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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전도학

십자가 교리의 회복에 기초하는 중생

십자가 교리의 회복에 기초하는 중생
이스데반
들어가며
저는 이 글을 종교개혁 주일을 앞두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올해의 마지막인 12월호를 위해 쓰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간단한 소회를 피력할까 합니다. 약 2년 전 ‘옛길 찾기’라는 섹션을 제안하여 관련된 글을 정기적으로 써오면서, 특별히 ‘한국교회의 지금 그리고 부흥을 위한 개혁’이라는 시리즈 안에서 글을 써오면서, 때때로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그에 필적하는 무게감 가운데 글을 써 내려가야 했던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 중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영접 기도 제안식 전도법의 오류에 눈을 뜬 것은 불과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처음에 그 오류들에 대한 것을 들었을 때는, ‘그저 그런 오류들이 있었던 거구나’라는 정도로 흘려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참된 옛 설교자들의 설교와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상황은 바뀌어졌습니다. ‘그저 그런 오류들’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멀게 했으며,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일에 상당한 장벽으로 세워져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무언가를 해야 했고, 지금까지 간단한 글들을 써 왔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그러했듯이 깨달음이 주어지더라도 변화와 개혁으로 이어지는 것은 점진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안에 있는 안타까움은 덤덤함과 상존하는 듯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목사님께서 주장하신 것과 비슷하게 저는 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열과 빛은 항상 함께 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빛이 없는 열은 뜨겁기만 할 뿐, 밝게 비추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참 빛은 항상 열을 수반합니다. 저는 이제 빛을 가리고 있는 가림막을 제거하고, 그 빛을 드러내 보이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참 빛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십자가의 중요성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십자가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하건, 혹은 십자가의 의미나 십자가에 대한 설교, 십자가에 대한 모욕, 혹은 십자가의 길 – 그게 무엇이든 – 에 대해 생각하건 간에,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말하고 또 말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사실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 이상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는 진정한 기독교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김수미 역), 개혁주의 서론,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p. 116.
중생의 교리를 잊게 된 이유 중 핵심적인 것은 십자가에 대한 외면입니다. 그리고 위에 언급된 대로 제임스 보이스 (James Boice)는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이며 십자가가 없다면 진정한 기독교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완전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중생과 십자가는 무슨 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중생하는 것 아닙니까?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인식하고 믿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믿을 수 있도록 중생하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선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중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의 기초 위에서, 즉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될 때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십자가의 온전한 진리를 감추기 시작할 때 중생의 교리가 동반하여 숨겨질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먼저 십자가의 교리를 간략하나마 총체적으로 드러내 보이고자 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총체적 관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우리는 이미 십자가를 통한 속죄의 교리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정리 차원에서 요약을 해 볼까 합니다. 저는 이것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제가 보기에는 좀더 명확하고 쉽게 이해 되면서도 한 눈에 십자가의 총체를 파악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첫째, 십자가를 효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속량 (expiation), 즉 죄인의 죄값을 지불하고 구출하는 효력과 진노의 진정 (propitiation), 즉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진노를 진화시키는 효력을 가집니다. 
둘째, 같은 의미이지만 이것을 성격의 측면에서 본다면 대리적 형벌 (penal substitution), 즉 죄인을 대신하여 죄에 대한 벌을 받는 성격과 화해 (reconciliation), 즉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성격을 가집니다. 
셋째, 결과의 측면에서 본다면 만족 (satisfaction), 즉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충족되므로 죄인들에게 영생의 길을 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습니다.
* 십자가의 가로축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 행하신 일을 보여주고, 
세로축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에게 행하신 일을 보여준다.
도표. 세 가지 측면에서 본 십자가의 속죄의 교리들

“화해 (reconciliation)”인가 “다리 (bridge)”인가?
현대 전도와 설교에서 감추는 것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즉, 공의, 전적 타락, 원수, 진노, 저주, 심판, 지옥 형벌, 피 흘림 등과 같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가장 기초적이고 원초적인 성경적 교리들과 용어들을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의도적으로 피합니다. 우리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만을 믿을 뿐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듯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혐오하시고 그러므로 죄를 기필코 심판하셔야만 거룩함에서 나오는 공의가 충족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반쪽 자리 십자가를 전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반쪽 십자가는 온전한 복음이 아닌 유사 복음입니다. 그리고 설교와 전도가 이 유사 복음에 의존하게 되면 중생의 위치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네 단계로 구성된 브릿지 (bridge) 전도법이라는 것이 우리 나라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여전히 각광을 받고 있으며 제법 오랜 동안 사용되어 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로써 시작하면서, 공의의 하나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실을 숨깁니다. 그리고 사람이 죄에 빠진 것을 얘기하지만, 전적 타락의 상태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며 저주 아래 놓였다는 성경적이고 보다 근본적이며 직접적인 사실을 다시 숨기게 됩니다. 대신 부차적이고 간접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사귐이 상실되었다’는 점만을 언급할 뿐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단계에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일에 이르면 그 절반만을 사용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해서 죽으시고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리적 형벌 (penal substitution) 교리를 밝힌 것이지만, 여전히 십자가의 절반에만 해당합니다. ‘진노’의 개념과 ‘구원’의 개념을 철저하게 회피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가 처음부터 숨겨져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증거하는 시점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진정과 (propitiation),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원수됨이 화해 (reconciliation)된 사실을 숨기게 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결과로써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 (satisfaction)이라는 십자가의 의미를 외면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세가지 십자가의 핵심교리를 대체하기 위한 간단한 방법으로 ‘다리 (bridge)’라는 신생 교리를 추가합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의미에서는 맞지만 그것이 진노의 진정, 화해, 만족이라는 다른 중요한 세가지 성경적 교리를 물리쳤다는 점에서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다리 교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서 영접기도를 통과하겠느냐는 방법론을 내밀면서, 성령을 통한 ‘중생의 교리를 따돌리는 핵심적인 다리’로 변모하게 됩니다.
적어도 오늘날 브릿지 전도법에서 사용하는 그 다리가 영접기도 통과로 인도하기 위한 다리라면 (그것은 실제로도 그렇게 적용되고 있는데) 다음의 바울 사도의 증언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 (고후 5:18). 즉,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킴으로 “화해”시킨다는 십자가의 중요한 측면을 빼버림으로써 온전한 십자가의 의미를 놓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지기 위한 (sin-bearing) 가로축은 하나님의 진노를 흡입하기 (wrath-absorbing) 위해 세로축에 걸쳐져야만 비로소 십자가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브릿지 전도법은 사람의 심리에 맞추어 친근하고 부드럽게 접근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절반을 삭제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표면적인 안위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복음은 죄의 질책과 구원의 필요성을 각성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심령의 골수를 쪼개는 능력을 가진 예리하고 아픈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진정한 내적 기쁨과 영적인 안위가 하늘로부터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 복음은 항상 과격한 반발을 일으키거나, 굳음 심령을 꺾거나 두 가지 결과를 불러일으켰지, 사람의 마음에 친근하고 부드럽고 편안하게 다가와서 행복을 더해 주는 오늘날과 같은 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은 인간적인 감동을 줄지언정 진정한 영의 각성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공의, 심판, 진노, 저주, 지옥, 원수, 피 흘림의 개념을 빼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진노의 진정과 화해의 교리를 빠트리고,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세로축을 제거함으로써 사실상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길을 숨기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초 위에 서야 하는 중생은 설 자리를 잃고 맙니다. 한 면만 인쇄된 지폐를 가지고 효력을 가진 진짜 지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런 반쪽만 인쇄된 지폐를 진짜와 섞어서 몰래 유통시킨다면 그는 법의 처분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진리의 반쪽은 나머지 반쪽과 결합할 때에만 참 진리가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진리의 반쪽 만을 가지고 그것이 진리인 양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에 참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며, 복음을 가로막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참 진리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 진리대로 행해야 할 책무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피와 구원의 복음의 상실
좀더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소위 ‘브릿지 (bridge) 전도법’의 대명사격인 ‘사영리’라고 불리는 전도책자를 보면,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언급으로 시작되는데, 놀랍게도 이 소책자 안에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단 한번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전적 타락, 공의, 하나님의 진노, 지옥 형벌에 대해서 전혀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원’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은혜에 의한 ‘구원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 떨어진 간격을 예수님이라는 다리로 메우기 위해 영접이라는 의식을 통해 영생을 취득하는 ‘회복의 복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 우리는 광범위한 ‘구원의 복음’이 상실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지 ‘회복의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전도 전략을 찾아 나섭니다. 십자가와 그 피를 충만하게 전할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앞에서 십자가의 세로축이 빠지고 가로축만 증거되고 있는 현실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피 흘림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죄값을 지고 죽어야 한다면, 단순히 교수형으로 깨끗하게 피 흘림 없이 죽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 흘림만이 죄 사함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 안에 적용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고, 또한 죄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진정시켰습니다. 피의 교리는 이처럼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것 (이것은 인간을 향한 사랑의 극치임)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로서의 예수님에게서는 피 흘림이 핵심이 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의 교리와 사실상 사랑의 교리가 동시에 상실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다는 언급은 하지만, 사실상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의 총체적 의미와 그 피의 무한한 가치는 흔히 간과하고 맙니다. 이것은 첫 단추, 즉 신학의 첫 관문인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이해를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에서 나오는 죄에 대한 무한한 혐오와 진노, 그 진노를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부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하신 그 놀라운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비밀을 ‘다리 전도법’은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한 ‘중생’의 은혜를 가로막고 있는 이 인본위주의 전도법은 이제 철저하게 재검토하여 수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만일 제임스 보이스 (James Boice)와 같이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이며, 십자가가 없이는 기독교도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의 세로축 나무는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져 내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흠 없는 어린양은 죄값을 담당하시기 위해 가로축 나무를 메고 골고다를 향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로축 나무에 못이 박힌 체 세로축 나무에 끌어올려지셨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인식하고 죄에 대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때, 예수님께서 그 진노의 무게를 지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저주였는지,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향한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를 비로소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의의 획득을 놓치지 말라
십자가는 크게 속량 (대리적 형벌; 가로축), 진노의 진정 (화해; 세로축) 그리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논했습니다. 그리고 피 흘림의 의미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흔히 간과되고 잘 다루어 지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의의 획득’에 대한 부분입니다. 칭의에 있어서의 이중전가의 개념에서 본다면, 우리는 죄가 씻겨진 것만으로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은 면하게 되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왜 입니까? 천국에는 의롭게 된 자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정결하게 되고, 의롭게 되어야 천국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의로움은 아담이 완전한 순종을 하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은 자신의 힘으로 의, 즉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을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생의 조건은 여전히 아담에게나 우리에게나 동일 합니다. 완전한 순종을 통한 의로움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시면서부터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흠이 없는 완전한 의로움을 획득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결과적으로 의의 최종 획득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숨을 거두신 예수님은 진실로 다 이루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하여 수치스러움을 알게 된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오직 은혜로 중생하여 믿게 될 때, 예수님께서 획득하신 의로움은 부활을 통해 타락한 우리에게 전가됩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비록 그 의로움은 우리 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 전가 되었던 죄가 예수님의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그 의로움의 옷이 우리에게 입혀질 때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선언되고 (칭의),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 되는 것 (양자됨)입니다. 이 비밀은 자신의 전적인 타락을 깨닫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에만 의지하여 중생한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복음이며 지옥 백성이 천국 시민으로 바뀌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반쪽 십자가에 의하여 진정한 회개도 없이 영접기도 통과한 것으로 전도자가 피전도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복음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이제 명백해 졌습니다.

글을 맺으며
이제 저는 내용을 정리할까 합니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십자가, 그리고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새롭게 들리는 이 십자가의 의미는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십자가를 가볍고 소홀하게 다루고 있는지를, 또 가로축만 들고서 십자가라고 전하는 우리의 우둔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 그것은 영접기도를 통과해서 곧바로 천국자녀로 변모시켜 주는 ‘다리’가 아니라, 속량 (대속)과 진노의 진정 (화해) 그리고 공의의 만족과 의의 획득이라는 신비를 가진 구원의 복음이며, 따라서 중생을 통해서만 십자가의 의미와 피의 가치를 발견하여 회개하고 믿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 2:6-16 참조)
하지만 그렇게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 조그만 전도지에 그 내용을 다 담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작은 쪽지에 논문을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제대로 노력한다면 짧더라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한 예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간단한 문장에는 십자가의 대속, 화해 (진노의 진정), 의의 획득과 같은 핵심 교리가 유기적인 연결 가운데 정확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 복음이며 성경의 복음입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을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37문.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셨던 모든 기간에 특히 생의 마지막 시기에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몸과 영혼에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유일한 화목제물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셨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독립개신교회 교육위원회 역),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서울: 성약, 2011, p. 66.
화해화 진노의 진정에 대한 교리가 빠진 십자가, 가로축만 남은 십자가는 온전한 십자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반쪽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참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서 중생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 복음을 전하는 소수의 목회자들이 수많은 교회 출석자들 중 상당수가 중생하지 못한 체로 남아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해 되십니까? 생명에 이르는 회개와 살아있는 믿음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듣고 중생을 경험한 자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중생하지 않은 체 영접기도를 통해 ‘다리’를 통과한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특징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피에 진정한 능력이 있으며, 그 능력에 철저히 의존하도록 강력한 부르심을 듣고 있습니다. 북한선교를 위해 기도하시고 일하시는 여러분, 십자가의 복음이 없는 북한선교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기초가 북한선교의 기초라는 점에 동의할 수 있습니까? 북한선교를 위해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바로 복음을 알고 그것을 올바로 전하기 위해 개혁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심장이 뛰고 있습니까? 복음 축소주의 (gospel reductionism) 또는 잘라져 나간 복음 (truncated gospel)이 편만한 이 시대를 정확히 파악하고 개혁하지 않는 한, 부흥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에 대한 갈망과 온전한 십자가 복음을 붙들지 않고서 통일과 북한선교를 하려는 것은 반석을 제쳐두고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는 것처럼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십자가의 복음을 알기 위한 열정으로 불붙지 않은 가슴으로 북한을 품으려는 것은 열광주의와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