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공부하고 묵상하다 보니 개혁파 신학이 말하는 좁은 의미의 하나님 형상 곧, 참 지식과 의와 거룩함은 사람의 이성, 의지, 욕구, 곧 지정의와 관련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작성자인 토마스 빈센트 역시 참 지식, 의, 거룩함이 사람의 지성, 의지, 감정에 담긴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지의정은 진선미라는 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덕이란 아퀴나스에 의하면 습관이고 이성과 의지라는 영혼의 기능이 진과 선의 덕으로 나타나고 욕망 혹은 정서라는 몸의 기능이에서 미라는 덕이 나타난다.
진선미가 자연적인 덕이라면 믿음 사랑 소망은 초자연적인 덕, 곧 습관인데 진선미가 노력과 수고에 의해서 획득되는 습관이라면 믿음 사랑 소망은 초자연적으로 주입되는 습관이며 이 주입된 습관도 길러지는데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길러지고 함양이 된다.
믿음은 이성을 사용하여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습관을 말하고 사랑은 의지를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행하는 습관을 말하며 소망은 거룩함이라는 욕망을 따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습관을 말한다.
이런 초자연적인 습관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형상에 기대어 있으며 골 3:10과 엡 4:24은 모두 문맥에서 그리스도의 형상과 관련이 있다. 이것을 전통적으로 원죄 개념의 반대인 "원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해왔다.
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에베소서와 골로새가 거기에까지 자라라고 말하지 이것이 우리 안에 주입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반펠라기즘은 태초에 창조되었던 아담에게 부가적인 은사로 주어졌던 이 원의가 주입되었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원의라는 용어를 쓰니까 하나님의 형상과 연관짓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말한다.
그런데 종교개혁 전통은 이 의가 주입된다는 것을 반대하고 이것은 이 형상이 곧 그리스도 안에만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물론 차이점은 존재한다.
그리스도가 얻으신 의는 획득된 것이며 이 의의 획득이라는 표현이 함의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얻든 덕 곧, 참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 온전하게 자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얻으신 덕이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 덕과 능력을 우리 것처럼 전용할 수 있는 습관을 우리 안에 심으셨다. 그리고 그 습관을 통해서 우리 이성과 의지와 욕망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지식과 의와 거룩함에까지 자라게 하시는 것이다.
이 과정에 사용되는 것이 은혜의 수단이며 이를 통해 초자연적인 습관인 믿음, 사랑, 소망의 덕과 자연적인 습관인 진선미의 덕이 형성된다. 특히 자연적인 습관인 진선미의 덕은 믿음, 사랑, 소망에 의해서 창조의 원리를 참되게 반영하여 나타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