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복음
노승수 목사
우리 주변에는 뒤틀린 복음이 많이 있다. 조작된 진리들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되면 만사가 잘 풀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고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된 신자는 세상의 악한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다. 문제없는 삶에 대한 약속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듣는다. 하나님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지니처럼 우리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뒤틀린 복음이요, 우리에겐 해로운 것이다. 기적은 있지만 모든 문제를 만사형통하게 하시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를 그분을 더 닮도록 하는데 사용된다. 우리 인생은 잘 풀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고난이 있고 고난을 사용하신다. 시험이 있고 시험을 주신다. 시련이 있고 시련을 하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세상을 편리하게 살도록 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를 천국 백성 답게 만드는데 있다. 특히 우리의 인격을 그렇게 만드는데 있다.
이 과정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기도 한다. 전도서 기자는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8:14) 고 말한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지만 그것은 이 세상에만 한정지으면 때론 정반대의 결과를 거두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악한 일을 하고 잘 사는 군사 독재의 잔재들이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가? 반대로 나라를 위해 투신하였던 독립투사들의 자녀들은 얼마나 비참하게 사는 사람이 또한 많은가?
세상은 공평치 못한 곳이다. 하나님이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은 이 세상에 국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 전체를 통틀어 말씀하시는 것이다. 보이는 세상에서는 불공평해 보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영적 세계가 있다. 인생은 반드시 죽는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죽은 자들 중에 하나님의 심판정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믿는 자는 믿음으로 인한 상을, 불신자는 불신으로 인한 형벌을 겪게 될 것이다. 악인은 반드시 심판하시고, 믿는 자녀들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신다(마 5:12, 히11:6). 이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문제없는 삶을 약속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로의 도피를 부추기는 것이다. 삶은 문제 투성이인데, 삶을 있는 그대로 주목하여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치 못하도록 한다. 종교 중독은 알콜 중독과 다르지 않다. 성중독과도 다르지 않다. 그가 아무리 신앙적 언어를 쏟아 내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나 자주 교회에서의 삶과 그들의 일상이 다른 사람을 자주 만나는가? 그들은 종교를 알콜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사람들에게 복음이 될 수 없다.
유물론자들이 "종교는 아편이다"고 말하는 것은 웃어 넘겨버릴 이야기가 아니라 귀기울려 들어야 할 이야기 이다. 우리가 참된 복음을 선포하지 못한다면, 우리 주변은 종교적 퇴행을 경험하는 위험천만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만들어 가게 된다. 물론 교회는 병자들의 모임이며, 상처입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교회가 병원이 되어야지 세균 배양실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참된 영성과 복음은 우리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실력이다.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시력이 있어야 한다. 고난 중에도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소원을 이루시지 않고 거절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어야 한다. 나에게 때론 등돌리시는 하나님과도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전방위 가운데 함께 하셔서 우리를 종국적으로 성숙케 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내용으로 십자가와 부활이 선포되어야 한다. 십자가는 주님만 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져야할 것이라는 것이 선포되어야 한다. 자기가 부인되고 좁을 길로 가야한다는 것이 선포되어야 한다. 우리 인식의 틀에 들어오는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다. 왜? 우리 인식보다 작은 분이기 때문이다. 무한자는 유한자가 다 담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다 알지 못하는 부분은 늘 신비로 남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이다. 그럼에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참된 믿음이며 그 믿음이 생기도록 복음이 선포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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