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적 에너지의 본질과 기능 - 정신적 산소 ]
코헛이 말하는 정신적인 산소(psychological oxygen - selfobject, 자기대상)의 개념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코헛은 유아가 엄마로부터 총애를 받을 때에 비로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한다. 태어난 모든 아이가 다 자기 자신 내면에서 샘솟는 힘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바라보면서 흐믓해하고 자기에게 관심을 쏟으며 기뻐하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유아는 자기의 존재에 대하여 긍정적이면서 동시에 꿈과 희망을 세워본다. 활력을 가지고 세상을 힘차게 살겠다는 의욕을 가지는 것이다.
여기서의 의욕과 활력이 바로 정신적 에너지의 근본이 되며, 따라서 정신적 에너지는 본능 안에서 라기 보다는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받는 긍정적 총애의 경험이 주된 원인이 된다. 코헛은 “총애경험mirroring selfobject”을 여러 가지 다른 용어로도 표현하였다.
그중에는 어린 딸에 대한 엄마와 아빠의 환희에 찬 기쁨의 흠모함 (the humanities, p. 166), 정서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부모의 경험 (the analysis of the self, p. 120), 엄마의 반짝거리는 눈 (the humanities, p. 226; the analysis of the self, p. 116), 누군가가 기쁨으로 쳐다보고 있음 (the humaniteis, p. 97), 부모의 근본적인 신뢰와 수용(the humanities, p. 97), 일반적으로 엄마로부터 경험되어 지는 것 (the restoration, p. 185), 과대성과 노출적 용기의 발달에 공헌함 (the analysis of the self, p. 25), 그리고 아기숭배 (the Kohutian seminar, p. 71) 등이 있다. 그런데 총애란 코헛이 말하는 정신적 산소의 3가지 요소 중의 하나에 속한다.
그 밖에 존경과 일체감이란 정서적 경험도 사람에게 주는 정신적 에너지의 역할을 한다.
존경은 주로 아들의 경우 위대한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생기는데, 훌륭한 아버지를 경험하는 아들은 그 아버지의 가치관을 아름답게 느끼고, 그의 이상과 가치관을 자기자신의 심리안에 내면화(internalization)한다. 그러나 아버지를 존경하거나 흠모하는 경험이 없을 경우에는 아버지의 가치관이나 이상을 내면화하지 못하며, 이 때에 아이의 정서적 발달은 정지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프로이드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프로이드는 “동일시identificiation"이라는 원시적 방어기제를 통해서 아이가 부모의 가치관을 내면화한다고 하였다. 아이 편에서의 ”존경“이 선행되어야 함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헛은 "모든 어린아이들이 부모의 가치관을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위대성을 목격하고 존경하는 아이들이 부모의 가치관과 이상에 참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힘과, 지식 그리고 아름다움과 도덕성을 목격할 때에 대상에 대한 완전성을 경험하면서 생기게 되는 정신적 기쁨이 있을 때에 발전되는 것이다. Kohut, the analysis of the self, p. 63-64.
또한 코헛은 이런 정신적 경험은 주로 아버지에게서 나온다고 하였다. Kohut, the restoration of the self, p. 185. 그리고 이런 경험을 통해서 아이는 자기의 과대성과 노출적 본능들을 통제하는 힘이 생긴다고 한다. Kohut, the analysis of the self, p. 45.
일체는 동성의 부모와 함께 의미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고, 활동을 같이 하면서 아이가 점점 부모의 기술과 재능을 습득하는 과정이다. 이 때에 아이는 부모와 자기가 한몸이라고 느끼며 코헛이 일체감을 twinship으로 표기한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바로 쌍둥이의 상태를 지칭한다.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서로가 서로를 즐거워하는 관계적 기쁨을 의미한다. 이런 경험이 바로 기술과 재능의 발달에 필요한 과정이라고 코헛은 말하고 있다. Kohut, How does analysis cure?, p. 23, 199, 200., 그런 하나됨의 정서적 체험이 바로 기술습득의 과정을 용이하게 한다.
[ 바람직한 아버지상 - 희생적 아버지 ]
코헛은 Introspection, Empathy, and the Semicircle of Mental Health (내적관찰, 감정이입, 정신건강의 반원) 이라는 논문에서 프로이드와는 아주 다른 아버지 상을 소개하고 있다. 프로이드와는 달리 "희생적 아버지 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리이스 정부는 트로이 전쟁시 수공업자들을 무조건 징집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 (Odysseus)는 잔꾀를 부려 미친척하였는데, 그 목적은 징용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로 부터의 세명의 밀사들이 (Agamemnon, Menelaus, and Palamedes)은 오디세우스를 시험해 보고자 그의 아들, 텔리마쿠스 (Telemachus)를 오디에우스가 끌고가던 쟁기 앞에 던졌다. 정말로 미쳤다면 그 위험을 모를 것이고, 미치지 않았다면 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정상인의 행동을 할 것이라는 계산을 가진 것이다. 그 순간 오디세우스는 아들을 구하면 자기가 끌려간다는 것을 알았다. 미친 척 한 것이 거짓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결정은 “자기는 죽고 아들을 살리는” 희생적 아버지의 전형이었다. 그는 아들을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밭에 그 쟁기를 반원을 그리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세명의 밀사들에게 붙잡혀 끌려간다. 이 신화의 내용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로서 서구 사회에 널리 퍼져있다.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코헛은 건강한 아버지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 반원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아버지 상은 바로 프로이드가 말한 오이디푸스의 살인 신화 이야기와는 아주 다른 인간이해를 보여준다. 프로이드가 갈등과 싸움의 아버지를 이야기 한다면, 코헛은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도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 상을 이야기 한 것이다. Heinz Kohut, "Introspection, Empathy, and the Semi-Circle of Mental Health,"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analysis 63 (1982): 395-406.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아이들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잔인하고 냉혹하며 이기적인 욕심으로 가득찬 아버지를 가진 아이들만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가지고, 이처럼 부정적인 아버지의 경험은 훗날 사회 현장에서 직장상사나 사회적 권위자와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관계, 곧 반항과 반골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는 비운을 맞는다.
따라서 아버지가 사랑과 희생의 모습을 보였는가 아니면 잔인과 욕심의 모습을 보였는가에 따라 아이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하는 삼각관계의 위협에서 고생하는 것이지, 결코 이 현상이 프로이드가 주장한데로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보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한 코헛의 이러한 입장은 결국 안나 프로이드를 중심으로하는 미국내 이고(ego) 정신분석학회에서 코헛이 서서히 불편한 관계를 경험하게 되는 주된 원인이 된다.
[ 정신병리의 원인 - 정신적 산소의 결핍 ]
코헛의 경우 이런 갈등이론에 대하여 나름대로 수용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정신병리의 유혹, 고착 이론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서 코헛은 “정신적 산소의 결핍”이라는 또 다른 종류의 정신병리이론에 주목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평생동안 정신적 산소를 마시며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해있다. Kohut, How does analysis cure?, p. 77. 그런데 특별히 유아기에는 이런 경험들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 물론 여기서 정신적 산소라고 함은 그가 말하는 세가지 정신적 경험(총애, 존경, 그리고 일체감)이다. 유아시절에는 “원시적 수준 (archaic level)”의 경험들이 필요하며, 서서히 성숙해 가면서는 “성숙한 수준 (mature level)"의 경험들이 요청된다. 원시적 수순의 경험은 일반적으로 성숙으로 가는데 있어서 필수과정이며, 성숙한 사람들의 경우 성숙한 수준의 경험을 통해서만 자신의 정신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Ibid., p. 76. 사람의 정신건강은 세 가지 종류의 정신적 산소의 경험에 달려있다. 총애, 존경, 그리고 일체감의 경험이라고 하는 이 정신적 경험들은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상당기간동안 결핍되면 정신적으로 온전할 수가 없게 되고 병리적 증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특별히 일정 기간동안 이 세가지 중요경험들 중에 두가지가 결핍될 경우 정신병리가 나타나게 되며,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보았다. Kohut, the humanities, p. 85.
정신병리와 본능의 문제와 관련하여 코헛은 프로이드와 다른 입장을 견지한다. 임상상황에서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프로이드가 지적한대로 성적인 본능과 공격적인 본능이 제대로 통제할 만한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이고 (ego)의 현실능력이 병약하거나, 슈퍼이고 (superego)가 너무 경직되었거나 이드 (id)가 슈퍼이고를 정복한 상태가 환자들의 심리에서 나타나는것이다. 성적이며 공격적인 본능들을 어떻게 조절하고 통제하느냐에 대하여 사람은 구강기, 항문기, 그리고 성기기 동안에 제대로 훈련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시기에 본능의 표출이 제대로 억압되고, 사회 문화적으로 용인된 방향으로 전환되어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계속해서 세상의 통제와 심판 앞에서 서게 되는 운명을 맞는다.
그러나 코헛의 이론적 체계는 위험한 본능들에 대한 프로이드의 견해가 너무 원시적임을 지적한다. 환자들이 성과 공격성의 영역에서 통제 조절능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의 정신병리의 원인이 그 본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코헛에 따르면 이들 영역에서의 미숙함과 문제점은 바로 “정신적 산소의 결핍”에서 나오는 결과물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본능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적 충일함(self-cohesion)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생긴다는 이론이다.
코헛의 발달심리학을 연구하면서 특별히 그가 과대성과 노출grandiosity & exhibitionism의 의미를 소개하였는데, 이 발달과정에서 “공격성”이 나타나게 되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코헛의 발달심리학을 연구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코헛은 유아가 부모로부터 총애를 경험하게 되면 서서히 자기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고 지적한다. 누군가가 자기를 향해 웃어주고 눈을 반짝거리며 쳐다 볼 때에 유아는 자기의 존재가 괜찮은 존재이며 자기기 힘이 있고 위대한 존재라는 주관적인 평가를 하게 된다.
이 때 “자기가 위대한 존재라는 주관적 평가”를 하는 것을 가리켜서 코헛은 발달차원에서의 “과대성grandiosity”라고 명명하였다. 이 때에 아이는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다. 엄마 곁을 떠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정신적 힘은 바로 이 “주관적인 과대성subjective grandiosity” 때문에 가능해 진다.
그런데 이런 주관적 과대성은 자칫 “공격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파괴적일 수도 있는 이런 공격성은 그러나 아이의 정상적인 정서발달의 필수 과정이다. 건강한 의미에서의 공격성은 아이의 자신감, 세상에 대한 모험정신, 그리고 꿈과 야심을 가지는 정신적 발달의 과정이다. 만일 아이가 자신감과 모험 그리고 꿈을 키워 나가는데 필요한 자기의 공격성 표현경험이 너무 벅차게 좌절될 경우, 아이는 건강한 의미에서의 자신감과 꿈을 가지는 정서적 성취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결국 자기 내면에는 늘 겁이 나고 두려워하면서도 때론 “과대성”이 느껴질 때에 자기도 모르게 다시 한번 공격성의 표현을 시도해 보게 된다. 코헛은 독일 나찌의 히틀러를 분석하면서 이런 입장을 재확인한다. Kohut, the humanities, p. 54. 91, 물론 이런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표현의 정도 혹은 파괴성 정도도 철저히 주관적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자아의 해체화과정 혹은 파편화과정으로서의 공격성에 대하여 코헛은 사람이 "자기경험의 통합the organization or the integration of self experiences"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자아의 다양한 경험을 통합하는 것이 실패하게 되면 자아가 파편화(fragmentation)된다고 한다. 이런 파편화의 경험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망가짐을 느끼게 하고 마치 살아있으나 죽은 것같은 느낌을 강요받는다고 한다. “공격성”은 바로 이런 “죽은 것 같은 느낌”에서 탈출하려는 부정적인 노력이다. 자아의 파편화 현상은 정신병리의 원인이지만, 동시에 인간 본능적 행동화의 직접적 동기가 된다. 코헛은 히틀러와 독일 나찌의 유태인 학살이 이런 동기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 독일인은 내면적으로는 피폐한 문화와 정신적으로는 생동감을 가지지 못했다. 이런 민족적 파편화 경험이 팽배할 때에 그 탈출구로서 유태인 학살이라는 공격성을 사용했다.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려는 병리적인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Ibid., p. 220.
결론적으로 코헛이 말하는 “인간의 공격성”은 세 가지 형태를 띤다. 하나는 “자존심이망가질 때에 폭발하는 형태”로서의 공격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적 과대성을 느낄 때에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모험정신에서 비롯된 공격행위”이다. 즉, 하나는 보복적 성격을 띠는 반면에 다른 하나는 자기 성숙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특별히 자기 성숙과정과 관련하여 사람들은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는 법이다”라는 말을 한다. 심리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도 아이들의 공격적인 행위, 곧 싸움은 아이들의 정서발달에 있어서 필수과정이라는 코헛의 입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보복적 성격으로서의 공격성에 대해서 사람들은 “지렁이도 건드리면 꿈틀한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미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아가 통합되지 못하고 (the failure of self-cohesion)하고 파편화될 때에 (fragmented self) 자아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위해 공격성이란 본능이 튀어나올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공격성은 주로 잔학한 범죄를 만들어 내고, 집단차원에서 보다 쉽게 표출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정서가 메마르고 느낌이 마비된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 정서발달 과정의 이해 - 깊은 우물파기의 이론 ]
코헛의 발달이론은 단계적이론(stages or epigenesis) 이론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우선 코헛은 사람의 심리발달이 단계적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최기 심리적 성취, 즉 구강기의 발달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그 다음 단계의 정신적 성취, 곧 항문기적 발달이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코헛은 심리발달은 어느 요소의 성취에 있다기 보다는 각 영역들(sectors)이 얼마나 깊이 있게 자리를 잡았는가에 더 큰 초점을 두고있다. 코헛은 사람의 심리발달은 요소적 (segmental) 이라기 보다는 영역적 (sectorial)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신적 성숙도는 각 영역이 얼마나 깊이있게 발달했느냐에 달려있다고 했다. 쉽게 말해서 얄팍한 심리발달과 심지가 깊은 심리발달의 차원을 이야기함으로써, 하나의 단계 위에 다른 수준의 단계가 올라서는 것이라는 (epigenesis) 프로이드와 에릭슨의 발달이론을 거부했다. Kout, the Humanities, p. 30. 심리발달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구강기, 항문기, 성기기, 등의 단계적 향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에릭슨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정서발달위에 또 다른 정서발달과업의 성취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심리발달은 일반적으로 유아적 수준과 성숙인의 수준 두 가지로 나뉘며, 사람은 세가지 영역에서의 깊이있는 발전이 더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여기서 세 가지 영역이란 물론 총애, 존경, 그리고 일체감의 영역이다. 삶속에서 이 세 가지 영역의 경험이 얼마나 깊이가 있느냐 아니면 얄팍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심리발달이 아직 유아적이냐 아니면 성숙하냐가 결정되는 것이지, 하나의 심리적 과업 (구강기 심리주제들)에서 다른 심리적 과업들( 항문기 심리주제들)로 지나가면서 다양한 부분적 (segmental) 요소들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존경과 관련해서 이 발달이론을 설명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코헛에 따르면 어느 위대한 대상을 존경하는 정도가 각 사람마다 다르다. 얄팍하게 존경하는 사람보다는 깊이있게 존경할 줄 아는 사람이 심리적으로 더욱 건강하고 성숙한 편이 된다. 예를 들어서 히틀러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존경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런 존경의 모습은 어찌 보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기의 내면적 소리를 외면하고 단지 세상의 외양만 보고 히틀러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얄팍한 수준의 존경을 표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코헛은 독일의 같은 상황에서 재거스태러라 이름하는 농부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 농부는 자기가 갖고 있는 정신적 가치관에 의해서 살았다. 그래서 유태인 학살이라는 히틀러의 방향에 대하여 위선적인 형태의 존경을 띠어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기 보다는 자기 내면의 기독교적 신앙의 가치관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용기있는 자세를 보였다. 이것은 대다수의 지성인들이 심리적으로 발전시킨 가치관의 영역이 얄팍했던 반면에 오스트리아의 농부 재거스트래러는 죽음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자기의 가치관을 깊이있게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코헛이 바라보는 심리발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프로이드는 자기성애autoerotism에서 자기도취주의narcissism를 경과하여 대상의 사랑object love에 이르는 것이 올바른 정서적 발달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때문에 대상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정서발달 차원에서 볼 때에 미성숙하고 자기의 육체나 경험에만 성적 에너지 리비도를 투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코헛은 이런 U자 튜부 이론을 신뢰하지 않는다. 정서발달은 자기에서 대상으로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사랑의 정신적 발달과 대상사랑의 정신적 발달이 독립적으로 진행된다고 믿었다. 아니, 자기 사랑에 충일한 사람이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기는 법이라는 논리를 소개한다. 이른바 자기 사랑과 대상 사랑의 독립적 발달이론이다. Kohut, the analysis of the self, p. 220.
때문에 정서발달과 관련하여 코헛은 셀프self의 심리적 구조가 확립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프로이드처럼 본능을 통제하여 문명적 에너지로 활용하는 능력이 정서발달의 목표가 아니다. 코헛은 자기 자신의 즐거워하며 참여할 수 있는 야망ambition과 그 야망을 현실적으로 끌고 가는 가치관values의 발달이 더 중요했다. 양극성 자아bipolar self 라고 이름한 이러한 정서발달은 핵심자아nuclear self라는 개념으로 더욱 확장되었는데, 나름대로의 꿈이 있고 그 꿈을 실현시키는 과정에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관과 이상을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서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부모로부터 총애를 경험하고 또한 존경도 경험할 때에 생긴다. 모든 아이들이 다 확고한 핵심자아를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직 유아기에 “정신적 산소의 경험”이 풍부한 아이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코헛은 성공적인 자아의 발달은 “변혁적 열매들transformations"을 맺는다고 했다. 여기서 변혁적 열매들이란 지혜wisdom, 이상ideals, 창의성creativity, 감정이입능력empathy, 유머감각humor 이며, 이들 다섯 가지의 덕목들은 셀프의 심리구조가 나름대로 발전되어 자리를 잡았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Kohut, the humanities, p. 69. 199. 그런데 이런 덕목들은 ”셀프오브젝트selfobject"라고 하는 정신적 산소의 경험이 있을 때에 서서히 발달되는데, 특별히 “최적의 좌절optimal frustration"의 과정을 거쳐서 그동안 외부의 정서적 지지의 대상 (부모나 그 밖의 의미있는 대상들)에 의해서 정서적 충전을 해 오던 사람이 이제는 그 정진적 지지기능이 내면화(transmuting internalization via optimal frustration)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가장 적절한 좌절의 경험 혹은 최적의 좌절optimal frustration"은 코헛의 셀프심리 정신분석학의 중요한 개념이다. 프로이드는 사람 안에 있는 동물적 본능이 억압되고 통제되어야 성숙한 사람의 인격을 발달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억압과 통제의 경험으로서의 ”좌절“을 정서발달의 필수과정으로 삼았다. 코헛은 ”좌절“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 경험이 가장 적절하고 견딜수 있는, 다른 말로 해서 수용하여 처리할 수 있는 정도의 좌절이 필요한 것이지 좌절 그 자체는 위험하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서 부모의 약점을 발견하고서는 좌절을 느끼는 자녀들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발견이 너무 어릴 때에 있어서 아이가 자기 통합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그것은 내면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충격적인 외상trauma가 될 수 있다. 반면에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에 부모가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관찰이 치명적이 아닌 ”최적의 좌절“ 경험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코헛은 이런 ”가장 적절하고 알맞으며 수용가능한 좌절의 경험 곧 optimal frustration“이 아이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성숙하도록 돕는다고 하였다. Kohut, the analysis of self, p.14, 64, 66, 107, 108, 115-116, 199; How does analysis cure?, p. 66, 67, 70, 91, 101; the humanities, p. 69; the Kohutian Seminars, p. 91.
따라서 정서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프로이드가 말한대로 본능을 통제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아의 관심을 억압하고 문명의 창조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코헛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핵심자아를 발전시켜서 꿈과 이상을 실현하고자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자 현재의 삶에 충실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꿈과 이상을 현실적으로 조정하는 능력은 “최적의 좌절”경험에서 비롯되며, 내면에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정서적 든든함이 세워진 사람이 바로 정서적인 발달을 성공적으로 한 사람인 것이다. 물론 성공적인 정서발달을 이루었다고 해서 “외부의 정서적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Kohut, the humanities, p. 262. 사람은 늘 주변 환경에서 정신적 산소의 경험을 해야 만이 자신의 성숙한 정서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 심리치료 과정의 이해 - 정신적 산소경험의 채널확보 ]
코헛에 따르면 심리치료가 정신적 재소화작업 (working through)이어야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정신적 재소화작업의 방법론에 있어서 프로이드가 주장하는 것처럼 환자의 전이와 방어기제에 대한 분석적 설명과 해석을 통한 통찰력 획득이 심리치료의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 해석 (interpretation)이라고 명명하는 이과정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특별히 자기애(narcissistic)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들의 경우 이런 통찰력 증대를 목적으로하는 해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이들 환자들은 반드시 코헛이 말하는 “정신적 산소의 경험“을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환자들이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총애, 존경, 그리고 일체감을 심도 있게 경험할 때에 그들이 서서히 자신들의 정신병리적 늪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주장하다. 이른바 통찰력을 통한 심리치료인가 아니면 긍정적 심리경험을 통한 심리치료인가 하는 점이 바로 프로이드와 코헛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실례를 하나 든다면, 대부분의 경우 환자들은 상담자를 이상화(idealization)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프로이드에 따르면 이 이상화의 경향은 환자 편에서의 전이이며 동시에 방어기제이다. 상담자를 이상화함으로써 자기자신의 정서적 취약점을 은폐하고 자기자신 만의 정서적 홀로서기를 회피하는 도구로 삼는다. 즉, 이상화는 정신병리의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지를 위한 환자 편에서의 방어기제로 이해된다. 그래서 프로이드를 비롯한 전통적 정신분석학 (the classical psychoanalysis) 입장에서는 환자의 상담자 이상화 현상을 곱게 쳐다보지 않는다. 환자가 실체를 제대로 봐야 하는데 그렇지 않음으로써 전이현상을 유지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있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코헛은 환자 편에서의 이상화는 물론 정신분석학 입장에서 보면 전이이고 방어기제이지만, 다른 차원에서 볼 때에 그것은 환자 입장에서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즉, 유아시절에 환자가 존경(idealizing selfobject)의 경험을 충분히 하지 못했을 때에 생기는 현상이기에 환자가 상담자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의 정서적 유지 (the narcissistic equilibrium)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코헛이 1971년 출판한 “the analysis of the self"의 중심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상담자는 환자 편에서의 이상화 (idealization)를 존경의 경험 (the idealizing selfobject)의 필요로 보아야 하며, 환자의 지각상태를 깨트리기 위해서 너무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여기서 영어의 한국어 번역이 가지는 위험이 잘 나타난다. 그동안 정신분석학 문헌의 한국어 번역은 대부분 idealization을 이상화라고 번역하고, 또한 idealizing 도 이상화라고 번역을 하였다. 그러나 코헛의 정신분석학에서는 idealizing selfobject 이라고 하는 개념이 단순히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이상화”와는 아주 다른 개념임을 알아야 한다.
필자는 idealizing을 존경 이라는 말로 번역한다. 그리고 idealization 은 이상화 혹은 우상화라는 말의 번역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 두 개념의 차이는 idealization 이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 하는 방어기제로서의 "우상화" 개념에 더 가깝고, idealizing은 코헛의 셀프심리 정신분석학의 의도를 충분히 살린 "존경"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상화"는 사람이 가지는 정신적인 정신병리현상으로 이해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존경"은 사람이 자기의 정서적 실존을 위해서 가지는 필수조건이라는 코헛의 주장을 고려할 때에 "이상화 나 우상화"로의 번역은 그의 본질적 사상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코헛의 관점에서 볼 때에 심리치료는 정신적 산소의 경험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환자 편에서 존경, 총애, 일체감의 경험이 이루어지도록 치료자는 지도해야 한다. 단순한 전이해석이나 전이신경증의 유도를 통한 통찰력 획득이 아니라, 정신분석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정서적인 경험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정서적인 경험을 통해서 환자는 1) 과거 자기의 과대성의 필요를 다시 한번 지각하고, 2) 치료자의 적절한 반응responsiveness을 통한 정신적 산소의 경험을 누리고, 3) 미완성이었던 셀프의 심리적 구조들(self, or the psychological structures)을 세워나간다. Kohut, How does analysis cure?, p. 103.
물론 여기서 주지해야 할 사실은 정신분석학적 심리치료는 “핵심자아nuclear self"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지는 못한다. 유아시절 가정환경을 통해서 세워진 그 핵심자아는 환자들의 경우 약하고 튼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풍요로움도 없다. 그런데 심리치료는 새로운 핵심자아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존재하는 유약한 ”핵심자아“를 강화시키는 힘은 있다. Ibid., 100.
아마도 집의 건축을 비유로 해서 설명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집을 지을 때에 제일 먼저 뼈대를 구축한다. 기둥들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코헛이 말하는 핵심자아nuclear self는 바로 이 기둥들을 의미한다. 집이 세워지기 위해서 가져야 할 중요한 구조적 장치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기둥이 놓여진 자리는 다 다르다. 기둥의 강도도 다르다. 그리고 그러한 기둥들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집의 모양도 다 다르다. 정신적으로 피폐한 사람은 마음의 기둥도 부실하고 무너지기 직전에 있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둥은 있으나 주변 벽이나 방구조 그리고 내부 치장이 전혀 안되어 있는 공사중단 상태의 집의 모양을 한 사람들도 있다. 심리치료는 바로 이미 있는 기둥을 튼튼히 하고, 주변의 벽이나 내부치장 등을 고객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지도록 도와주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은 코헛에 따르면 정신적 산소의 경험이 많아야 한다. 프로이드에게 있어서는 통찰력의 획득을 통한 환상에서 벗어남이 심리치료의 주된 목적이었지만, 코헛에게 있어서는 바로 정신적 산소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주변적 가능성을 풍요롭게 하는데 노력을 한다. 곧, 정신적 산소 경험의 채널을 확보하는 것이 바로 심리치료의 중심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경험들이 원시적archaic할 수 있다. 그러나 점점 치료의 효과가 일어나고 결과가 좋아짐에 따라 성숙한 수준의 정신적 산소경험the mature level of selfobject experiences을 통한 자기의 정서안정을 이룩한다. 그리고 이런 정서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정서적지지 채널을 많이 확보해 놓는 것이 치료의 최종적인 목적이 된다.
[ 도덕발달과정의 이해 - 최적의 좌절을 통한 변형적 내면화 ]
코헛은 사람의 가치관과 이상, 곧 도덕 발달과 관련하여 "최적의 좌절을 통한 변형적 내면화 transmutign internalization vis optimal frustration"의 개념을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아이가 부모의 이상과 가치관을 자기의 내면으로 가져오는 과정은 단순히 부모의 통제경험이나 자기 욕망의 포기를 위한 이상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가 그동안 존경하고 따랐던 부모한테서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 아이의 성장발달 상황에서 적절하게 코헛은 이것과 관련하여 “phase appropriate" 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이 말은 ”적절한 국면을 맞이하여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최적의 좌절optimal frustration"과 일맥상통하며, 바로 이런 적절한 국면을 맞이한 phase appropriate 좌절frustration을 의미한다. 부모의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는데서 비롯된다. 즉, 정상적인 아이는 부모가 위대하다고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아이가 정서적으로 어느 정도 발전되고 건강해지면서 서서히 부모가 완전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상과 기대에 못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좌절이 아이의 정서발달 국면과 관련하여 적절할 경우 이 좌절은 아이에게 커다란 해를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최적의 좌절"로서 경험되어 그동안 경험을 토대로 자기의 가슴 안에 묻어 두었던 "이상화된 부모의 원형 idealized parental image"을 서서히 자기의 심리 안으로 "내면화 internalization"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에 아이는 비로소 건강한 가치관과 이상을 가지게 되는데, 이런 건강한 가치관과 이상의 확립은 철저히 아이가 부모에게서 가지는 존경의 산소경험 (idealizing selfobject)에 달려 있는 것이지, 아이가 경험하는 통제에 따른 것이 아니다. 즉, 도덕발달은 꾸지람과 처벌 그리고 통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오히려 따뜻하고 존경스러운 경험이 도덕발달의 밑바탕을 이루며, 이런 경험은 바로 정신적 산소경험의 핵심 영역으로 이해되고 있다.
출처.
프로이드와 코헛 : 핵심 개념의 비교연구
-- 현대정신분석학회 발표 논문(2002.5.11)
김병훈박사 (호서대학교:byhkim@office.hoseo.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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