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속한 자
노승수 목사
고전 3:1-3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십자가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깨닫고 믿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사실만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육신의 속한 자라는 제목의 설교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처음 신앙이 들어가게 될 때, 이 육신의 일들을 인해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육신의 열매를 해결하기 위해 육신의 방법들을 동원해서 통제해보려 하지만 실패하고 양심의 고통을 힘들어 하다가 결국 성장을 멈추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대부분은 육체의 열매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체의 열매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육체 자체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보면, 바울은 육신의 일을 열거한 후(갈5:19-21)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선언합니다(갈5:24). 그러나 신자들은 여전히 육신의 일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육신의 갖가지 죄악을 극복하려하고 오늘의 분냄, 내일의 시기, 모레의 다툼에 마음을 씁니다. 이렇게 열매에만 관심을 가지면 그에게 결코 승리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육체의 일에 관심이 없고 육체 자체에 오히려 관심을 가지십니다. 예를 들면, 나무가 죽으면 그 나무가 열매를 맺을 것을 것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들은 뿌리에 해당하는 육체를 다루는 일을 망각합니다. 그리고는 열매에 불과한 죄를 처리하기 위해 갖가지 계획을 세우기에 바쁩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죄를 처분하기도 전에 다른 죄가 튀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서에서 마 7:17-19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나무가 그러하면 당연히 그런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인 나무를 다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열매가 아닌 나무 즉, 육신의 뿌리 곧 육신 자체를 멸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의미는 이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곧 육신에 속한 자는 십자가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신자의 옛 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 더 이상 육체에 종노릇 하지 않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정리해서 믿음의 내용으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십자가위에서 피흘리심으로 죽으셨다. 둘째, 죄인 역시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더 이상 육체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 사실이 아담이 누렸던 피조세계에 대한 인간 본연의 통치권을 회복케 해줍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따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관계를 맺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얼마나 신령한가? 주를 위해 무슨 봉사를 했는가? 죄에서 해방되었는가? 정과 욕심을 극복하고 거룩해졌는가?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거듭났는가? 아닌가?의 문제이며 내가 주의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만약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이 주의 것이며 거듭난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육신의 열매로 인한 고통이나 괴로움과 상관 없이 여러분과 저는 이미 십자가에 내 육체를 못 박은 것입니다.
이 말은 못 박을 예정이라든지 혹은 못 박는 중에 있다든지 가 아닙니다. 분명히 못박혔다는 것입니다. 언제요? 2000년 전 예수님이 골고다 산상에서 못 박히실 그때에 그와 함께 우리도 이미 못박혔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이미 완성된 구원 사업에 근거하는 것이며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입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일어나지요? 아니 나는 아직 죄를 짓는데 나는 죄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데? 이건 어떻게 된건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내 성질이 그대로 있는데" 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대답하십니다. 우리는 "정과 욕심이 아직 강세를 보이는데" 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대답하십니다.
지금 잠깐 동안 자신의 경험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귀우려 봅시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모두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것이 완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 대신 매일 자신의 상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실제 경험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경험을 무시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육체가 못 박혔다고 선언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너희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하시면 그러면 우리는 "아멘! 실제로 나의 육체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고린도의 성도들은 음란과 시기와 분쟁과 분리와 당짓는 것 등의 죄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누가 보나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이들을 거침없이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누가 보나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의심할 여지 없이 긍정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성경은 한 번도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저 우리가 개인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앞서 본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보겠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고린도 교회는 주 예수와 함께 그들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구원의 첫 단계는 육체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렇게 다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시인하는 것이며, 이것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의 이루신 사실을 그저 믿는 것입니다. 이런 걸 믿음이라고 하지요. 히브리서에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할 때, 이 실상이 바로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에 대해서요. 육체에 대해서요. 내 경험은 계속 육신의 살아 있음을 말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경험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육신이 이미 십자가에서 못 박혔다는 것을 시인하는 문제에서 확고하다면, 나아가서 실제적으로 육신을 다룰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이며 우리가 이 일이 무엇인가를 첨가하거나 빼거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가 하신 일을 시인함으로 육체에 못박혔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육신의 죽음 곧 죄 죽임의 문제를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함께 못박히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단계입니다.
그리고 나면 십자가의 못박힘이 개인적 체험으로 만드는 실제적 기반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객관적 구원의 사역을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주관적 구원의 사역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7:5-6을 보겠습니다.
(롬 7:5-6)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이 사실 때문에 육신은 우리를 더 이상 주관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경험의 문제로, 감정의 문제로 시선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우리가 그 하나님의 완전한 일을 경험하는 것은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골 3:3-5)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이 경험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3절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실제 위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과거형으로 완료형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5절은 현재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실제의 경험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들은 육신의 경험만을 강조하여 그들의 육신을 죽이려고 시도합니다. 이런 경우 육신 그 때마다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육신을 죽이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육신을 죽은 것으로 대하지 않는 것인데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금욕주의나 은사주의입니다. 또 어떤이들은 그들의육신이 십자가 상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시인합니다. 주님의 죽음에 동참했기 때문에 육이 파괴되었고 이제 자신은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기만입니다. 이런 미혹의 대표적인 예가 구원파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사람은 육이 죽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간음도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어찌 진리 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에 대한 실제적 경험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모든 잘 못된 것입니다.
육신을 죽이려면, 먼저 내가 주님의 죽음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확고히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 그것을 안 후에 실제로 육신을 죽여야 합니다. 이 두가지는 병행되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 안에서 육신을 죽이라는 말의 의미는 주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육체의 행실에 영향을 미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와 만나는 것을 모두 제거하기 때문에 아주 강력한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어떠한 지체도 '주님의 죽음'을 적용시켜 즉시 그것을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죄의 유혹을 느낄 때 그것을 이기려고 노력하기 보다 죄의 유혹위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못박힌 사실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적용하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묻은 못자국 있는 손으로 안수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필히 죄를 이기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게 되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의 지체에 그와 같이 적용할 힘은 어디에서 올까? 라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육신의 행실을 제거하려면, 온전히 성령을 의지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개인적 경험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죽을 필요가 있는 것에 대해 십자가의 죽음을 적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육신의 악한 행실은 어디서 언제 나타날지 모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성령을 힘입어 주 예수의 거룩한 죽음의 힘을 지속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승리는 어떤 점에서 요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하며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말아야 합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주님의 십자가가 아무리 깊숙이 우리 생활에 침투되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경계 태세를 취하지 않고서는 우리 지체의 악한 행실이 재발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언제라도 성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는 즉시 육신을 따르는 생활로 돌아갑니다.
(롬 7:21-25)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성령 안에서 우리의 생활이 아무리 깊어진다 하더라도, 이것이 육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육이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몸의 악한 행실을 죽이고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육신은 죽임을 당함으로 무능하게 됩니다. 본문의 죄의 몸을 멸하여에 멸하다는 무능하게 만들다가 그 원뜻입니다. 그래도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거듭난 생명이 육신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십자가와 함께 못 박히는 경험이 육신을 없애지 못하며,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도 우리가 육신을 따라 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육신은 육신의 성품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우리 안에 거합니다. 그리고 기회만 주어지면 즉시 행동을 개시합니다. 왜 이러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몸은 아직 구속되지 않았고 그 구속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며 육신은 몸의 본성 속에 거하는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롬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몸의 구속을 입는 그날까지 이 유신의 장막을 벗는 그날까지 다 이루어진 십자가의 공로와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이것을 적용한느 것은 결코 분리시킬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육체의 성품이 너무 부패해서 우리는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고후 10: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육체 안에서 행하지만 그러나 육신을 좇아 행하지는 않습니다.
(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12-13)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렇습니다. 늘 깨어 근신하여서 육신의 행실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죽음을 우리가 거하는 그 확고한 믿음 안에 거하면서, 그 행실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입니다.
이 다음에 통치권을 회복하는 삶과 우리 삶에 성령이 거하시도록 내적 성소를 만드는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07년 3월 30일 심야예배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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