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하는 방식 중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구분하여 이해 하는 방식이 있다. 일반적으로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을 그리스도가 택자들을 위하여 능동적 으로 모든 율법에 순종하신 것을 의미하고 수동적 순종(passive obedience)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 의 공의로운 심판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순종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 두 순종을 그리스도의 구속에 있어서 두 가지 별개의 사안들로 이해하기도 하고 두 순종을 그리스도 사역에 있어서 시간적으로 다른 두 단계로 보기도 한다. 또한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비슷한 의미 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혹자는 이 두 순종을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로 이해한다.
사실 이 두 순종을 유기적으로 보지 않고 서로 다른 사안으로 분리해서 볼 경우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할 경우에도 두 순종을 오해할 수 있고, 칭의 에 대해 다른 이해를 할 경우에도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 언약 개념을 잘 적용하지 못해도 두 순종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다.
본 논문은 개혁주의 전통에 굳게 서서 한국교회에 개혁신학이 자리 잡도록 평생을 바친 죽산 박형 룡의 능동적 순종 개념을 살피고자 한다. 박형룡은 개혁주의적 칭의론을 가르치기 위해 요한 칼빈 (John Calvin),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B. B. 워필드(B.B. Warfield), 제임스 오(James Orr), G. C. 베르카우워(G. C. Berkouwer),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 촬스 핫지(Charles Hodge), 로버트 L. 댑니(Robert L. Dabney) 존 머리(John Murray), J. 버스웰(J. Oliver Buswell) 등의 칼빈주 의 학자들의 신학을 답습하고 전수하였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하이델베르크 문답서, 도르트 신경 등의 개혁주의 고백서 및 신경도 답습하며 소개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형룡은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해서도 답습하고 소개하고 설명한다.
본 논문은 개혁주의 칭의론을 다룸에 있어서 박형룡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어떻게 이해하며 적용하 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지를 살피고자 한다. 이 목적을 위해 본 논문은 첫째, 그의 언약 개념 관점으로 살리고 둘째, 두 순종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지 를 살피고자 한다.
Ⅱ. 언약적 차원의 능동적 순종
박형룡은 개혁주의 전통에 따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언약의 틀 가운데 이해한다. 그는 그리스 도의 구속 사역을 소위 “구원의 언약”(pactum salutis)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선재적 신분에 비하와 승귀의 선행(anticipation)이 있었음을 발견하나니 그가 구원의 언약( pactum salutis )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공로를 세우시고 그 사역을 집행하실 것을 자원하여 담당하신 것은 비하요, 그가 우리의 장래 중보로서의 영광을 성육신 전에 누리신 것은 승귀였다(요17:5 참조).”1)
박형룡이 말하는 비하와 승귀의 선행(anticipation)은 단순히 예표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삼 위 하나님 사이에 주어진 예정론적 계획과 실제적 뜻을 의미한다. 여기 중요한 것은 삼위 하나님이 자 신들을 위해 계획하시고 집행하신 것이 아니라 택자인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구 원을 위하여 공로를 세우시고 그 사역을 집행하실 것을 자원하여 담당하신 것은 비하요”라는 말에 “자 원하여 담당하신 것”이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 의미이다. 성부와 성자 관계를 경세적(economical) 관계로 본다면 수동적 순종으로 볼 수 있지만 구원의 언약에 참여하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 이의 존재론적(ontological) 관계로 본다면 삼위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에 따른 능동적 순종으로 볼 수 있다. 벌코프는 “그리스도가 자원하여 고난과 죽음에 순복한 것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일환이 다”라고 말한다. 2) 구원의 언약에 비쳐볼 때 이러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순종도 능동적 순종의 일 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창세 전에 세우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 pactum salutis )은 행위 언약이나 은혜 언약보다 시 간적으로 앞선다. 일반적으로 구원의 언약을 은혜 언약(foedus gratiae)의 기초(foundation)로 이해 한다. 또한 이 세 언약들은 서로 뗄 수 없는 것이며 다 하나님의 예지와 섭리 안에 들어있다. 박형룡의 “비하와 승귀의 선행”이란 표현은 예정론적 의미를 담고 있다. 예정론적 의미의 언약은 당연히 인간
1) 박형룡, 『기독론』 개정판 (서울: 개혁주의 출판사, 2000), 135.
2)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41), 379.
의 생각, 계획, 의도, 행동 등을 초월한다. 그렇다면 삼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능동적 순종이든 수동적 순종이든, 비하이든, 승귀이든) 인간의 행동과 결과에 근거하여 관찰하고 비교하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한 단면으로서 능동적 순종은 예 정론적 언약에 속한 사안이지 인간의 행동과 결과에 비춰서 비교되고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박 형룡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나면서 한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성부의 예정과 그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하여 율법에 복종”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3) 즉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유대 인의 율법행위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순종이 예정론적이라는 것은 그 순종은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택자들 을 위한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는 구속주 입장에서 순종하셨음을 박형룡은 아래와 같이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의 복종은 또한 대리적 복종이었다. 그는 우리의 대신이었고 우리의 이 익을 위하시었다. 그가 율법 아래 있은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기 위함이었다(갈
4:4,5). 그는 구속주의 성격을 가지고 율법 아래 복종하신 것이었다. 그 자신을 위해서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 그는 안식일의 주인이었음 같이 모든 율법의 주인이었다. 율법에의 복종은 그의 자 신적 행복과 신적 은총을 누리기 위한 조건으로 그에게 외계로부터 부과된 것이 아니었다.”4)
여기 “자신을 위해서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 에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대신이었고 우리의 이익을 위하시었다”는 표현에도 자신 의 의가 아니라 우리의 의를 위해서 율법에 순종하셨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모든 율 법의 주인이었다”고 하고 “구속주의 성격을 가지고 율법 아래 복종하신 것이었다”고 강조한다. 즉 그 리스도는 율법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가 율법 아래 순종하신 행위는 구속주의 성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십자가와 부활의 완성까지의 구속사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복음의 주인이실뿐 아 니라 율법의 주인이셨다. 즉 그가 구속주이셨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 키는 행위와 그에 따른 결과는 그리스도가 율법에 순종하신 것과 그에 따른 결과와 근본적으로 다르 고 또한 비교할 수 없는 사안이다.
언약에 따른 의무감과 칭의를 위해 율법에 순종해야 하는 인간은 죄인의 성격을 지녔지만 그리스 도의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은 구속주 성격을 지녔다. 구속주이시지만 언약의 파트너로서 언약의 의무도 동시에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우리처럼 자신의 의를 이 루기 위해서 하신 것으로 볼 수 없다. 만약 그랬다면 그리스도는 구속주도 아니시고 언약의 주도 아
3) 박형룡, 『기독론』, 170.
4) 박형룡, 『기독론』 , 172. 이 내용은 찰스 하지(Charles Hodge)의 주장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다.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reprinted, 1977), 612-13 볼 것. 특히 갈 4:4,5을 근거로 하지는, “It was in his character of Redeemer that He submitted to this subjection. There was no necessity for it on his part. As He was Lord of the Sabbath, so He was Lord of the law in all its extent and in all its forms. Obedience to it was not imposed ab extra as a condition of his personal happiness and enjoyment of divine favour.”라고 주장했다.
니시게 된다.
언약 개념으로 이해하자면 그리스도가 구속주이시라는 것은 그리스도는 종주-봉신(suzerainvassal) 관계에서 종주시라는 것이다. 5) 봉신만 언약을 지킬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종주도 의무가 있다. 당신이 세우신 언약이지만 그 법에 순종하셔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다. 즉 구속주로서의 의무 이다. 창 15:17-18에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 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 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말씀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일방적으로 언약을 맺 으신 것이 아니라 쌍방적으로 맺으신 것이다. 종주이신 하나님은 횃불로 임하시어 당신도 언약의 의 무를 보여주셨다. 즉 언약의 주로서 순종이 요구되었다. 아브라함 언약만 아니라 앞선 행위언약에 있 어서도 그리스도는 종주로서 그 언약의 파트너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모든 언약들이 구속언약 (pactum salutis)에 계획된 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인간과는 달리 자신을 비어 낮추어 언약을 지키신 것이다. 봉신인 우리 인간이 언약을 지킨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또한 박형룡은 행위 언약 차원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능동적 순종)을 강조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복종하신 율법은.... 아담에게 행위 언약으로 주어진 율법이니 완전한 순종을 생명의 조건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첫째 아담이 지키지 못한 율법을 둘째 아담이 지켜서 인류의 영원한 생명 을 획득하기로 하신 것이었다”라고 한다. 6) 행위 언약을 ‘완전한 순종을 생명의 조건으로 규정한 율법’ 으로 해석한다. 7) 이것은 찰스 하지(Charles Hodge)가 정의한 행위 언약의 특성이다. 8) 한편 박형룡은 하지와는 달리 행위 언약에 대한 첫째 아담의 실패와 둘째 아담의 성공을 비교하며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언약적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박형룡은 다음과 같이 제 1 아담과 제 2 아담으로 서의 그리스도를 비교한다.
그는 제 2 아담으로서 제 1 아담의 자리를 취하셨다. 제 1 아담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율법 아 래 있었으니 그것을 지켜 행하는 일 자체는 으레 당연한 일이므로 상(賞)의 청구권을 갖지 못 하였다. 오직 하나님이 은혜롭게 그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순종을 조건으로 하여 그에게 생명을 약속하신 때문에만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자기와 자기의 후손들을 위하여 영생을 얻을 조건으로 되었다. 그런데 제1 아담의 실패(범죄 타락)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자원하여(능
5) 메레디스 클라인은 고대 근동의 두 국가 혹은 부족 사이에 맺어진 조약(언약)에는 종주국(Suzerain)과 속국(vassal)의 구분과 차등이 존재했다고 잘 설 명한다.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언약에는 비슷한 관계가 형성되었으며 불연속성과 연속성이 동시에 존재했다고 강조하며 에덴동산에서 맺어진 언약 도 비슷한 경우로서 에덴을 성전 모양의 동산으로 보고 에덴동산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언약적 차원에서 해석한다. Meredith Kline, Kingdom Prologue (Mimeograph, 1981), 85-89.
6) 박형룡 『기독론』 , 170.
7) 칼빈은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선악을 아는 나무를 먹지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었고 불순종 으로 사망이 들어왔음을 강조한다. (Inst. I. 1. 4 참조)
8) 하지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The law given to Adam as a covenant of works; that is as prescribing perfect obedience as the condition of life.” Hodge, Systematic Theology, 612 참조.
동적으로) 제2 아담으로서 언약 관계에 들어가 율법을 지켜 행하심으로 자연히 그와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에게 앞의 내용과 동일한 의의를 획득하신 것이다.9)
언약적 차원에서는 아담과 그리스도 모두 언약적 의무가 있음을 박형룡은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능 동적 순종을 자발적 언약적 의무로 이해되고 있다.
이어서 박형룡은 하지를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능동적 순종을 설명한다. “찰스 하지는 말하되 ‘그리 스도는 모든 의를 성취하실 ─ 즉, 율법의 모든 형식이 요구하는 모든 일을 행하실 본무를 받으심에서 율법을 이 모든 국면에서 복종하신 것이었다. 이 율법에의 복종은 자원적이며 대리적이었다.” 10) 여기 박형룡이 인용한 하지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 하지는 “모든 율법의 근원이신 하나 님은 비하의 행동이 아니고서는 그 율법에 순종할 수 없다.”라고 강조한다. 11) 즉 능동적 순종을 인간의 율법에 대한 순종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신적 비하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능 동적 순종은 구속주로서 또한 언약주로서의 비하라는 것이다. 또한 박형룡은 하지를 따라 순종의 당 위성을 그리스도 자신의 의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의를 위한 언약적 비하에서 찾고 있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해 율법을 지켰던 차원에서가 아니라 종주이신 그리스도는 언약의 파트너로서 구원 언약 및 행위 언약을 지켰다는 말이다.
박형룡은 그리스도께서 복종하신 율법은 3가지 국면을 가지고 있다면서 먼저 행위언약이고, 둘째, 모 세의 율법이고, 셋째, 도덕적 율법으로 사람의 본성과 하나님의 말씀에도 계시되었다고 말한다. 12) 이렇 게 율법을 세 가지 국면으로 볼 때는 박형룡의 능동적 순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롬 5장에 나오는 대로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이 대조되고 고전 15:45에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말씀에서 아담과 그리스도가 대조되는 가운데 능동적 순 종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살려주는 영이라”하면 십자가의 수동적 순종을 우선적으로 전제해야 하는 것이며 생령인 첫 사람 아담과 비교되는 차원에서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생략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율법을 모세의 율법에 한정할 경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잘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더욱이 유대인들이 지키지 못한 차원에서 모세의 율법의 부정적 의미가 부각되면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 종에 대해 쉽게 오해할 수 있다. 박형룡처럼 율법에 세 가지 국면을 포함시키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 종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형룡은 벌코프를 인용하면서 “최종으로 그리스도가 만일 사람에게 부과된 형벌을 받으셨을 뿐이면 그의 사역의 열매를 나누어 가진 자들은 아담이 타락되기 전에 있던 바로 그곳에 남아 있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13) 즉 아담의 타락을 치유한 수동적 순종만 있었
9) 박형룡, 『기독론』, 404.
10) 박형룡, 『기독론』, 171 인용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II, 612.
11)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II, 613.
12) 박형룡, 『기독론』, 170.
13) 박형룡, 『기독론』, 390. 이러한 내용은 벌코프의 책에 수록되어 있다. Berkhof, Systematic Theology 380 볼 것.
다면 우리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에 놓이게 되고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 과 모세 율법과 도덕적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할 의무가 아직 남아 있게 된다는 말이다.14)
박형룡은 더 이상 행위언약은 의미가 없고 구속력도 없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파에 대응하여 개혁 주의 입장에서 행위언약은 해소되지 않았고 영구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박형룡은 다음 과 같이 주장한다.
이 율법[행위언약]은 이 의미에서 남아 있어 사람들의 불의(不義) 때문에 그들을 정죄하여 그 들이 이것을 성취하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 선생으로 역사한다. 대개 그리스도는 아담이 성취하지 못한 이 언약의 조건을 성취하시고 또 아담이 담당한 이 언약의 형벌을 몸소 받아서 신앙하는 매 사람에게 의를 위한 이 언약의 종말 (終末)이 되시니 신자는 그 안에서 이 언약을 성취하고 이것의 약속된 상을 받을만한 자로 취 급된 때문이다.15)
흥미롭게도 박형룡은 행위언약을 율법이라 명명한다. 이 행위언약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은 이것 을 지킬 의무가 모든 인간에게 부여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변치않는 공의의 원리들 위해 설립된 것” 16) 이라는 말이요 따라서 원리상 그 의미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행위언약으로 영생 얻는 실제적 방법은 인간의 불의로 인해 해소되었으나 그 방법의 기본원리로는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리스도가 능동적 순종을 통하여 그 원리를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불순종이나 행위에 따라 행위언약의 속성이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박형룡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신분(state)과 상태(condition)의 차이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설명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시어 땅 위에서 통과하신 모든 고난은 그가 비하한 처지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니 그의 그 신분에 속한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것은 그가 승귀한 처지에서 마땅히 누리실 특권이니 그의 신 분에 속하는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중보의 상태는 그의 신분에 속하는 무엇이요 신분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 둘은 이렇게 성질상 서로 다르다는 것이 명백하다.”17)
14) 개혁주의 진영 내에 모세 율법이 행위언약의 일환인지 혹은 은혜언약의 일환인지에 대한 의견은 크게 둘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모 세 율법을 은혜언약으로 이해한다. 율법의 세 가지 용법에서 볼 수 있듯이 율법이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은혜언약에 가까운 것이지 행위언약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하겠다. 칼빈은 모세 율법을 아브라함의 언약과 연계하여 은혜언약으로 이해하며 다음과 같이 해석했 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영원하고 거역할 수 없는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관심과 무시가 발생했고 따라서 다시 신설할 필 요가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 내용이 돌판에 새겨지고 책에 쓰였다. 이것은 결코 망각하지 않게 될 아브라함의 후손에 부여된 놀라운 은혜이 다.” John Calvin, Commentaries on the Four Last Books of Moses Arranged in the Form of a Harmony, trans. Charles William Bingham, vol. 1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2005), 313.
15) 박형룡, 『교의신학/인죄론』, 朴亨龍博士著作全集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2011), 138.
16) 박형룡, 『교의신학/인죄론』, 138.
17) 박형룡, 『기독론』, 134-35.
박형룡은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때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를 비하 상태로 이해한다. 그 리스도의 수난(passion)은 재판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고 십자가 상에서 죽으신 것에만 적용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태로 성육신하신 때부터 적용되어야 한 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신분이시지만 비하한 처지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라 강조한다. 예수는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 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 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18) 말 씀한다. 이러한 권세를 가진 그리스도가 비하의 행동을 하신 것은 언약의 주, 즉 구속주이시며 동시에 언약의 파트너이시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언약 안에서 신적 권세와 비하의 순종은 서로 모순됨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박형룡이 소개하는 신분과 상태의 구분에 따르면 성육신 때부터 죽으실 때까지 모든 중보의 상태는 그리스도의 신분에 속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분은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하지만 신분에 따른 비하 상태들을 그리스도의 신분 자체로 볼 수 없다는 것 이다. 하나님의 신분을 가지신 그리스도가 이런 비하의 상태를 취하신 것은 우리의 구속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속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비하 상태를, 특히 능동적, 수동적 순종을, 그의 신분 자체인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마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신분에서 율법에 능동적 으로 순종했다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Ⅲ.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유기적 관계
박형룡은 그리스도의 비하를 여러 단계로 나눈 개혁주의 전통을 소개하며 자신도 여기에 동의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먼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소교리 문답』 제27문의 답에서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곧 그의 내려오심인데 또한 비천한 지위
에 나셔서 율법 아래 복종하시고 금생에 여러 가지 비참함과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받으시고 묻히셔서 얼마 동안 죽음의 권세 아래 거하신 것이다”라고 진술했다.18)
소요리 문답의 “율법 아래 복종하시고”라는 표현은 능동적 순종이고,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십자 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받으시고 묻히셔서...”라는 내용은 수동적 순종이라 하겠다. 웨스트민스터 요 리 문답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에도 ‘능동적 순종’ 혹은 ‘수동적 순종’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 는다. 그러나 쉽게 개념들은 추론할 수 있다. 고백서 11장 1항에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이 [택자들에
18) 박형룡, 『기독론』, 141.
게] 전가됨으로”(by imputing the obedience and satisfaction of Christ unto them) 표현 뒤에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의가 전가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19) 여기 “순종”은 소요리 제27문의 답에 나오 는대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고 만족은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만족케 하는 의미 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전자는 능동적 순종의 개념이고 후자는 수동적 순종의 개념이다.
그리고 박형룡은 벌코프의 비하의 5 단계인 “성육신과 탄생, 고난, 사망, 매장, 음부강하”를 소개한 다. 그리고 『소교리 문답』 처럼 그리스도의 비하를 6단계로 나눈 찰스 하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찰스 하지는 앞에 언급한 『소교리 문답』의 진술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비하의 단계를 성육신, 율법아 래 복종, 고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심, 죽으심, 매장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20)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여러 차별화된 단계들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구 속 사역이며 이 사역에 여러 가지 특성들이 담겨 있고 이런 모든 특성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 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구별되거나 차별 화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개혁주의 내에서도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나누지 않고 하나의 순종으로 보기도 하고, 능동적 순종을 수동적 순종, 즉 십 자가 대속을 위한 준비 단계로 보기도 하고, 수동적 순종을 구속의 충분조건이라 하면 능동적 순종을 구속의 필요조건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신율주의(neonomian) 경향이 비치는 노만 쉐퍼드(Norman Shepherd), 패더럴 비전(Federal Vision) 학자들, 바울의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 학자들은 전반적으로 능동적 순종을 거부한다. 거부 사유는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된다면 우리에게는 법적 혹은 언약적 의무와 책임이 사라질 수 있고 값싼 은혜로 변질될 수 있다 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박형룡 역시 능동적 순종을 따로 주장하기보다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 조하며 온전한 순종을 주장한다.
능동적 순종과 피동적 순종이라는 이 양식은 정확히 해석되어야 그리스도의 순종의 분명한 두 방면을 제시함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구별함에 있어서 이 둘은 서로 분리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둘은 구주의 생애의 모든 점에서 서로 동반하 여 끊임없이 서로 투입한다.21)
19)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ch. 11, sec. 1.
20) 벌코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But in discriminating between the two, it should be distinctly understood that they cannot be separated. The two 박형룡, 『기독론』, 141.
21) 박형룡, 『기독론』, 387.
22) 벌코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But in discriminating between the two, it should be distinctly understood that they cannot be separated. The two accompany each other at every point in the Saviour’s life. There is a constant interpenetration of the two.” (Berkhof, Systematic Theology, 379. 벌코 프가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의 모든 부분에서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유기적으로 엮여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내용은 벌코프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다. 22) 이 두 순종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특정 한 구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구주의 생애의 모든 점에서 서로 동반하여 끊임없이 서로 투입한다” 는 것이다. 이에 박형룡은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수행하시는 것 전부는 하나님의 손과 계획이 행해지 도록 결정한 것이다(행 2:23; 4:28).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성부 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이루었다 하심이었다(요 17:4; 19:30)”라고 설명한다. 23) 보통 십자가 상 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선언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대속이 완성된 것으로 해석해 왔지만 박형룡은 그 리스도의 성육신으로부터 생애를 통해 “수행하시는 것 전부”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속 사역이 완성 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다고 박형룡은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 죄를 대속함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 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애의 모든 능동적 순종과 마지막 수동적 순종은 서로 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박형룡은 칭의 근거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능동적 순종을 포함한 그리스 도의 제사적, 구속적 사역으로 말미암는다고 주장한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제사적, 구속적 사역으로 말미암아 된다. 이에 대해 특히 로마서에 많이 나 타난다(롬 3:24; 5:9; 8:33,34), 그리고 그의 구속적 사역은 그가 율법 아래 나서 능동적 순종 으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는 일도 포함하였다(갈 4:4,5; 히5:8,9). 이와 관련해서 이 진리의 특수한 의의는 우리가 칭의를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의 단번에 된 구속적 성취가 주 목의 초점으로 된다는 것이다.24)
박형룡이 제시하는 제사적, 구속적 사역을 증거하는 성경 구절 중 롬 5:9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 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 을 받을 것이니.” 그리고 “그가 율법 아래 나서 능동적 순종으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는 일 도 포함하였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결론짓기를 “우리가 칭의를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의 단번에 된 구 속적 성취가 주목의 초점으로 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박형룡은 능동적 순종을 강조할 때 십자 가 상에서 단번에 된 구속적 성취와 별개의 사역인 양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박형룡은 히브리서를 근거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하여 성육신에서 완전하게 되심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영원 불변성을 단언함에 매우 강경하였으나(히 1:1-4; 13:8) 그는 그 자신을 구원의 주로서 완전케 하실 뿐 아니라(히 2:10) 또한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었다”고 말한다
23) 박형룡, 『기독론』, 152. 24) 박형룡, 『구원론』, 345-46.
(히 5:8,9). 삼위일체의 제2위에게 불변성을 돌리는 동시에 그의 지상 생활에 사건들의 현실적, 연대적 진행을 인정하는 데는 모순이 없다... 칼빈은 이것을 “완성된 제사로서 완전하게 만드 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는 도덕적 완전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법적, 직무적 완전을 의미 하는 것이다.25)
그리스도는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성육신이 이 사실을 변경하지 않는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성자는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완전하게 되셨음을 강조한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 이신 그리스도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완전하게 되신 것을 “완성된 제사로서 완전하게 만드는 것” 이라고 했다고 박형룡은 소개한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완전하게 되었다는 표현은 십자가의 죽 음만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다. 칼빈은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한편 비록 칼빈은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같은 의미의 개념을 가르쳤다는 주장도 있다.26)
정확한 각주 처리가 없어서 박형룡은 칼빈의 글 어느 부분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히 5:9에 대한 칼빈의 주석 내용을 의미하는 것 같다. 칼빈은 히 5:9을 이렇게 주석한다. “그는 아담과 정반대의 행동으로, 즉 순종으로 아담의 불순종을 제거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를 획득하셨기 때문에 그는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27) 이러한 칼빈의 해석은 비록 그가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오늘날 주장되는 능동적 순종 개념을 칼빈 역시 답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칼빈은 아담의 불순종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을 대결 구도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첫 아담의 불순종과 둘째 사람이며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 사이의 예표론적(typologica) 성취를 비교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사람들과 같이 되신 그리스도가 “순종으로 아담 의 불순종을 제거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를 획득” 하신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가르침을 박형 룡은 능동적 순종으로 이해하고 따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박형룡은 예수가 모든 율법을 행할 의무를 가지고 계셨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그가 그의 할례에서부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실 것을 보증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 이다(빌 2:8). 세례의 의의는 할례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라고 하신 말씀은 “이와 같이 하여 나는 전 율법의 의에 대해 나 자신을 보증한다.”라고 하심이었다.28)
25) 박형룡, 『기독론』, 167.
26)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 강요』, 2. 16. 5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묻기를,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어떻게 해서 죄를 제거하셨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분리된 상태를 없애셨으며, 또한 의를 얻으셔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향하여 자비와 친절을 베푸시게 만드셨냐고 한다. 이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답변은 곧, 그의 복종의 전 과정을 통해서 우리 를 위해 이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여기 “그의 복종의 전 과정” 속에 능동적 순종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이 표현이 능동적 순종 자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27) Calvin’s Commentary on Hebrews 5:9, in John Calvin, Commentaries o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Hebrew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79).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디. “He became then the cause of salvation, because he obtain righteousness for us before God, having removed the disobedience of Adam by an act of an opposite kind, even obedience.”
박형룡은 순종을 능동적, 수동적으로 분리해서 이해하기보다는 할례에서 십자가의 죽음까지의 순 종을 총체적으로 고려한다. 흥미롭게도 그리스도의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는 말씀을 “전 율법의 의에 대해 나 자신을 보증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즉 그리스도의 모든 생애가 고난의 생애였음을 박형룡은 주장하는 것이다.29)
박형룡은 또한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는 구절을 언급하며 “우리를 위해 율법에 순종하시고 율법의 공의에 충족한 형벌을 대신 받으신 자기의 의를 근거로 하여 우리의 사면을 주장하시니 그 주장은 반드시 효과 있을 것이다.”라고 설명한 다. 율법에의 순종을 통한 의를 능동적 순종을 통한 의라고 한다면 율법의 공의에 만족한 형벌을 대신 받으신 의는 수동적 순종을 통한 의라고 하겠다. 그러나 둘 다 율법의 성취임을 강조하고 있다. 구분 되지만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박형룡은 <속죄의 순종성>이라는 제하에 능동적 순종을 다루는데 그 내용은 거의 벌코프의 내 용을 번역한 것이다. 30) 박형룡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기를 “그리스도 의 능동적 순종은 그의 수동적 순종이 하나님께 열납되기 위하여 필요하였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어 서 “만일 그리스도께서 능동적 순종을 행치 않으셨더면 그의 인성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에 충분히 대응되지 못하였을 것이며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속죄하기 불가능하셨을 것이다.”라며 벌 코프의 주장을 그대로 소개한다.
그러나 이것은 능동적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분리할 수 없는 신-인 양성을 분 리해서 다루는 우를 범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신 분으로 신 성과 인성을 분리해서 생각은 할 수 있지만 벌코프와 박형룡처럼 인성을 따로 분리해서 “인성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에 충분히 대응되지 못하였을 것이며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속죄하기 불 가능하셨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인 되심의 충만함과 완전한 결합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은 모습이라 하겠다. 그리스도의 삶을 통한 모든 고난이 인성만이 아니라 신성도 포함된 신-인 그리스도의 고난이며 십자가의 죽음도 인성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신성도 포함되었다. 사 도행전 20장 28절에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 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말씀한다. 하나님은 피 를 흘리시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는 피를 흘리시어 교회를 사셨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말씀은 오기(誤記)가 아니다.
28) 박형룡, 『기독론』, 170.
29) 박형룡은 다음과 같이 자세히 그리스도의 모든 생애가 고난의 생애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최종 고난이 그의 수난 전부를 구성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나 사실인즉 그의 전 생애가 고난의 생애였다. 베들레헴 외양간의 탄생, 애굽으로의 망명(피난), 나사렛 목공소의 노동, 본대오 빌라도에 의한 십자가의 고난을 받기까지의 전 생애는 수난 충만한 생애였다.” 박형룡, 『기독론』, 173.
30) Berkhof, Systematic Theology, 380 볼 것.
끝으로 박형룡은 <능동적 순종> 제하에 능동적 순종을 따로 설명한 다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을 가르치는 성구들은 마 3:15; 5:17; 요 15:10; 갈 4:4,5; 히 10:7-9 등이다.”라고 결론짓는다. 31) 그러 나 이 성구들은 수동적 순종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 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에서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이라는 표현은 그리스 도의 모든 생애를 의미하기 때문에 능동적 순종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 량하시고”라는 표현은 수동적 순종으로 보인다. 여기 속량( ἐξαγοράζω )은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 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에도 쓰인다. 이 속량은 능동적 순종이라기보다는 십자가의 수동 적 순종인 것이다. 이렇듯이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통한 사역에서 어떤 사역은 능동적 순종이고 어떤 사역은 수동적 순종이라고 나누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박형룡이 강조하듯이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서로 상호 침투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동적 순종을 능동적 순종으로 해석하는 것도 박형룡의 온전한 순종 차원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박형룡은 두 순종의 유기적 연계성을 존 머레이의 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칭의의 유일한 근거는 그리스도의 의에서 발견된다는 것이 우리의 최종 결론이다. 이 근거는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그가 이룩하신 의이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이룩하신 그의 의 이다. 이것은 신인(神人) 곧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의이니 우리의 죄악과 죄로 저주 받은 정상(情狀)의 요구들에 충족되는 의요, 완전하며 변경할 수 없는 칭의의 모든 요구에 해 답하는 의이다.32)
박형룡은 칭의의 유일한 근거를 그리스도의 의에서 발견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능동적 순종 과 수동적 순종, 두 가지 특성이 있는 것은 그가 신인(神人) 곧 하나님이요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따라 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을 지킨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가 신인(神人)이시기 때문에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나지만 이 두 가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박형룡이 인용한 존 머레이는 다음과 같이 그 관계를 설명한다.
우리는 이 땅의 우리 주님의 삶의 어떤 단계들이나 행동들을 능동적 순종으로 배분할 수 없고 어떤 다른 단계들이나 행동들을 수동적 순종으로 배분할 수 없다. 능동적 그리고 수동적 순종 의 구분은 시대적 구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모든 단계나 시간에 나타난 순종의 사역 이며 이 사역은 능동적으로 그리고 수동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우리는 능동적 순종을 그의
31) 박형룡, 『기독론』, 390. 32) 박형룡, 『구원론』, 346.
삶의 순종에 적용하고 수동적 순종을 그의 마지막 고난과 죽음의 순종으로 적용하는 실수를 반드시 피해야 한다.33)
어쩌면 박형룡의 능동적 순종 이해에 대한 오해와 곡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구분하여 그 구분에 맞추어 박형룡의 글을 판단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머레이의 지적 처럼 그리스도 사역을 두 종류의 순종으로 배분하는 것은 그렇게 지혜로운 접근이 아니다. 그리스도 의 모든 사역에 두 순종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능동적 순종을 개혁주의 전통에 벗어난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시대적으로 그리고 단계별로 이해한데서 오는 오해일 수도 있다.
Ⅳ. 결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대한 논쟁이 지엽적이지만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박형룡 의 능동적 순종은 전반적으로 벌코프와 촬스 하지의 입장을 따른 것이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와 일맥상통하는 입장이다. 비록 칼빈은 능동적 순종 혹은 수동적 순종이라는 표현은 하지 않았 지만 이러한 개념들은 그의 저서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될 수 있다. 칼빈은 총체적 개념의 순종을 말했 지 구분되는 순종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벌코프, 핫지, 박형룡처럼 두 가지 순종을 구분해서 주장 했다고 해서 칼빈의 입장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세 사람도 두 가지 순종의 불가분의 유 기적 관계를 강조했기 때문이요 우리의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성된 것임을 철저히 가르쳤기 때문이다.
사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대속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해결해 주신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능동 적으로 율법을 다 지키시고 우리에게 그 의를 전가하셨음을 필요 이상으로 부각시키면 마치 십자가의 대속이 충분하지 않다는 주장으로 오해할 수 있다. 오해로 그치는 것은 다행이지만 정죄로 이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능동적 순종 역시 십자가의 대속의 일환이다. 또한 행위 언약을 이루지 못한 그 자체에서 오는 죄문제 역시 십자가의 대속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모세의 율법이라도 일점일획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시지 않았고 오히려 완전 케 하셨다. 모세 율법도 객관성을 지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이 율법을 주관적으로 판단할 자격 은 없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사법과 시민법이 폐기된 것이 아니라 완성된 것이다. 66권의 정확무오 성은 행위언약에도 적용되고 모세 율법에도 적용되고 아브라함 언약에도 적용되고 새언약에도 적용 된다. 구속사에서 우리가 어느 위치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어떤
33) John Murray,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London: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1), 20.
역할을 하고 어떻게 해석되는지 간에 우리는 반드시 준수해야 할 율법인 것이다. 우리 스스로 의로워 지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칭의를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차 원에서 우리가 율법을 준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키지 못했다고 신적 속성을 지닌 율법의 원 래적 속성이 결코 변질될 수 없다. 단지 성취되고 완성될 뿐이다. 우리와 상관없이 율법은 여전히 그 신적 속성을 품고 있다.
총신의 개혁주의가 박형룡에 의해서 세워지고 견고해진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박형룡 이라는 세계적인 학자를 한국교회에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한국교회는 이미 자유주의와 다원주의와 세속주의와 젠더사상에 넘어갔을 것이다. 총신과 합동 교단이 이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삼 위 하나님만 의지하고 성경만을 붙들고 개혁신학을 세워나간 죽산 박형룡 때문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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