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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회심론

칼빈의 회심론
이양호 교수
제19강 회심론 (1)
켄달은 그의 저작 「칼빈과 1649년까지 영국의 칼빈주의」에서 칼빈의 회심론에 관하여 새로운 해석을 피력하였다. 켄달은 칼빈이 회심을 하나님이 인간 안에 새로운 의지를 창조해 주는 것으로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켄달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회심은 초자연적(supernatural)이다. 그것은 본성(nature)을 넘어서 있다. 하나님은 본성과 협동하지 않는다. 그는 본성을 새 의지로 대체하며 본성을 말살함으로써 이 일을 행한다. 하나님은 본성 안에 이미 있는 의지를 돕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에게 본성 밖에 새 의지를 준다. 본성, 혹은 육, 혹은 의지가 단순히 ‘강화’되는 것이 아니다. 회심은 전적으로 새 의지를 뜻한다. 우리의 본성적 의지는 폐기된다-말살된다.
반면에 헬름은 켄달의 주장을 비판하려고 쓴 그의 저작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에서 칼빈은 회심을 하나님이 인간 안에 새 의지를 창조해 주는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헬름은 이렇게 말하였다.
환언하면 칼빈의 견해는 회심에서 한 사람의 의지가 윤리적, 영적 방향 전환을 경험하나 그의 옛 의지가 새 의지에 의해 문자대로 대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의지가 개조되고 새 방향으로 향한다. 켄달은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본성 안에 이미 있는 의지를 돕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에게 본성 밖에 새 의지를 준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부당하다. 오히려 하나님이 회심에 있어서 행하는 것은 한 인간의 의지에 새 방향, 즉 신적 은총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 방향을 주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켄달과 헬름의 주장들을 중심으로 칼빈의 회심론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이 하나님의 행위인가 인간의 행위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두 번째로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이 돌발적인 것인가 아니면 점진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세 번째로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이 새 의지의 창조인가 아니면 의지의 변화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와 회심 혹은 중생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켄달은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하나님의 행위이였다고 보았다. “칼빈의 회심론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⑴ 본성적 의지가 말살되고 ⑵ 하나님이 자신으로부터 선한 의지를 그 대신 대체시킨다는 것이다. 칼빈 자신이 ‘돌연한 회심’을 경험하였다고 주장한다”고 켄달은 말하였다. 또한 켄달은 파커가 칼빈이 말한 돌연한 회심(subita conversione)을 ‘예기치 않은 회심’이라고 해석한 것은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의 소여적이고 수동적인 본질을 더욱 부연해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켄달은 자기의 주장의 근거로 「기독교 강요」 제2권 제32장 제6절의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정의를 향한 열정으로 회심시킬 때 돌이 육으로 변모된다면 우리 자신의 의지에 속한 것은 무엇이나 말살된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로부터 온다. 나는 의지가 말살된다고 말한다(dico voluntatem aboleri).
그러나 켄달의 이런 주장에 대해 헬름은 켄달이 인용한 구절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을 더 인용하면서 켄달을 비판하였다.
일어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로부터 온다. 나는 의지가 말살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것이 의지인 한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회심에 있어서 그의 본래적 본성에 속한 것은 전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그것이 새롭게 창조된다고 말한다. 이는 의지가 이제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악한 의지에서 선한 의지로 변화된다는 뜻이다.
헬름은 이렇게 칼빈의 말을 인용하고 난 다음 “무엇이 더 분명할 수 있는가? 마치 칼빈이 켄달이 제시한 잘못된 해석을 예기하고 ‘그의 본래적 본성에 속한 것은 전적으로 남는다’라고 대답한 것 같다”고 말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이 하나님의 행위인가 인간의 행위인가 하는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먼저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 같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회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참으로 나는 하나님을 향한 회심의 전체는 “회개”라는 용어 아래 이해되며 신앙은 회심의 중요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무슨 의미로 이것이 그러한지는 그것의 힘과 본질이 설명될 때 매우 쉽게 나타날 것이다. “회개”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는 회심 혹은 돌아섬으로부터 유래되며 헬라어는 마음이나 의도의 변화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일 자체가 두 단어들의 어원에 일치한다. 그 의미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떠나서 하나님에게로 향하며 우리의 이전의 정신을 벗어버리고 새 것을 입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내 판단으로는 회개는 다음과 같이 잘 정의될 수 있을 것 같다. 즉,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전향, 즉 하나님에 대한 순수하고 진지한 두려움으로부터 일어나는 전향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육과 옛 사람의 죽임과 성령의 소생으로 이루어진다.
회심에 대한 이 정의에서 첫 번째로 지적된 것은 회심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삶의 진실한 전향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외적 행위에서 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에 있어서 변형을 요구한다.” 옛 본성을 벗어버릴 때만 그것에 맞는 행위의 열매들이 산출된다고 칼빈은 주장하였다. 두 번째로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두려움에서 나온다.” 죄인의 지성이 회개로 향하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생각으로 자극을 받아야 한다. 세 번째로 회개는 “육의 죽임과 영의 살림”이다. 예언자들이 인간에게 악으로부터 부를 때 그들은 악과 사악으로 가득찬 전체 육의 파괴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살림은 신앙에서 오는 위로를 넘어서서 “거룩하고 헌신적 방식으로 살려는 욕망을 뜻한다”고 칼빈은 말하였다.
회심에 대한 이상의 설명에서는 돌아서고 두려워하고 욕망하는 인간의 역할이 강조된다. 그러나 칼빈은 예레미야 주석에서 “우리는 회개는 성령의 일이라고 결론을 내린다”고 말하였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을 비판하였다.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이 회개에 대해 말할 때 인간은 그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해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이 얼마나 눈먼 자들인지를 안다. 이 점에 오늘날 그들에 대한 우리의 가장 큰 논쟁이 걸려 있다.” 칼빈은 예레미야 31:19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라는 말씀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의미는 인간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지성을 조명하고 그들의 심정을 변화시키기까지 결코 죄에 대한 참된 증오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언자가 말하는 돌이킴 혹은 회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성과 심정의 갱신이다.” 또한 칼빈은 예레미야 31:18 주석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예언자가 ‘나를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라고 말할 때 이것을 증거한다. 그는 인간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들의 죄들을 상기시켜 줄 때 참으로 돌아서나 그들이 그들 자신의 힘으로 이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고유한 일이기 때문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이 하나님의 행위인가 인간의 행위인가? 칼빈의 본문들을 보면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인간의 일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협동설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활동이 중심적이고 인간의 활동은 주변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20강 회심론 (2)
두 번째로 다룰 문제는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돌발적인가 아니면 점진적인가 하는 것이다. 켄달은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에 회심은 돌발적인 것이었다고 보았다.
반면에 부스마는 칼빈이 회심을 돌연한 사건으로보다는 점진적인 과정으로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은 항상 회심의 돌연성보다 점진성을 강조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진보를 이루는 어려움을 강조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조금씩 단계적으로 회심된다’고 하였다”고 부스마는 말하였다. 또한 부스마는 칼빈이 회심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아마 요점에 좀더 가까운 것은 칼빈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구원의 방식에 관한 그의 많은 논의들 중에서 정확한 사건으로서의 ‘회심’에 의미를 거의 혹은 전혀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라고 부스마는 말하였다. 부스마는 칼빈의 사도행전 9:5 주석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 길들인 바울을 만나지만 그는 아직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라는 말씀에 근거를 두면서 칼빈은 “심지어 바울의 회심의 중요성도 최소화하는 경향을 가졌다”고 말하였다. 한편, 부스마는 칼빈이 자신의 돌연한 회심을 주장한 시편 주석 서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칼빈의 생애에 있어서 이 모델에 일치하는 ‘회심’에 대한 증거는 하찮은 것이다. 그것은 1557년에 쓴 시편 주석 서문에 있는 단 한 구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 그것은 그 사건이 생긴 것으로 여겨지는 때로부터 거의 30년 후에 쓴 것이며 이 긴 기간 동안 그는 전에 결코 그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부스마가 주장한 것처럼 칼빈은 여러 곳에서 회심의 점진성, 일생 동안의 회개를 주장한 것이 사실이다. 칼빈은 예레미야 주석에서 “내가 이미 말한 것처럼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여러 단계들에 의해 하나님에게로 향한다. 왜냐하면 회개는 그것의 진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재세례파와 예수회를 비판하였다. “나는 재세례파들 중 많은 사람들, 특히 영적으로 여겨진다고 놀랍게 의기양양해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동반자들인 예수회와 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분명히 저 경솔한 정신은 그런 열매들을 며칠간의 회개로 제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회개는 그의 전생애에 지속되어야 한다.”
이처럼 칼빈이 회심의 점진적인 성격과 일생 동안의 회개를 주장하였지만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 있는 자서전적인 글에서 ‘돌연한 회심’을 주장한 것도 사실이다. 칼빈은 자신의 돌연한 회심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아직 매우 어린 소년이었을 때 아버지는 나를 신학 공부를 하도록 예정해 두었다. 그러나 후에 법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보통 수입이 높은 것을 알고 돌연히 그 목표를 바꾸엇다. 그래서 나는 철학 공부를 그만두고 법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추인 섭리에 의해 마침내 내 과정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처음에 나는 교황청의 미신에 너무 완고하게 몰두하여 진창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쉽게 헤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돌연한 회심에 의해, 어린 나이에 비해 그런 문제들에 완고한 나의 마음을 진압하고 교육받을 수 있는 형태로 변화시켰다.
칼빈의 이 자서전적 언급을 보면 적어도 칼빈 자신에게 있어서 회심은 하나님의 행위였으며 또한 돌연한 회심이었음이 분명한 것 같다. 따라서 칼빈의 본문들에 대해 공정하게 판단한다면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돌연적인 동시에 점진적이었다고 말할 수박에 없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칼빈은 회개와 중생과 성화를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돌연적인 동시에 점진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그 다음으로 다룰 문제는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의지의 창조인가 의지의 변화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켄달은 칼빈이 회심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옛 의지를 말살하고 새 의지를 창조한다고 보았다고 주장하였으나, 헬름은 칼빈이 의지의 변화, 즉 악한 의지가 선한 의지로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우선 칼빈은 여러 곳에서 새 의지의 창조를 주장하는 표현을 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인간 의지가 전적으로 변형되고 갱신되는데, 누가 인간 의지가 효과적으로 선의 선택을 열망하도록 인간 의지의 약함이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 강화된다고 말할 것인가?” 여기서 칼빈은 인간의 약한 의지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강화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또한 칼빈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정의를 향한 열정으로 회심시킬 때 돌이 육신으로 변모된다면 우리 자신의 의지에 속한 것은 무엇이나 말살된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로부터 온다. 나는 의지가 말살된다고 말한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칼빈은 우리 자신의 의지가 말살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칼빈은 “⑴ 주님은 우리의 악한 의지를 교정한다. 혹은 차라리 그것을 멸절시킨다. ⑵ 그는 자신으로부터 선한 의지로 그것을 대체시킨다”고 말하였다. 여기서도 칼빈은 악한 의지를 교정한다는 표현보다 멸절시킨다는 표현을 더 낫게 생각하였으며, 그리고 악한 의지를 선한 의지로 대체시킨다고 하였다. 또한 칼빈은 “여기서 그는 분명히 새로운 창조를 예찬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공통적 본성에 속한 모든 것을 쓸어 버린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칼빈은 새로운 창조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반면에 칼빈은 여러 곳에서 의지의 변화를 주장하는 표현을 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나는 의지가 말살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것이 의지인 한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회심에 있어서 그의 본래적 본성에 속한 것은 전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그것이 새롭게 창조된다고 말한다. 이는 의지가 이제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악한 의지에서 선한 의지로 변화된다는 뜻이다”라고 칼빈은 말하였다. 이 구절을 보면 의지는 그대로 있고 의지의 성향이 악한 데서 선한 데로 변화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 다른 곳에서 의지가 은총에 의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데서 선한 데로 변화되며, 그것이 선할 때 도움을 받는다고 말한다”고 말하였다.
한편 칼빈은 한 곳에서 의지의 교정과 의지의 창조를 동시에 언급하였다. “우리는 어거스틴이 은총은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회복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매우 참되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음의 두 관념들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의지는 타락과 부패가 교정되어 의의 참된 지배로 향할 때 회복된다고 한다. 동시에 새 의지가 인간 안에 창조된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것이 매우 부패되고 타락되었으므로 그는 그것이 그 안에 새 본성을 입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칼빈은 말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의지의 교정인가 아니면 새 의지의 창조인가 하는 문제는 의지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살펴볼 때 해답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칼빈은 의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인간 영혼은 두 기능들… 즉 오성과 의지로 구성된다. 나아가서 오성의 직임은 대상들 사이를 구별하여 승인할 대상인가 부정할 대상인가를 정한다. 의지의 직임은 오성이 좋다고 선언하는 것을 선택하고 따르고 오성이 부정하는 것을 배격하고 회피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칼빈에게 있어서는 의지가 실체가 아니라 기능이었다. 이런 점에서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이 새 의지의 창조냐 의지의변화냐 하는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의지는 실체가 아니라 기능이기 때문에 새로운 의지가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의지가 변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21강 회심론 (3)
마지막으로 다루려고 하는 것은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와 회심은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회심은 중생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중생은 성화와 같은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이것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우선 칼빈은 회개와 중생을 동일시하였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나는 회개를 중생으로 해석한다. 중생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인데, 그 형상은 아담의 범죄를 통해 이그러지고 말살된 것이다”라고 칼빈은 말하였다.
또한 칼빈은 중생과 성화를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 중생에 의해 그리스도의 유익을 통해 하나님의 의 속으로 회복된다.… 그리고 참으로 이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 해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속적이고 그리고 때로는 늦은 진전을 통해 하나님이 그의 선택자 안에서 육의 부패를 씻고 그들을 죄로부터 정화하며 그들을 자신에게 성전으로 봉헌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지성을 참된 순결로 갱신하여 그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회개를 실천하고 이 전쟁이 죽음에서만 끝날 것임을 알게 한다”라고 칼빈은 말하였다.
이런 점에서 칼빈과 웨슬리는 달랐다. 칼빈은 중생 안에 성화를 포함시킨 반면 웨슬리는 중생과 성화를 출생과 성장의 관계로 구별하였다. 웨슬리는 그의 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새로운 탄생은 성화와 동일하지 않다. 참으로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당연하게 여겨진다. 특히 한 저명한 저술가가 그리스도인의 중생의 본질과 근거들에 관한 그의 최근의 논저에서 이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 논저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반론들을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다음은 명백한 것이다. 이 논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생을 점진적인 일, 즉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처음 전향한 시간 이후 늦은 속도로 영혼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성화에 대해서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생, 즉 새로운 출생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다. 중생은 성화의 일부이지 전체가 아니다. 중생은 성화에 들어가는 문, 그것에 들어가는 입구이다.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우리의 성화, 우리의 내적, 외적 거룩함은 시작된다. 그 후 우리는 점진적으로 “우리의 머리인 그에게까지 자라도록” 되어 있다. 사도의 이 표현은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예찬할 만하게 밝혀주며, 그리고 나아가서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있는 정확한 유비를 지적해 준다. 한 아기는 여인에게서 한 순간 혹은 적어도 매우 짧은 시간에 태어난다. 그 후 그는 어른의 신장에 이르기까지 점차 서서히 성장한다. 마찬가지로 한 아이가 하나님에게서 짧은 시간-한 순간이 아니라고 한다면-에 태어난다. 그러나 그는 그 후 늦은 속도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장의 분량에까지 자란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연적 출생과 우리의 성장 사이에 있는 동일한 관계가 우리의 새로운 출생과 우리의 성화 사이에도 있다.
칭의와 중생의 관계에 대해 칼빈은 이 둘이 동일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분리되는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 우선 칼빈은 칭의와 중생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구별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칭의와 중생을 동일시한 오지안더(Osiander)를 비판하였다. “오지안더는 중생의 저 선물과 이 값없는 용납을 혼합하고 그것들을 하나요 동일하다고 주장한다”고 칼빈은 말하였다. 칼빈은 칭의와 중생은 분리되지 않지만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칭의의 은총은 중생과 분리되지 않으나 그것들은 구별된다. 죄의 흔적들이 의인들 안에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이 경험에 의해 매우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칭의는 삶의 새로움을 향한 개혁과는 전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롬 6:4 참조]. 하나님은 그의 선택자 안에서 이 두 번째점을 시작하고 그 안에서 일생을 통해 점진적으로 때로는 천천히 진보시키므로 그들은 항상 그의 심판대 앞에서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칼빈은 칭의론에 있어서 의의 부여가 아니라 의의 전가임을 분명히 주장하였다. 칼빈은 “우리는 신앙만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값없는 의를 얻는다”라고 말하였으며, 칭의는 “하나님이 그의 사랑 속에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들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칼빈은 오지안더가 "justify"를 "to make righteous"로 설명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칼빈은 오지안더가 “본질적 의”라고 하는 관념을 주장하여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그의 본질과 그의 성질의 주입에 의해 본질적으로 의롭다”고 주장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오지안더는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값없는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이며, 의는 값없는 전가가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본질이 불어넣는 거룩함과 의로움”이라고 하였다고 칼빈은 비판하였다. 칼빈은 오지안더의 이런 주장에 대해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혼합하는 것”이라고 한 마디로 비판하였다.
칼빈은 오지안더의 주장에 반해 칭의와 중생을 구별하였지만, 그러나 칼빈은 칭의와 중생을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삶의 실제적 거룩함은 의의 값없는 전가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칼빈은 말하였다. 또한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지혜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전 1:30].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동시에 성화하지 않고 아무도 의롭다 하지 않는다. 이 유익들은 영원하고 분리할 수 없는 띠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그가 그의 지혜로 조명한 자들을 그가 구원한다. 그가 구원한 자들을 그가 의롭다 한다. 그가 의롭다 한 자들을 그가 성화한다.” 또한 칼빈은 “그리스도가 부분들로 나누어질 수 없듯이 우리가 그 안에서 인식하는 이 두 가지, 즉 의와 성화는 함께 결합되어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칼빈은 칭의와 중생의 관계를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하였다. “우리는 행함 없이 의롭다 함을 받지 않지만 행함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참여에 있어서 성화는 의와 마찬가지로 포함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오지안더를 비판하면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혼합에 대해서는 반대하였지만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은 주장하였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머리와 지체들의 저 연합, 우리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내주-요컨대 저 신비적 연합-는 우리가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들 안에서 그의 참여자가 되게 한다. 우리는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우리 밖 멀리서 관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그를 입고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요컨대 그가 우리를 그와 하나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마치 칼케돈 신조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는 것이 아니라 연합되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칼빈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혼합을 주장하는 것은 비판하였지만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은 주장하였다.
여기서 제기하였던 첫 번째 질문은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하나님의 일이었는가 아니면 인간의 일이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칼빈의 본문들을 고찰해 보면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인간의 일이었으나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진행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고의 두 번째 질문은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돌발적인 것이었는가 아니면 점진적인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자신의 회심에 대해서는 돌발적인 것이었다고 말하였으나, 그러나 칼빈의 본문의 여러 곳들에서는 회심이 점진적인 것임을 주장하였다. 칼빈은 중생 안에 회심, 회개, 신생, 성화를 모두 포함시키기 때문에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돌발적인 동시에 점진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본고에서 다룬 세 번째 문제는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새 의지의 창조였는가 아니면 의지의 변화였는가 하는 것이었다. 칼빈의 본문들을 보면 의지의 창조라는 표현과 의지의 교정이라는 표현이 다 나타나며 칼빈 자신은 이 둘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칼빈에게 있어서 의지는 실체가 아니라 기능이었기 때문에 새 의지의 창조와 의지의 교정은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 다룬 마지막 문제는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와 중생은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칼빈은 칭의와 중생을 동일시한 오지안더를 비판하면서 이 둘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둘은 영원하고 분리할 수 없는 띠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다 함과 동시에 성화시킨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