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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환대의 신학적 의미

오늘 문득, 이 시대가 혐오보다는 환대를 배제보다는 포용을 강조하는 것은 왜 일까 생각해봤습니다. 랍 벨(Rob Bell)이 사랑을 이긴다(Love Wins: A Book About Heaven, Hell, and the Fate of Every Person Who Ever Lived)를 저술하면서 혐오의 메타포라 할 수 있는 지옥을 거부하는 것도 이런 풍조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시대는 긍정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 사견에는 아마도 이 시대가 그 마음에서 하나님을 지웠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성경, 특히 시편에서 의인은 하나님을 애착하는 사람으로만 묘사되지 않고 악인을 멸시하는 자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애착과 혐오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제해지자 우리 마음의 사랑과 미움의 추동은 한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근데 특이한 점은 사랑이 강조되면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에서 멀어지더라는 겁니다. 사랑은 미움을 견딜 때 비로소 사랑인데 우리 삶에서 혐오를 지워내고 나자 오히려 그 사랑이 격조를 잃어버린 것이죠. 하나님을 지우고 나니 우리 마음에 혐오나 배제를 담아낼 그릇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어린 시절 큰 종기를 앓은 적이 있습니다. 여전히 왼 팔에 그 흉터가 남아 있죠. 종기에 고약을 붙였는데 고약은 종기를 가라앉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삯히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충분히 삯았을 때, 뿌리 채 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죠. 삶은 고통을 동원하고 동반합니다. 미움이나 혐오를 동반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으로 기능할 수 없습니다.

관계가 어설푸면 칭찬을 남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은 그 관계가 깊지 못하기 때문에 부부처럼 깊은 맛을 내지 못하고 서로에게 좋은 말만 해대기 바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관계가 깊어질 수 없는 것이죠. 고통과 미움이 동반되지 않는 사랑은 균형을 맞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배제된 세계에서 사랑과 환대, 포용은 그렇게 어설픈 칭찬이나 남발해대는 관계처럼 추가 기울어 제대로 된 환대와 평화를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온 뒤 땅의 굳어지듯이 관계는 미움과 혐오를 먹고 자랍니다. 충분히 미워해보지 못한 사람은 진짜 사랑을 모르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