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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구약설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시46:1-5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존 칼빈
시46:1-5
『[1]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알라못에 맞춘 노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3]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서 론
본 론
1. 평생 닥치는 모든 환난 중에 우리의 도움이 되심
2. 좌절은 곧 불신앙
3. 작은 시내가 하나님의 성읍을 기쁘게 함
4. 성소­하나님의 날개 아래
5. 하나님의 도성­교회: 보이지 않는 영원한 요새
6.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새벽: 하나님이 정하신 가장 적절한 때
결 론
서론
만일 우리가 각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실제로 체험했던 것을 깊이 생각한다면, 확실히 우리는 단호하게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또한 그런 생각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로 부르시는 자들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나아가] 마귀와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벌이는 일들을 좌절시켜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정신이 맑은 아침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도움을 느끼면서도 밤에는 조금도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잊고 사라지게 만든다면, 그 원인은 우리의 배은망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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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앞에 항상 있어야 할 그 생각을 묻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런 생각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모든 공격과 충격에 대해 강하고 이기는 자들이 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표지로 우리를 이끄는 교리(진리)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인용한 시편이 [이 일에] 아주 적당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사방에 보이는 근심거리와 더불어, 우리를 방문하실 때, 그때[마다] 우리는 수시로, 아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그에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주 절망적일 때까지 [부르짖기를 유보하고] 기다리거나, 그런 때를 찾아서도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전에 듣고 읽은 것을 이용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슨 환난을 보내실 때 그들은 성경을 적용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마치 녹슨 무기를 갖고 있는 것과 같아서 그것을 적절히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그 무기들을 어느 쪽으로 다뤄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합니다. 따라서 내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약속의 힘이 입증될 수밖에 없을 때까지 기다리지 맙시다. 무기를 가지고 모든 공격과 유혹에 맞서 싸우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준비 없는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를 무장시키시고 보호하실 것임을 덧붙여 말합시다.
본론
1. 평생 닥치는 모든 환난 중에 우리의 도움이 되심
이제 기록되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고 힘이시며, 환난 때에 발견되는 도움이시다”(1절)라고 합니다. 간혹 [도움이] 발견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러나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 시편을 쓴 선지자가 신자들을 가르칠 생각을 품은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언제나 그를 굳게 소망해야 한다는 것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선지자는 백성들이 이미 체험하고 느낀 것을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해 그들의 보호와 힘이 되셨다고 말하며, 나아가 우리가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이 거기 계셨다고 덧붙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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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하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선지자는 여기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심지어 징벌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라면 ‘놀란 사람들처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에라도 위로부터 내려오는 구원을 이용하라고 권면합니다. 끝까지 동일한 것을 바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성령께서 한 시대에만 말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시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그의 피난처로 부르시는 자들은 그 교리(진리)를 실천해야 함을 압시다. 바로 우리가 그 부르시는 자들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적용합시다. 그리고 성령께서 옛 조상들이 하나님에게서 느낀 동일한 체험을 우리도 발견하리라고 말씀하시니, 이것을 의심하지 맙시다.
물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피난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불신자들은 오히려 그 반대로 느낄 것입니다. 실제로 또한 모든 피조물이 저들의 원수가 되고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그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시는 일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만일 우리가 그의 말씀 안에서 확고한 증거를 갖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가 그 시대에서처럼 오늘날에도 환난중에 도움과 구원이 되시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맙시다.
이 환난이란 말은 자주 쓰여지는 말로서 주목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려고 자주 원수들을 자유롭게 활동시키신다는 경고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흔히 말하듯이 지상 낙원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결합시켜야 합니다. 즉 첫째, 우리가 교회 안에서와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도 환난을 당하리라는 것과 둘째, 원수들이 얼마나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지 그들이 우리를 완전히 멸망시키리라고 생각될 정도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적절한 때에 우리의 도움이 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름 받아 그에게 피난처를 두는 자들을 항상 도우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환난이라는 말은 그들이 수없이 슬퍼하고, 흔히 말하듯이 고뇌의 열매를 먹으리라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 첨가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돕기 위해 준비하고 있으심을 느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환난이라는 말은 복수형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한번 그의 손을 우리에게 뻗쳤다고 해서 같은 일을 그만 두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백 번 그에게 부르짖어도 그는 우리 가까이 계실 것입니다. 내가 항상 말해 왔듯이, 우리가 부르짖는 즉시 응하시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렇게 복수형으로 말씀하신 것은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는 권면을 더욱 확고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단 한 번의 환난 가운데서 적절한 때에 우리의 도움이 되시리라고 기록되었다면, 그것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궁핍과 모든 고뇌와 모든 위험 가운데서 우리를 도울 준비가 되셨다고 기록되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이중의 가르침을 얻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한 번 공격을 당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힘과 능력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을 알며, 그에게서 그런 완전함을 발견할 것이며, 우리가 한번 도움을 받았다면 앞으로도 적절한 때에 많은 도움들을 얻을 것이라고 소망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할 때라면 천 번이라도 도우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2. 좌절은 곧 불신앙
따라서, “땅이 변한다해도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진다해도 지진이 있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2~3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뒤집힌다해도, 바위들이 서로 충돌한다해도, 세상이 멸망하리라고 생각하게 할만큼 거대한 폭력이나 위험이 있다하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영광을 받으시지 못하고 계시다는 것과 우리가 그분의 도우심을 합당하게 칭송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무시할 뿐입니다. 우리가 천박하다는 것과 어리석게도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는, 우리가 모든 변화와 바뀜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우리가 그의 영예를 훔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땅에서 무슨 소요와 소란이 생기는 즉시 우리는 좌절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그런 소란중에 함께 접전할 때, 그들은 그들이 매우 부끄럽게도 하나님을 모욕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우리의 보호자가 되신다고 기록되었다면, 우리는 우리 구원을 방해하는 모든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돕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고찰하고 고려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도움의 소식을 접할 때 두려워한다면, 그러면서 정도 이상으로 염려와 두려움으로 계속 당황한다면, 우리가 소요와 소동을 듣는 즉시 이내 근심에 빠진다면, 그리하여 아무런 소망을 갖지 않는다면, 이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를 도울 하나님이 하늘에 더 이상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일수는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신앙이 압도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에 위반되는 모든 것들에 저항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단순히 “형세가 어찌됐든 내가 너희를 도울 것이다”(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반대되어 보이는 것이 나타날 때, 우리는 우리의 지각이 불붙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깨끗이 잊혀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많은 근심거리와 불신을 품고 있는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많은 모독을 저지르며, 그의 능력을 감소시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그를 그의 보좌에서 끌어내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여기서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도움이 되실 것임을 확신한 뒤 환난중에서 그를 부를 것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질 않습니다.
그러면 이 환난은 무엇일까요? 시편 기자는 성도들이 원수들에게 한마디도 듣지 않고 단 한 번도 시비에 걸리지 않고 편안히 있을 때 하나님께 피난처를 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혹이 너무 크고 끔찍해서 산이 바다 복판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여겨질 때 하나님께 피난처를 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서너 사람이 움직이고 소동을 벌일 때 우리가 놀랜다면 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물론 선지자가 여기서 사람들이 흔히 극단적 표현이라고 말하는 화법을 사용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를 신앙으로 잘 교육하기에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우리를 너무도 무서운 혼동으로 이끌고 가서 우리가 더 이상 하늘과 땅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도처에 병사들의 북소리가 울리고 대포를 배치하며 모든 준비를 하며 기병과 보병을 거느리는 일이 생길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산이 흔들려 무너져 사라지는 것 같고 도처에 우리를 삼키려는 입벌린 심연들뿐이라고 가정해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리라고 확신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말은 우리가 무감각하다거나 또는 그것이 그토록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에게 아무런 위험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갖는 신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말하는 것은 불신자들이 갖는 그런 놀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 머무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약속이 어떤 가치를 갖는지 맛보지 못하고 그에게 기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들이 받아 마땅한 대가를 지불하십니다. 즉 그들은 나뭇잎 하나만 떨어져도 사라져버리는 사람들과도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지각도 기억도 용기도 없으며,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들의 슬픔을 경감시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선지자가 다음 사실을 간단히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두려워하면서도 그 두려움으로 짓눌리지 않고 하나님 안에 굳건히 서서,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배은망덕으로 인해 눈으로 보는 것만을 알고 생각하지만 않았다면 여러 번 느꼈음에 틀림없는 그의 도움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3. 작은 시내가 하나님의 성읍을 기쁘게 함
이제 그는 “작은 시내가 하나님의 성읍을 기쁘게 할 것이라”(4절)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충분히 알려진 대로 이해된다면 매우 주목할만한 것이나, 거기에는 다소간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 있습니다. 사실 이 말에는 소리 없이 부드럽게 흘러 마치 물이 없는 듯한 작은 시내나 개울이라는 뜻 대신 맹렬한 힘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 구절은 잘못 번역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으로 선지자가 간단히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비록 우리에게 요새나, 성벽이나 사람이나 중추부(vitailes)나 대포나 기타 세상에 속한 어떤 도움이 없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없을지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도움들이 단번에 우리를 충족시키고 만족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뜻하는 바를 주목하고 그가 예루살렘의 정황에 대해 고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의합시다. 사실 비록 예루살렘이 강하고 튼튼한 성읍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성읍 가운데 연못을 형성하는 작은 시내 또는 개울 외에 큰 강이 없으며, 모든 것이 ‘실로아’(Siloa)라고 불리는 시내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이유에서 유대인들은 무슨 위험이 있거나 두려움에 떨 때마다 “아아, 우리가 어찌 될까? 우리에겐 큰 강도 없고, 수로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적들을 몰아낼 수 없다. 우리에겐 말할 거리도 못되는 작은 시내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물은 있으나 그것은 도성을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개울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왜 선지자가 작은 개울이 하나님의 도성을 기쁘게 한다고 말하는지를 이해하십시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내가 방금 말한 이 정신을 가진 것으로 인해 그들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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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들이 열등한 수단에 너무나 의존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너희가 실로아 물을 비난했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 물은 천천히 흐르기 때문에 크고 깊은 수로를 만들 곳이 없으며 적을 두렵게 할 곳이 없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비난하는 이유는 너희가 이 부패한 것들에 달라붙어서 하나님이 너희의 안전을 위해 일하실 수 있음을 모르며 그의 능력만으로 너희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실로아의 물을 버렸고, 너희 적들을 방호하는 큰 강을 원했다. 이는 너희가 나일강을 마음대로 부려, 원할 때에 넘치게 하는 이집트인들과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갖고 있는 앗시리아인들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 나라에서는 성읍들이 잘 계획되어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는 샛강들이 있다. 간단히 말해 그것들은 접근할 수 없는 장소들이다. 너희는 저것들을 동경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그래 내가 너희에게 사납고 맹렬한 강을 보내겠으며, 그것을 너희의 머리 위로 지나가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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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씀하신다. 실로아 강은 너희 발에 있으며, 너희는 그것이 한낱 작은 물줄기임을 볼 것이며, 너희에게 눈가리개가 없는 한 너희를 그의 능력으로 기적같이 지키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또한 그는 너희의 믿음이 그를 향하도록 너희에게서 모든 세상적인 도움을 없게 하신다. 누구든지 이 세상의 도움과 수단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는 그만큼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너희 자신을 그에게 맡기는 이런 영예를 그에게 돌리지 않고 다른 도움을 구했기 때문에, 그는 끔찍하고 맹렬한 물줄기를 일으켜 너희 머리 위로 지나가게 할 것이며, 그때 너희는 그가 제공한 그의 도움으로 만족해야 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너희 원수들의 이런 대비책을 갈망했으며 그들의 방식에 유혹받아 너희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에서 떨어졌다.”
따라서 우리는 이사야의 책망이 여기서 선지자가 말하는 것과 일치함을 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는 이 악마적 격언을 실천해서는 안되며, 비록 다른 모든 도움이 우리에게서 사라진다해도 오직 그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에겐 물 한 방울밖에 없으며 우리의 적들은 보기에도 놀랄 정도로 강한 힘을 갖고 있다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조용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요컨대 이곳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무엇보다도 단순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모든 방면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없고 우리의 원수들이 밤낮으로 찾아와 우리의 목을 자르려 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런 지경에 처해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될 때에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시편에 기록되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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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우리편에 계실 때만이 우리를 충족시키시며 그의 보호 아래 우리를 지키시리라는 것을 알도록, 우리가 그에게 합당한 영예를 드리는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것일 뿐입니다. 성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것을 같은 용도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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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소
하나님의 날개 아래
이렇게 말하고 난 뒤 이제 선지자는 자신이 주의 장막의 성소에 있다고 덧붙입니다. 그는 당시 유대에 있던 모든 성읍들과 마을들을 주의 장막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약궤 양편에 있는 천사들(cherubims)이 그들의 날개를 펼치라고 명하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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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모든 백성이 마치 그의 날개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유대 전역에 드리워진 장막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실로 하나님은 한 가운데에 그의 성소를 갖고 계시며, 사람들이 그의 법을 따라 그를 경배하기 위해 오면 그 자신을 보이시며 그들의 기도가 헛되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오늘날에는 율법 시대에 있었던 것과 동일한 물리적 성소는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에 그의 성전을 세우셨음을 압니다. 비록 우리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지만 말입니다. 다시 말해 불쌍한 교회가 교황의 독재 가운데서 여기 저기 흩어져 있지만 말입니다. 이곳에서는 마귀가 모두 무기 하나씩 들고 다니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약간의 숨겨진 씨들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마귀들과 진리의 원수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신 것, 즉 그에게는 자신을 섬길 백성이 언제나 있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입증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마치 여러 조각으로 찢어진 몸과 같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모두를 모아 참된 성소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연합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 바울의 말대로 신성의 모든 충만이 상징이 아닌 실체로 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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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명백히 ‘육체로’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더욱 잘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번 그의 능력을 세상에 펼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을 보존하기까지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막이 한 성소 아래 있음을 본다면, 여기에 기록된 말씀이 우리에게 속한 것임을 확신하고 의심치 맙시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 즉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면 그가 우리의 힘이 되시며 우리의 성소가 되시리라는 말씀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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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 말이 성소와 힘을 동시에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기에 약속된 것, 즉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것에 참여자가 되리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말입니까? 그는 말하기를 다가오는 모든 소요와 소란에 걱정하지 말며, 사람들이 음모나 모사를 꾸미고 실행할 때 “모든 것이 망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지,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이렇게 저렇게 행하며, 우리는 매 순간 멸망할 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할 때], 선지자는 “아니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날 때 너희는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란 그를 다른 모든 것 위에 높이 세워 그를 항상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아! 주님, 이 세상의 왕들과 권세자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모든 짓을 하고 백성이 좌충우돌하며 소란을 일으키며, 우리는 매순간 공포로 삼켜지는 듯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당신은 이 모든 것을 경멸하시며 결국 그들을 비웃으셨음을 보이시고 밝히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들 모두가 당황하게 될 정도로 끔찍한 방식으로 그들을 흩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그로부터 도움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시면서 우리의 궁핍 속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제공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가장 극도의 위험에 처하게 될 때 그분의 보호 아래 머문다면 그가 충분히 우리의 담과 성벽이 되시며 우리의 부족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사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하나님을 어떻게 거룩하게 해야 할지를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구절에서 기억해야 할 내용입니다.
5. 하나님의 도성
교회: 보이지 않는 영원한 요새
이제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거하시니 그것[=성]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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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루살렘 성읍에 대한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곳을 자신의 보좌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이루어진 시간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 조상에게 상징으로 말씀하신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함을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치 성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주는 마지막 장에서 말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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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젠 더 이상 그 도시를 바라보거나 거기에 머무르지 맙시다. 왜냐하면 스가랴가 본 것처럼 예루살렘 성읍이 동에서 서까지 이르며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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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스가랴]는 척량 줄을 온 세상에 펼치는 천사가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한 성읍에만 거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의 이름이 불리며 안식과 평안을 위해 그의 약속을 붙드는 모든 민족 가운데 거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유의합시다. 우리가 그의 보좌를 준비하고 그분으로 통치하시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그림자 아래에서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훨씬 더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이라는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이유입니다. 즉 그가 우리 조상들이 구약 시대에 느끼고 감지했던 것보다 더 가깝고 친밀한 방법으로 자신을 우리와 연결했기 때문에 그는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이미 내가 말한 대로, 그 보좌를 두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무런 저항 없이 [우리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야수처럼 군다면 그때 우리는 확실히 여기 기록된 것을 자랑할 수 없으며, 그를 통해 도움을 얻으리라는 희망과 믿음을 가질 수 없고, 오히려 그가 우리에게 한 방울의 은혜를 보내시기는커녕 우리는 천 번 망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이들처럼 그에게 순종한다면 그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의심하지 맙시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거하시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불결한 마구간에 거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에 대해 주의합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깨끗케 하는 법을 배웁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요구되는 대로 깨끗하고 완전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아,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의 노력과 열심이 깨끗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나 그의 성전을 위해 받아들이신다는 것은 너무도 확실합니다. 그리하여 선지자는 “우리가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고 결론을 짓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도시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여기에는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 민족, 영토, 국가, 정부, 정치체제가 서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매우 강하고 잘 정돈되고 정비된 많은 도시들이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들이 탈취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나아가 많은 요새들을 갖추고 적들과 대치하는 더 많은 나라들이 있습니다. 또한 “오, 어떤 군대가 우리를 향해 일어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방에서 우리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보라, 한 도시는 적어도 수개월을, 다른 도시는 일년을 지탱할 것이며, 또 다른 도시는 결코 함락되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왕국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미리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이제 선지자는 여기서 한 마디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헛될 뿐임을 보입니다. 그는 하늘 아래 요동치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실로 우리는 우리 눈으로 수많은 반란과 수많은 새로운 세계들을 보기 때문에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이 변화하며 일정하지 않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마치 새의 보금자리처럼 땅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른 구절에는 그것[=교회]은 감지될 수 있는 어떤 토대도 없이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변하고 항구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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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국가, 왕국, 권세, 정치체제들이 바뀌고 변화하며 수많은 혁명들을 거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것들이 그들 자신의 힘과 지혜에 기초를 두고 그들 자신의 수단과 방어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잘 정돈되고 정비가 되면 곧 하나님을 무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그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우리가 마치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 깃들 곳을 찾지 못하는 나뭇가지 위의 새와 같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더불어 계시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의 판단에 따라 이미 삼켜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쓰러지지 않고 흔히 말하듯이 우리의 발로 똑바로 서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내팽개쳐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6.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
새벽: 하나님이 정하신 가장 적절한 때
이제 선지자는 “하나님이 새벽에 그의 교회를 도우실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 누군가 말하듯이, 이 모든 약속들은 우리를 우아하게 지키고 우리를 잠으로 달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매분 매시간 도움 받을 필요가 없기나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가 때론 이렇게 때론 저렇게 공격을 당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새벽에 우리를 도우실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께로 달려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지체하지 않고 적절한 때에 오시리라고 약속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늦으시고 차갑고 게으르며 좀더 서두르셔야 한다고 수백 번도 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입니다. ‘새벽에’라는 말과 관련해 우리는 그것을 언제 우리를 돕는 것이 선하고 유익한지를 아는 하나님의 섭리에 돌려야 합니다. 그밖에 우리가 경고 받는 것은 우리에게 항상 낮이 있지 않고, 즉 우리가 항상 대낮에 있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길(way) 밖으로 이끌어 가는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어둠 속에 있어야 합니다. 밤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고 (흔히 말하듯) 우리는 한 치 앞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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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가, 마치 그것이 어두운 밤으로 덮여 있듯이, 어떻게 짙은 어두움을 지나야만 하는지를 보십시오. 그러나 아침은 올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고통과 슬픔이 지속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끝장 내실 것입니다. 그것들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만큼 지겨울 정도로 오래 지속될 때, 홀연히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보듯이 동이 트게 하실 것이며,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적절한 시기에 그의 백성을 도우시리라고 여기 기록된 말씀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은혜와 자비를 우리에게 비추셔서 떠나지 않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증거한 것처럼 우리의 의무는, 이 약속이 율법 아래 있던 조상들에게 속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속한다는 것을 느낄 때까지, 기다리고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우리 죄를 인정하면서 우리 하나님의 존엄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가 기꺼이 아직 우리에게 있는 불신의 잔재를 교정하고 고치시며, 그의 약속 안에서 더욱 더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 우리의 슬픔과 고통이 덜어지고 완화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괴로워할 때, 우리가 끊임없이 언제나 그를 의뢰하고 그 안에서 안식하며 더욱 당당하고 꿋꿋이 서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알기로 천지는 없어지되 진리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마땅히 부르짖어야 함에도 그분께 부르짖지 못하게 하는 커다란 약점을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타오르는 그런 광포에 휩싸인 우리의 원수들을 통해 우리를 시험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가 우리로 하여금 이 가르침을 실천하게 하사, 우리를 믿음 안에서 지속적으로 꿋꿋하게 할뿐만 아니라 그에게 감사를 드리고 그를 찬양하며 그것들을 우리 후세에게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우리 시대에 실천한 것처럼, 그의 거룩하신 이름에 대한 기억이 항상 지속되고, 그 이름을 몰랐던 자들 가운데서도 영예를 얻게 되도록 말입니다.(*)
* 1560년 5월 12일에 행한 설교(SC, VII, 73). 불어 원본은 사라지고 영문 번역본만 발견되어 있음.
* 이 설교문에 붙여진 소제목과 주(註)는 없는 것이지만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첨가하여 번역, 편집했다.
주(註)
1. unkindness. 불어의 ungratitude로 생각됨.
2. 개역 성경의 “큰 도움”을 뜻하는 것 같다. 영어성경은 대부분, “a very present help in trouble”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즉 어려운 때에 즉시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뜻.
3. 사 8:6.
4. 목에까지 미치리라(사 8:8).
5. 아마도 시 118편을 가리키는 듯하다.
6. 롬 8:31~39.
7. 출 25:20, 왕상 8:6, 7.
8. 골 2:9. 9. 사 8:13~14.
10.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한글 개역).
11. 고후 13장에는 이런 표현이 없다. 칼뱅은 혹 고전 10:11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
12. 슥 2:5 이하.
13. 칼뱅은 히 11:1과 고후 5:1을 생각하고 있는가?
14. 원문은 “우리 앞의 두 손가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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