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에서의 잘못된 습관적 행태에 대하여 생각함
이천우 목사
우리가 교회 안에서 행하는 것에는 습관적으로 하는 이런 저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것에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갖는다는 것에서 하고 있는 찬송<찬양>의 경우 힘 있게 박수를 치면서 몸을 흔들게 하며 부르게 하는 것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이렇게 찬송하지 않으면 찬송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기까지 하는데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찬송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며, 성경적으로 옳으며, 우리가 신앙적으로 가져나가야 하는 바른 것인지요.
교회로 연합하여 공예배에서 온 성도들이 함께 부르는 찬송은 ‘예배찬송’이라고 말합니다. 예배에서의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은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음악적인 요소를 담아서 시적인 표현으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기리며 그분의 경외함에 있는 것이 찬송입니다. 그런데 찬송이란 용어 사용에 있어서 오늘날의 성도들은 예배에서나 그 외의 성도들의 모임에서나 혼자서나 '찬양'(讚揚)이란 말을 더 즐겨 사용하고 있는 편입니다. 그래서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찬양이라는 단어와 함께 찬미(讚美), 찬송(讚頌)이라는 단어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모두는 각기 단어를 쓰는 그 분위기만 조금 다를 뿐이지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찬송이나 찬미나 찬양은 모두가 같은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모두가 그 의미는 "하나님이 행하신 덕을 칭송하는 노래"입니다. 찬송이 이런 것이기에 그 노래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권능을 높이는 노래말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권능을 높이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찬송'입니다.
이러한 찬송을 아무 것이나 흥얼거리면 되는 식으로 하거나 마치 광란의 무대에서 부르듯이 해서는 곤란합니다. 이러한 찬송은 대개가 주관적인 체험이나 개탄하는 내용, 혹은 호소하는 식의 노래, 또는 온갖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서 벗어난 비성경적이고 비신앙적인 내용을 담고 있거나 지극히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도무지 찬송이 되지를 않습니다. 곡이나 가사가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을 기리고 모시는 글로 되어 있어야 하며, 그래서 찬송을 할 때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과 선하심, 또 그의 기이하신 지혜와 능력을 찬송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하나님의 무소부재와 무소불능과 또 그와 같은 독특한 속성들에 대해서 찬송을 하는 것이 예배 시에 부를 수 있는 합당한 찬송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칭송하는 노래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높이 나타내 선양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찬송의 가사나 곡이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내용을 가지고 그 분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에 합당하게 찬송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객관성이 결여되고 주관적인 체험이나 자기의 어떤 감정을 갖게 된 곡이나 가사로 표하는 것은 아무리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찬송해도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여서 드릴 예배 찬송으로 사용하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종종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는 어떤 한 사람의 주관적인 체험과 그 감정을 예배 찬송화 한 것도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격해서 신앙을 고백하는 시나 곡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고 하기 쉽습니다만, 공교회로 예배드릴 때는 한몸된 공동체의 성격으로 발하는 소리이기에 다 함께 믿음에 있으며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불러야 하는 것인 만큼 경박하게 부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찬송을 부르려고 신중을 기해도 자칫하면 기교적으로 부르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훌륭한 곡과 가사로 된 찬송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가 하나의 음악이기 때문에 그 자체만을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들이 찬송에는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자신도 모르게 몰입하여서 찬송을 자칫하면 자신의 감정에 도취되어서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음악을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요소인 리듬이나 멜로디나 화음과 같은 음악적인 요소에 도취되면 그러한 음악적인 요소 자체를 즐기는데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찬송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각보다는 찬송을 이루고 있는 음악적인 요소들 자체를 즐기는 쪽으로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중세 로마 카톨릭에서는 음악의 장엄함이나 기교 쪽으로 빠져서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결례(缺禮)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종교 개혁자들 중에는 아예 음악 자체를 즐기거나 기교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악기의 사용을 금하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화란 교회는 오르간을 아예 교회당에서 없애버리고 반주 없이 단지 목소리로만 찬송할 것을 결의했겠습니까?. 당시 청교도들은 헨델의 메시야 같은 곡도 망령된 행위로 보았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여 찬송하는 일을 일반 극장에서 대중에게 돈을 받고 연주한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죤 뉴톤(J. Newton;1725-1807)은 크게 반대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처음에 헨델은 그 곡을 발표할 때 지금의 메시야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고 단지 '거룩한 오라토리오'라는 곡명으로 연주했습니다.
왜 이처럼 찬송에 대해 극히 예민한 반응을 가졌겠습니까? 이는 그렇게 해서라도 당시의 찬송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쪽 보다는 음악의 기교나 장엄함 자체에 빠져있는 데서 건져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교회 개혁을 주도해 나가면서 신경을 쓴 여러 가지 중에 하나가 바로 찬송입니다. 이는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당 안에 거대하고도 웅장한 오르간을 들여놓고서 연주로 종교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칼빈은 찬송의 개혁의 필요성을 크게 절감하고서 찬송 음악의 선정 원리로 다음의 두 가지를 삼았습니다. "첫째, 곡은 반드시 가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가사의 정신을 잘 나타내 주어야하니, 곡은 경박하지 않고 장중한 것이 되어야 한다. 둘째, 음악성이 없는 일반인들도 쉽게 불러야 하고, 사람의 주관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것을 배제하고,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칼빈은 이런 원리에 따라 시편에 곡을 붙여서 찬송가를 발간하였으니 그때가 1562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네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송하는 실상은 참으로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하면서 온갖 인본주의적인 자태는 다 보이고 있습니다. 몸을 심하게 흔들어대면서 크게 박수를 치면서 고성으로 찬송하는가 하면, 사람의 말초신경을 극도로 자극하는 악기들을 갖추어 놓고 거기에 따라서 요동치듯이 찬송하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통성으로 부르짖어 기도하게 했다가 또 찬송하게 했다가 하는 반복을 통하여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찬송을 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찬송을 이렇게 하는 것이 마치 성경적인양 호도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찬송에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의 경우에서 몸을 들썩거리며 크게 노래하며 박수치는 행위는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적용하는 대표적인 사례일 뿐만 아니라, 이 모두는 참으로 무지한 신앙의 행태입니다. 그리스도교를 한갖 잡다한 무속신앙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참으로 이러한 신앙의 행태를 경계해야 합니다.
찬송,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어떻게 불러야 하겠는지요. 우리는 그 답변을 요한복음 4장1-42에서 예수께서 수가성에 사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신 말씀에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성령)과 진정(진리)으로 예배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구약의 예언에서 메시야를 계시해 주시고 진리대로 메시야가 와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라고 할 때 예수께서는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구약에서 예언하신 메시야가 먼저 와야 그 다음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비로소 드릴 수 있게 되는데 그 메시야는 다름 아닌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그분이 이루신 구속 사역을 믿는 믿음에 있으며, 그래서 이 믿음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이나 그 노래에 있는 것, 그것이 찬송입니다. 이 찬송의 진지함에 있는지요.
헌데, 찬송을 바르게 부르고자 하여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찬송곡이 정작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서는 참으로 적다는 것입니다. 예배 찬송에 합당하지 않은 곡들이 대다수 차지하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찬송가가 나올 때까지 이 찬송가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알면서도 여전히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지금의 교회 모습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안고 있는 그러한 실정에서도 - 예배에 합당한 찬송가가 나올 수 있기를 주께 구하며 - 찬송을 부르는 태도에 있어서는 지금 당장에도 얼마든지 조심하며 올바른 자태를 가져나가는 것에서 할 수는 있지 않겠는지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습관적으로 잘못 가져나가고 있는 찬송 부르는 행태에 있어서 박수를 치며 몸을 춤추듯이 흔들며 빠르게 불렀다 늦췄다 하며 소리를 높였다 낮췄다 하며 의도적으로 감흥에 도취되는 식으로 하는 것은 그 문제성을 의식하고서 얼마든지 바르게 잡아 나갈 수 있지 않겠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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