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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적보다 친구를 더 용서하기 어려운 이유

“It is easier to forgive an enemy than to forgive a friend.

-William Blake-

적보다 친구를 용서하는 것이 더 어렵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내 애정과 신뢰, 그간의 내 행위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는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래서 정산할 것이 없는 적은 쉽게 용서가 되나 그로부터 기대했던 것이 많은 친구는 쉽게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길가던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기보다 가까운 가족과 동료들에게서 상처를 입는다. 상처란 그래서 관계를 전제하는 말이다. 인간은 관계 맺는 존재이며 대상을 추구하는 존재다. 신뢰와 애정, 애착들이 그를 결정짓는다.

그러나 그 너머로 나아가려면 용서가 있어야 한다. 용서란 애착 없었던 적들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애정하던 이들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깊이 사랑하면서도 그가 내게 끼친 상처들을 넘어서는 힘이다.

그래서 용서는 영적인 일이다. 죄는 유대인의 관념에서 주로 빚으로 이해되었다. 예수님의 일만 달란트 탕감의 비유는 바로 이런 문화를 배경으로 한 비유다. 이 탕감의 정신을 보여주는 제도가 희년 제도였다. 기록에 의하면, 헤롯대왕의 통치 초기까지 안식년 규정들이 엄수되었고 유효하였으며 채권자들은 안식년 규정들을 준수해야 했다. 이 사실은 희년에 대한 실천이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인간의 악함은 안식년을 무력화시켰다. 가진 자들은 안식년이 다가오면 빌려주기를 꺼려했고 채무자들은 안식년의 도래를 빌미로 채무를 이행하기를 꺼려했다. 결국 정작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안식년이 다가옴에 따라 돈을 빌릴 수 없는 상황에 도래하자 랍비 힐렐은 프로스불(Prosbul)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프로스불은 '법정 앞에서(pros boule)'라는 헬라어로 안식년이 도래해도 법정에서 서약하고 서명한 채무에 대해서는 안식년이 지나더라도 채권이 유효한 제도를 만든 것이다. 이것은 중세 시대도 비슷했는데 같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자를 받을 수 없자 중세 가톨릭 국가들의 황제들은 은행업을 유대인에게 맡겼다. 율법을 회피하고 이자를 받으려던 중세 황제들의 꼼수였다. 유대인을 중간에 세워 은행을 통함으로 같은 그리스도인에게 이자받는 것을 회피하면서도 유대인을 통해서 형제였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자놀이를 한 것이다. 현대 유대인들이 막대한 자본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중세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같은 방식으로 힐렐은 법정이 이를 대행하게 함으로 안식년 이후에도 채권과 채무의 연속성을 보존했다.

안식년과 희년은 우리의 죄를 무한히 탕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며 진정한 용서는 우리 빚을 탕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이 절기 제도를 통해서 우리는 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악함이 이런 탕감의 제도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가까운 관계라서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악의적인 채무자의 태도와 그런 손해를 기피하고 형제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채권자의 태도가 그 원인이다.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하지 않던 자는 당시 힐렐의 가르침에 따른 흔한 시대의 풍경이었다. 법이 그것을 보장함으로 형제의 빚을 탕감하지 않는 것이다. 본문에서 빚은 중의적이다. 일만달란트 탕감의 빚은 우리의 허물 곧 죄를 의미하지만 백 데나리온을 탕감하기를 거부하는 동관의 태도는 당시 흔히 보던 채권자의 태도다. 이렇게 중의적인 용법을 사용하신 것은 영적인 원리가 우리의 실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실천적 원리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 비유는 베드로의 질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형제의 허물을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이 비유에 나온 빚은 바로 우리 허물과 죄를 의미하며 동시에 프로스불을 핑계로 형제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태도를 지적한 것이다. 마땅히 안식년이 돌아오더라도 갚아야 할 빚을 형제라는 이유로 갚지 않는 악을 행하거나 마땅히 형제를 불쌍히 여겨 돌아보아야 할 것을 자기 이익만을 챙김으로 옥에 가두는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함을 동시에 지적하신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게 더 상처받기 쉽고 그들을 용서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런 법정에서의 권리를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베푼 호의에 대해서 내게 마땅한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를 더 용서하기 힘들고 우리는 그를 우리 마음의 감옥에 가두고 만다. 희년이나 안식년은 단지 땅을 쉬라는 말이 아니다. 땅에서 유래한 인간의 삶에서 청산되지 못한 것들을 청산하고 쉬라는 의미다. 악의적인 채무자나 채권자가 되지 말고 형제 사랑을 다하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