 상황이 우리에게 서둘러야 한다는 욕구를 풀어 넣고 이 욕구는 상황을 다르게 인식하게 만든다. 인간의 뇌는 수많은 경험에 관한 보고서를 매일 받는다. 이 모든 것을 일일이 다 수용할 수 없기에 일상적인 경험들은 기각하고 내 이야기만을 유의미한 경험으로 보고서를 받는다. 마치 우리가 유튜브를 시청하면 일정한 기호에 따른 시청 습관이 알고리즘을 형성해서 특정 취향의 동영상을 계속 소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의 뇌는 자기 이야기로 일정한 알고리즘을 만든다. 이 알고리즘은 내게 너무 익숙한 것이어서 제대로 검토된 적이 없다. 다른 용어로는 세계관, 혹은 가치관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용어보다는 더 근원적이고 무의식적인 패턴을 의미한다. 심리학에서는 자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내게 중요한 권위 있는 인물이 인사를 받지 않은 것에 “내가 뭘 잘못했나?”와 같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현대의 소비주의처럼 나의 가치를 명품과 같은 브렌드를 소비하는 데서 찾는 데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알고리즘이 나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나의 이야기이기보다 그저 상황과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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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철학의 아파데이아는 이것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두고 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단순히 금욕주의라고 하면 이 사조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들은 세상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누가 내게 쌍욕을 하는 상황은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 말을 듣고 내가 상처를 받을지 말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날씨가 덥다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없지만 더운 날씨에 내가 옷을 가볍게 입는 일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 베드로와 동시에 스토아 철학자 절름발이 에픽테투스의 일화는 이를 잘 설명한다. 그는 노예였고 주인과 레슬링에서 다리가 부러진다. 그것은 자기가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로 화를 내거나 원망하거나 짜증을 내는 일은 그가 결정할 수 있다. 그런 결정으로 내 부러진 다리와 불구가 된 내 삶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원망이나 분노는 내 몸의 상처 외에 마음의 상처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들이 금욕주의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마음의 욕망을 절제하는 데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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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스토아 사상은 기독교 신학의 섭리 교리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칼뱅이 가장 먼저 저술한 책이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의 관용론이라는 점도 그 영향을 시사하며 칼뱅주의로 대표되는 청교도 사상이 금욕주의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것 역시 이런 내용을 배경으로 한다. 누군가 우리를 욕할 때, 자기를 잘 살펴보면 욕이 직접적인 이유이기보다 그 욕이 자극한 내 속의 자격지심이 내 반응의 이유가 된다. 누가 뒤에서 “아줌마”하고 부를 때, 처녀들은 여기 반응하지 않는다. 자기를 그렇게 정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누가 “선생님”하고 부를 때, 그쪽을 돌아보는 사람은 선생님이다. 다른 경우라면 그저 소리가 나서 돌아본 게 전부이다. 내 반응은 내게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상처는 대개 길 가다가 부딪힌 이름 모를 사람이 한 모진 말 때문에 생기지 않고 내게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의 말에 의해서 생긴다. 왜 그럴까? 내 알고리즘에 그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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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저작권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라고 권면한다. 내가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번개에 맞을 확률이지만 오늘 내가 산 복권 번호 역시 같은 확률이다. 다만 우리 사회의 알고리즘이 로또 맞은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것만 의미 있게 기억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야기를 갖지 못한 것이다. 우리 세계관이나 가치관 혹은 자아가 주체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고 하셨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모욕감은 때리는 가해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결정한 것이다. 마치 지각에 서둘러 회사에 도착하려는 욕망이 교통 상황을 갑갑하게 느끼게 하고 짜증을 부르는 것과 같다. 여느 날과 같은 교통 상황에도 내 욕구가 감정적 변화를 부른 것이다. 왼뺨을 돌려대는 대는 저작권이 실린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저 그 행위를 흉내 낼 수 없다. 복음에 대한 가치가 수모를 수모가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게 한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길이 가져다준 수모를 영광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신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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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해는 섭리 교리에 상당한 배경이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섭리를 하나님을 제1원인, 피조물을 제2원인, 이 둘이 동시 발생한다고 해서 “신적 동시 발생 교리(Divine concurrence)”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갖가지 정념(πάτεια)들은 하나님께서 제1원인이 되셔서 일어난 여러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거기에는 우리의 불평, 원망, 시기, 욕심, 질투, 평가, 자책, 후회, 자괴 등등 수없이 많은 내적 정념들이 작용해서 이 일을 결정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이해할 수 없게 한다. 이것은 마치 야구장에서 배트에 맞은 것만 안타로 환호하는 현상과 같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야구 게임이 아니다. 내가 휘두른 배트에 아무것도 맞지 않을 수 있다. 그게 인생일지 모른다. 그 인생이 공허하게 느껴진다면 이 일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자신의 저작권 있는 이야기가 부재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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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앞서 말한 이런 정념 없는(Απάτεια) 삶의 방식이 부패하고 타락한 사람으로서 사실 가능할 것인가? 그래서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을 “용납할 수 있는 것(Μετριοπαθεῖν)”이라고 말한다. 이 용납은 정념 없는 삶의 반대 극단,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도 좋아 주님은 다 이해하셔”가 아니다. 이 단어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중용이란 단어로 사용된다. 중용의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정념 없는 삶과 감상적인 방종 사이에서 “빛나는 중용”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용납하실 수 있었던 까닭은 히브리서 5:2에서 당신도 이 연약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조건을 이해했다는 의미다. 차가 막히면 짜증이 나고 누가 잘 되면 시기가 나고 배가 아프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슬프고 배신을 겪으면 비통함을 이해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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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면에서 스토아의 정념 없는 삶은 인간미가 없다. 아파데이아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은 “그게 돼?” 일 것이다. 그렇다. 연약한 인간은 그게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평범한 사람에겐 더 그렇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권면하셨듯이 왼뺨을 돌려대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숙명과 같다. 그래서 인간미 없는 아파데이아보다 빛나는 중용이 더 의미가 있다. 이 중용은 우리 삶의 연약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 고전인 중용에서도 아파데이아 같은 천심은 미약하고 연약한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기에 오로지 정밀하고 하나로 모아 그 가운데를 붙드는 것이 중용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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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테투스 같이 다리가 부러지는 극한의 고통에서 짜증 없이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몇몇 현자나 가능한 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은 선하시며 자비로우셔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인생에서 매일 만나는 당첨되지 않은 복권 같은 삶에도 저작권 있는 이야기로 우리 인생을 구원과 성화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형들에게 배신당해 종으로 팔리고, 누명 쓰고 옥에 갇히는 이야기 속에서도 “나를 형들보다 먼저 애굽에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요셉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소비주의”나 “성공주의”만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결코 저작권 있는 자기 이야기를 가질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누군가의 연약을 들여다볼 눈이 없다. 그게 정념 없는 삶의 허상인지도 모른다. 우리 주님의 게세마네 기도는 그도 연약에 휩싸여 있으며 그런 우리를 공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자기 자리에서 삶을 충실하게 살면 좋을 텐데 자신이 서보지 않은 자리에서 어쭙잖은 충고나 조언은 자기 저작권이 없는 삶을 더 공황으로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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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연약을 용납하는 태도는 우리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이웃과 관계를 만들고 공감하게 하며 사랑하게 한다. 그러나 아파데이아는 자기는 평화로울지 몰라도 이 세상에 없는 저세상의 몸짓이다. 요셉은 그 인생의 서사를 모두 이해했기 때문에 평화로웠던 것이 아니다. 다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형들의 연약을 알았기에 그들을 용납할 수 있었다. 오히려 형들과의 관계에서 불안감을 가진 것은 형들이었다. 자기 저작권이 있는 서사가 없었던 형들은 세상적인 눈으로 요셉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죽음이 가까워지자 자신이 한 것처럼 요셉이 자기와 가족들에게 할지도 모르는 일들이 두려웠다. 거기에는 수많은 제1원인의 신호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알고리즘이 그것을 수용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연약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분노, 슬픔, 욕심, 불안, 좌절, 시기, 허영 등등은 우리를 위태롭게 한다. 만물을 선하게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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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불안을 잦아들게 하는데 정념 없는 삶에서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유용해 보인다. 내적으로는 이런 분별지를 갖고 외적으로는 중용의 덕을 따라 내 연약함을 이해하듯 이웃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너그럽게 용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C.S. Lewis는 어느 글에서 용납과 용서의 예를 설명하면서 용서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반론에 대해서 그런 예가 있다고 말한다.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그 예라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내일부터 살 빼야지”라고 하고 저녁에 뭔가를 먹고 있는 자기를 용납하며, “새벽기도 가야지” 하고 새벽에는 힘들어 일어나지 못하는 자기를 용납해주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에겐 한없이 너그러우며 타인에겐 인색한 우리를 향한 촌철살인(寸鐵殺人, one-liner)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섭리를 믿는다면 하나님과 이웃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도 평화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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