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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한국교회사

한국교회 약사

한국개신교 전래 이전 서양종교와의 접촉


한국에 개신교가 어떻게 처음 들어오게 되었는가? 


◉ 초기에 서양 종교, 문화와의 접촉
1) 중국을 통한 경교와의 접촉문제 - 중국에서 경교 금기령과 지나친 토착화로 인해 빨리 사라졌다. 이것이 한국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긍정과 부정의 두 입장이 있다. 고든 여사가 찬성하며 불국사의 돌 십자가를 증거로 제시하나 십자가 모양이 다르며 경교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없다. 
2) 한국이 최초로 유럽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9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쿠르드 지바”를 통해서이다. 


◉ 임진왜란 이후 서양 문화와의 접촉
1) 임진왜란을 통한 접촉 - 인도를 거쳐 일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은 전쟁 중 한국에 와서 일본인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에게 전했다는 입장도 있고, 일본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에게 선교활동을 했던 것이다. 나가사키의 어느 신부가 자신의 선교보고에서 조선포로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2) 박연과 하멜의 입국 - 1627년 네덜란드 벨트브레(박연)가 제주 앞바다에 표류하여 훈련도감에서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움. 1653년 하멜 일행 표류하여 36명 제주 도착했다. 이후 하멜 표류기로 서양에 한국 소개된다. 
3) 바실 홀과 맥스웰 - 1816년 군산 부근 정박. 바실 홀의 조선 항해기를 통해 한국이 알려졌고 당시 조대복 첨사에게 성경(KJV)을 선물하였다. 


한국개신교 전래의 준비(1832-1884)


◉ 한국개신교 전래를 위한 노력
1) 칼 귀츨라프 - 1832년 7월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 귀츨라프 선교사가 충청도 고대도에 와서 전도문서와 성경을 전해주었다. 감자도 전해주고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써 주었다.
2) 로버트 토마스 - 1866년,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하여 대동강에서 성경을 전해주고 순교하였다. 이 때 박춘곤이 받아서 읽고 나중에 영주교회 장로가 되었고, 한 집에는 선교사들이 떨어뜨린 성경 3권으로 집을 도배하였는데 이곳이 나중에 널다리교회가 된다.
3) 알렉산더 윌리엄슨 - 토마스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했던 인물로 한국에 관한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하여 1870년에 두 권으로 저술(한국에 관한 몇 가지 설명을 곁들인 북중국, 만주, 동몽고 여행기)하여 한국을 서구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 개신교 선교 준비
1) 국내에서의 상황(준비): 대원군의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가 있었다. 이에 국내에서도 ① 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친일파), 일본의 메이지 유신 모델, 1884 갑신정변 실패. ② 위정척사파 - 최익헌, 개항 반대, 동양의 것 즉 우리나라의 것이 더욱 좋다는 입장 ③ 동도서기파 -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중국의 입장으로 서양의 모델로 필요한 것들을 선별 수용하자는 것이다. 결국 개화파의 주장대로 문이 열려 개신교가 들어오게 된다.
2) 중국에서의 복음의 준비: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헬라어 성경 번역했다. 이 때 이응찬과 백홍준도 함께 번역하며 신앙을 갖게 되고 서상륜(소래교회)을 치료해 주며 복음을 전한다. 인쇄 식자인 김청순 역시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 때 예수셩경젼셔 번역된다. ‘하나님’ 사용하나 평안도 사투리가 많았다.
3) 일본에서의 복음의 준비: 이수정은 민영익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가 농업 기술 배우려는 목적이었으나 복음을 접하고 개종하여 간증집회 및 미국의 선교 잡지에 한국 선교 동원을 위한 글을 쓰고 이후에 성경번역까지 하게 된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그의 편지에 영향을 받는다.
4) 미국에서의 복음의 준비: 2차 대각성 이후에 미국에 엄청난 복음의 준비가 이루어졌다. 1819년에 감리교 내 해외 선교부가 만들어지고 1837년에 장로교도 만들어진다. 이 때 D. L. 무디가 활약하였다. 


◉ 빗장을 푼 은둔의 나라
1) 조미수호조약 1882년 5월 7일 체결되어 제물포가 개항되고 선교사 입국의 배경이 된다. 
2) 한국선교를 위한 노력: 견미사절단
견미사절단은 조선에 대한 전문가 윌리엄 그리피스, 감리교 목사 가우처 등과 만나서 한국 선교의 길을 열게 된다. 또한 하버드 대학 교수이자 국교 수교와 관련된 특별 책임을 맡은 로웰이 홍영식과 함께 한국에 입국하여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 저술한다. ⇒ 한국의 개신교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 속에서 이미 준비되어 왔던 것을 볼 수 있다. 


복음의 수용과 확산(1884-1900)


◉ 각국 선교사들의 입국
1) 알렌(1884) - 광혜원을 개설했다. 민영익이 상해를 입은 것을 치료해준 다음 광혜원을 열게 된다. 노춘경에게 복음을 전한다. 가정예배를 정착시킨다. 
2) 언더우드와 아펜젤러(1885년 4월 5일): 그리고 존 헤론(의료선교)이 입국한다. 
3) 기타 선교사와 선교단체
- 영국성공회(1890년), 호주 장로교회(1889), 미국 남장로교회: 맥코믹 신학교 출신의 레이놀드, 전킨, 테이테(1892년), 게일의 입국(1889년), 하디의 입국(1890년), 캐나다 장로교회, 북감리교: 아펜젤러(배재학당), 스크렌톤(이화학당, 1885년), 남감리교: 윤치호의 요청과 노력으로 리드(Reid) 선교사 입국(1896년), 동양선교회(성결교): 나카다 쥬지의 한국 전도여행(1904년), 카우만, 길보른, 한국인 정빈의 입국(1907년) 토마스 선교사 입국(1910년)
- 동아기독교(침례교): 엘라 딩 선교회에서 7명의 선교사 입국(1895년), 그 외 플리머스 형제단(1896년), 러시아 정교회(1898년), 안식교(1904년), 구세군(1908년) 
⇒ 이와 같이 선교사들과 선교 단체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
1) 장로교 선교사들의 사상: 초기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청교도 전통의 보수적 복음주의 노선에서 신앙훈련을 받고 또 그와 같은 입장의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파송된 자들이었다. 청교도적이고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이들이 성경의 초자연적 계시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존중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888년부터 1902년까지 맥코믹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 14명이 한국에 입국했다. 선교사들의 입국과 관련된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거의 같은 시기(1884년-1908년)에 다양한 개신교 선교회가 동시에 입국하여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둘째, 장로교는 4개의 선교회가, 감리교는 2개의 선교회가 거의 같은 시기에 입국함으로써 장․감 선교회가 거의 한국개신교 선교를 주도했다. 셋째, 초기 선교사들은 교파를 막론하고 복음의 열정이 특별했다. 미국에서는 무디의 영향을 받았고, 영국에서는 웨슬리안의 후예들이었다. 모두들 영미에서 일어나는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파송된 선교사들이었다.
2) 남북감리교 선교사들의 사상: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초기 감리교 선교사들은 전형적인 웨슬리안 복음주의자들이었다.


◉ 개신교 선교 정책
1) 의료 및 교육선교: 의료 선교사였던 스크렌톤의 어머니가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2) 문서선교와 성경번역: 언더우드, 아펜젤러, 이눌서, 게일 등이 참여했다. 1906년에 최초의 신약성경 공인역이 출간되었고, 1937년에 개역 성경으로 한글의 저변화, 민중화가 이루어진다. 
3) 선교지 분할: 선교지 분할 협정에 따라 북장로교는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북부와 경상북도를 캐나다선교회는 함경도를, 호주선교회는 경남을, 남장로교는 전라도를, 북감리교는 서울과 경기, 충청 일부와 평양을, 남감리교는 경기북부와 개성, 원산을, 영국성공회는 인천과 서울을. 침례교 는 강원도를, 안식교는 평안도와 서울을, 성결교는 서울과 평안도를, 구세군은 서울에 선교구역을 정하고 전도, 교육, 의료, 자선 사업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4) 네비우스 선교정책: 핵심은 자립, 자치, 자전으로 알려져 왔지만, 핵심은 성경공부에 있었고, 이것이 자립, 자치, 자전의 실현을 가져다 주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주일학교와 사경회를 통해 구체적인 결실로 이어졌다.


◉ 청일전쟁과 교회의 수난&전국으로 확산되는 복음 전파
청일전쟁 등 계속되는 예기치 않은 여러 가지 복음 전파의 장애 가운데서도 한국선교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첫째, 북부지역의 복음 전파는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이후 북부지역에서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기 전 조용히 복음이 확산되고 있었다. 또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북부지역의 복음의 확장을 초래했다. 중부지역의 복음 전파에 대해 서울을 제외한 경기, 충청, 강원 일부 지역 선교에 처음부터 관심을 기울인 선교회는 북감리교와 남감리교 선교회였다. 남부지역의 복음 전파는 주로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회, 북장로교 선교회, 남장로교 선교회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 중심지는 부산, 대구, 전주였다.


한국교회 부흥운동(1900-1910)


1901년부터 1910년 사이를 특징짓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흥을 바로 이해하려면 1) 한국의 부흥운동이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세계의 부흥운동과 같이 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904 웨일즈 1905 인도, 호주 1906 아주사 1908 중국과 만주 등 전세계적 흐름에서 평양 대부흥 운동을 봐야 한다. 2)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나봇의 포도원”으로 강대국들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현장이었다. 러시아, 청, 미국, 일본이 모두 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3) 1897년 네비우스 선교운동이 일어난 후에, 전국에서는 사경회 운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부흥 운동은 진행되고 일어난 것이다 .
◉ 원산부흥운동(1903)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원산에 있던 선교사들까지 함께 모여서 기도회를 가졌다. 이 기도회는 화이트와 맥컬리라는 두 여자 선교사들이 우리 가운데의 문제들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회를 열었다. 하디, 죤스톤의 계속되는 사경회로 인한 은혜가 지속되었고, 장대현 교회의 이길함과 길선주가 은혜를 받았다. 하디는 선교사역의 열매가 없음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고민에 대해서, 자신의 교만함과 영적 공허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것을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여러 선교사들 앞에서 고백하였다. 
1) 평양선교사 사경회: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평양에서 지금까지 가장 많은 선교사가 참석한 가운데 평양선교사 사경회를 열었다. 강사는 하디
2) 존스톤의 입국: 이 즈음에 죤스톤이 입국하였다. 그는 이후 서울 사경회의 주강사
3) 목포 대부흥 운동: 세 번째 사건은, 목포에서 일어난 목포대부흥운동이었다. 


◉ 평양대부흥운동(1907)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집회가 열렸다. 17일의 정오기도회에는 가장 많은 선교사들이 모였고, 이 정오기도회에서 다시 한번 성령의 임재하심이 강하게 일어났다. 마지막 날, 그 다음날 밤, 그때 말씀을 전했던 사람이 길선주였다. 길선주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던 사람이 게일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게일이 그 사건을 기록, 죄악에 대한 고백과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 후, 그 다음날부터 집집마다 눈에 띄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 개인의 영적 각성이 사회개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불신자들도 주일날 가게 문을 열 수가 없었다. 


◉ 백만인구령운동(1909)
백만인 구령운동은 한국 민족 100만 명에게 복음을 전해 민족 복음화라는 거대한 공동의 목표를 이룩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장로교와 감리교 6개 선교회가 힘을 결집하여 전국적으로 추진한 민족복음화운동이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을 촉진시킨 하나의 움직임은 장대현 교회의 새벽기도였다.


◉ 부흥운동의 영향과 성격
1) 순수한 영적각성운동: 성령의 역사로 인한 회개운동이었다는 사실. 영적각성 운동은 성령과 말씀으로 특징되는 회개운동이다. 회개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은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부흥운동은 말씀에 토대를 둔 사경회에서 출발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였다. 
2) 영적 각성에서 사회개혁으로: 이 시대의 부흥운동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영적각성운동이 사회개혁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개인의 영적 각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으로, 교회성장으로 나타났고,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전해주는 것으로 발전해 나갔다. 


◉◉ 제도적인 틀을 다지는 한국교회


◉ 틀을 다져가는 한국교회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최초의 목사 안수, 노회 조직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연결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1907년 대부흥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던 그 해 가을, 한국장로교가 독노회를 조직하고, 감리교가 협성신학교를 개교하고, 또 동양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한 것은 한국교회가 틀을 다져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감리교에서는 협성신학교가 세워지고 장로교에서는 평양신학교를 설립했다. 첫째, 평양신학교는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관련하여 설립되었고, 사경회 제도의 연장하여 학교를 설립한 목적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육성하는 신학교육, 기도와 말씀과 전도 세 가지 전통을 그대로 갖춘 목회자를 배출하려 했다. 동양선교회와 대한기독교 역시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 초기 한국교회 해외선교
1) 대한예수교장로교의 제주선교: 1907년 장로교 독노회에서 장로교신학교의 첫 졸업생인 이기풍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 훨씬 이전부터 해외선교를 계획했다. 
2) 일본으로 확대되는 해외선교(1908) 
3)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선교(1909): 30만의 교포 고려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 시베리아 선교 역시 한국교회의 해외선교의 상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장로교 노회가 최관홀을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 해삼위에 파송
4) 만주와 중국선교(1912):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의 선교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만주는 한국인들에게는 간도로 잘 알려진 곳으로서 이 지역에서는 중국인보다 한국인이 3배나 더 많았다. 만주는 본래 한국 영토였으나 1908년 중국이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켜 중국 땅으로 만들었다. 일제의 경제 찬탈이 강화되던 1910년 이후 수많은 한국인들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간도로 이주하여 만주에는 수많은 한인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 대한 한국교회 선교적 관심은 처음부터 아주 높았다.


민족주의 발흥과 기독교 사회개혁(1910~1930)


◉ 일본의 신민화 작업과 민족주의 발흥(1910~1920)
1) 한일합방과 국권의 상실: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강제적으로 한국을 합병
2) 항일운동과 기독교 민족주의:“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후 독립운동을 한 사람의 대다수는 크리스천” 이었고 비밀결사조직 신민회에 합류한 이들은 무려 12만이나 되었다.
3) 일본의 한국 통치에 대한 선교회의 태도: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일본의 한국지배를 예찬하였다.
4) 105인 사건과 일제의 기독교 탄압(1911): 105인 사건은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한국기독교가 일본 식민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적 반정부 단체라는 일제의 인식에 기인되었다. 초기 한국교회는 민족의식과 민족단결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학교 교육의 개혁은 교과 과목의 개정이었다.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과목은 폐지하고 역사와 지리, 일본어 독본이라는 과목을 삽입하였다. 일본에 의해 조작된 “데라우찌 총독 암살사건”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애국자들과 기독교인(한국인 기독교인과 외국인 선교사들)이 고문과 취조로 죽거나 상하였다. 이 사실이 국내외로 알려지면서, 국내외적으로 항일 독립의 기운이 고취되기 시작했다. 
5) 3.1 운동(1919): 3.1운동은 일본의 무단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민족국가의 출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선언에 자극 받아 일어난 한국 민족의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집결력은 “민족 종교와 같은 특징을 지닌, 민족의 자유,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기독교에서 나왔다.
6) 관동대지진(1923): 비록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일본정부가 한국인들을 얼마나 참혹하게 다루었는지를 잘 대변하는 것이 관동 대지진 한국인 대학살 사건이다.


◉ 변천하는 사회, 갈등하는 교회(1920~1930)
1)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발흥: 1918년 최초 공산주의 단체 한인사회당이 창립되었다.
2) 교회 밖으로부터의 기독교 비판: 한국교회에는 사회적인 책임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신앙을 내향화시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교회에는 세대주의 종말론이 놀랍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비판을 받게 되었다. 
3) 교회 내부로부터의 도전: 이단 전성시대와 자유주의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4) 서울과 평양 선교부의 갈등: 당시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이슈가 있었다. 대학 설립을 두고 평양지역과 서울 지역의 선교사들이 첨예한 대치를 벌였다. 평양은 마포삼열이 중심이었고 서울은 언더우드가 중심이었다. 이 둘의 대립은 아주 어려운 상황을 야기했다. 마포삼열은 복음전도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교회의 부흥에 집중했다. 반면 언더우드는 복음전도를 넘어 문화를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사역들을 했다. 결국 연희전문학교가 세워지고 연합해서 사역을 하여 북장로교는 멀리하려고 했다. 


◉ 3·1운동 이후 부흥운동과 대 사회·문화운동
1) 사회계몽 운동(절제운동, 농촌운동, 진흥운동): 반기독교운동에 부딪힌 기독교는 좀 더 사회적인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경회와 교회교육을 통해 전통적인 신앙을 그대로 계승하고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독려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부여받게 되었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사회 계몽 운동이었고,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길선주와 김익두의 부흥사경회운동이었다. 이는 일제가 실시한 정책에 대한 대처였다. 첫째, 일제는 아편정책을 실시한다. 아편중독에 걸린 사람이 많았다. 둘째, 성적 타락을 조장하여, 50만 불을 들여서 홍등가를 만들었던 것이다. 셋째, 담배와 술을 장려하였다. 이를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이 선교사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에 의해서 사회개혁운동이 벌어진다. 
2) 1920년대 부흥운동과 종말 신앙의 발흥: 3.1독립운동 이후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를 중심으로 부흥운동의 발흥과 더불어 전천년주의 종말론이 한국교회의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로 발흥했다. 
3) 청소년운동과 주일학교운동: YMCA, YWCA, 감리교의 엡윗청년회(Epworth League), 장로교의 청년면려회, 성결교회의 신생청년회는 그 시대 청소년운동을 주도하는 중심 단체들
4) 출판문화운동
5) 대사회사업운동: 남감리교 선교회가 설립한 부녀와 아동복지 재단 태화관, 맹아학교, 고아원, 양로원, 나병원, 결핵요양소, 아동보건소, 자선냄비는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 ◉ 도전과 응전의 시대
◉ 자유주의의 도전과 보수주의의 응전(1930~34)
1) 자유주의 발흥의 역사적 배경: ① 소수의 진보적인 북장로교(PCUSA) 선교사 ⇒ 북장로교 선교사 40명 중에서 대부분이 프린스톤, 멕코믹 등의 보수적 선교사이지만, 3명이 뉴욕의 유니온 출신. Old School 쪽의 신학교가 프린스톤과 맥코믹이고, New School 쪽은 뉴욕의 유니온 이었다. 그러다가 이 두 교단이 합쳐졌던 것이다. 그런데 New School 쪽은 시카고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무디의 부흥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윌리엄 커 선교사를 주목해야 한다. 바로 그가 어번 서명에 서명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이 초기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던 것이다. 
② 감리교의 신학적 변천(정경옥)/ 한국의 고등교육(진화론)/ 캐나다 장로교회(성경권위 훼손)
③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한국인 젊은 신진 신학자들: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바르트)
2) 자유주의 도전과 보수주의 응전
- 신학지남 논쟁(남궁 혁), 아빙돈 단권주석 논쟁(성경무오부인), 창세기 저작문제와 여권논쟁
- 적극신앙단 논쟁: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와 유물론을 모토로 삼으며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접목을 시도하였다.
3) 자유주의 도전과 장로교 총회의 대응: 김영진 목사의 창세기 저작권 문제 제기에 대해서 1934년 23차 총회에서 연구위원회 조직 (라부열, 박형룡, 부위렴, 염봉남, 윤하영) 하였고, 1935년 24차 총회에서 “성경무오”를 확정하여 이를 부인하는 자는 “장로교회의 교역자 됨”을 거절하게 되었다. 총회의 입장은 매우 단호하였다.


◉ 1930년대 신학: 자유주의, 진보주의, 정통주의
1) 정경옥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이용도와 같은 신비주의 신학, 슐라이어마허와 리츨의 신학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다” 이 모토 속에 담겨져 있는 핵심적인 사상은 바로 신앙과 신학은 다르다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였고 이를 사회운동으로 연결
2) 김재준의 진보주의: 청산학원의 학풍은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학풍을 그대로 이었고, 레디컬했다고 한다. 그는 청산학원에서 바르트에 푹 빠졌다. 첫째,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구분이 없다. 이렇게 특별 계시와 일반계시의 선을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바르트다. 둘째, 성경의 권위보다 더 상위 개념으로 그리스도의 권위를 말한다. 셋째, 실존주의적 성경해석
3) 박형룡의 보수주의: 철저하게 칼빈주의 입장에서 정통주의를 변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박형룡에게 진보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결국 기독교 유일성마저 흔들어 놓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 신비주의 부흥운동과 무교회주의
1) 신비주의 부흥사 이용도 - 이단적 경향, 새벽기도회 도중 악마를 추방하는 신비적인 체험을 경험한 후 변화를 받고 능력 있는 설교가요 부흥사로 거듭난다.
2)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 우찌무라 간조에게 영향을 받는다. 민족주의자이면서도 교회의 제도와 가견적인 교회관을 거부하고 불가견적인 교회를 유일한 교회로 주창하며 기성교회를 주저 없이 공격했던 예리한 비평가였다. 


◉ 신사참배 반대운동(1935~45)
신사 참배를 위한 예비 작업으로 첫째는 천황예배 프로그램을 국민 학교에 도입했다. 그리고 둘째, 국민학교 교과과정을 개편해서 역사를 일본역사로 바꾸었다. 이것은 식민사관을 주입하는 작업이었다. 
1) 신사의 역사적 배경과 본질: 일본의 신 개념. 신=“가미”이다. 이것은 자연숭배에서 기인했다. 이런 자연 숭배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중앙집권화, 정치 신화로 확대되어 영웅 숭배에 이어 천황숭배로 나아간다. 한국에 천리교, 신리교, 국가 신도를 침투시켰다.
2) 신사참배의 강요: 1924년 천황예배 프로그램을 도입시켰다.
3) 타협하는 한국교회: 1938년 2월, 당시 가장 큰 노회였던 평북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했다. 그 다음에 이를 따라 9월의 총회 직전까지 23개의 노회 중에서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게 되었다. 이때 가을 9월 9일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하게 되었다.
4) 신사참배 반대운동: 주기철 목사, 안이숙 사모, 산정현 교회


◉ 어두운 터널 그 한가운데 선 민족과 교회
1) 교회의 신사참배 굴복, 그 후의 변천: 비록 강요에 의한 것이지만 1938년 9월 제27차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함으로써 한국교회는 이제 표면적으로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막론하고 신사참배를 지지하는 쪽으로 전향하였다. 
2) 배도하는 한국교회: 일단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나서 일본의 신민화의 도구로 전락한 총회와 각 교단, 그리고 지도자들의 친일적 전향은 너무도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을 받던 교계 지도자들이 일제의 신민화 정책을 지지하는 자들로 탈바꿈. 조선신학교 설립과 친일 평양신학교 복구.
3) 조선감리교혁신교단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의 설립: 일본은 신민화 정책을 위한 한국교회의 체질병합에 만족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일본에서의 기독교 통합작업, 국내에서의 기독교 통합작업을 벌였고 결국 외국 선교회는 철수하기 시작했다. 


◉ 대립과 분열의 시대(1945~60)
◉ 한국교회의 대립과 분열:1945년부터 1960년까지의 기간은 교회의 대립과 분열, 혹은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의 역사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1) 분열의 역사적 배경: ①조선신학교의 설립 - 조선신학교는 1940년 승동교회 지하에서 설립되었다. 채필근,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이 중심이 되었다. 첫째는, 평양신학교와의 신학적 단절이었다. 두 번째는, 세계 신학 조류의 섭렵이었다. 그것은 칼 바르트주의의 수용이었다. 그래서 내세운 것이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라는 모토
② 고려신학교의 설립: 고려신학교는 1946년에 설립, 1946년 한상동 목사가 박윤선 목사를 내세워 고려신학교를 시작하였다. 신사참배한 총회에 허가를 받지 않았다. 
2) 51인 진정사건과 기장의 분립 - 1947년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하던 51명의 신학생들이 자신들이 받고 있는 신학교육에 문제가 있음을 총회에 알리고 진정한 사건이다. 멕케이는 프린스톤의 교장을 지낸 사람이었고, 브룬너는 신정통주의의 중심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이 한국에 들어와서는 조선신학교의 김재준의 손을 들어주었다. ⇒ 기장의 분열(2차 분열, 1953년): 핵심은 성경관 문제였다. 1953년의 기장의 분열이 있었을 때, 전라도의 수많은 교회들이 그를 따라가게 되었다. 신학적 문제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54년 기독교장로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나서 신학적 입장을 “자유주의 보수주의”라고 천명하였다. 이것은 바로 김재준이 주장했던 신학 노선이다.
3) 고려파의 분립(1차 분열, 1952년): 고려파 분열의 배경에 대해서는 ① 신사참배 문제, 그리고 ② 정치적 문제이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이다.


◉ 에큐메니칼(W.C.C.)논쟁과 통합 · 합동의 분열
1) 에큐메니컬 논쟁의 역사적 배경: 신앙동지회와 한국 복음주의협회(NAE)의 조직 - 한국교회의 반에큐메니칼운동을 처음 주도한 이들은 1947년 조선신학교 학생 51명과 이들과 뜻을 같이했던 10명의 여자 신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신앙동지회”를 결성하고 정기적인 집회를 가지며 한국교회에 보수적인 복음주의 공동체를 결집했다.
2) 한경직 목사와 에큐메니칼운동의 저변확대: 한국교회 에큐메니칼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단연 한경직 목사로 “성서중심의 복음주의적 신앙”과 “폭넓은 에큐메니칼 정신자신의 신학과 철학이 달라도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폭넓은 복음주의를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 N.A.W.와 W.C.C. 에큐메니칼운동의 대립: 명신홍 목사와 김현준 목사를 파송해서 조사
4) 분열의 제44회 대전 총회: 통합과 합동의 분열:WCC를 가입하자는 팀(한경직 목사중심)과 반대하는 팀(박형룡 중심)의 대립이 있게 되었다. 42회 총회가 지나자 에큐메니칼에 대한 찬반논란이 더욱 격렬, 결국 1959년에 44회 총회 때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었다.


◉ 정체성 파악의 시대(1960~오늘)
세 차례의 분열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과 동시에 4․19와 5․16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운동이 시작된다. 
⑴ 토착화 운동
토착화운동 탄생 배경은 첫 번째 배경은 전통신학에 대한 반증이었다. 선교사들에 의해 들어온 신학을 배척하면서 우리 것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에는 우리의 것과 서양의 것이 따로 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으나, 토착화 라인에 있어서는 선교사들의 신학을 “수입 신학”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둘째 배경은 해방신학이었다. 우리와 똑같은 상황에 있던 남미에서 ‘해방신학’이라는 독자적인 신학이 구축된 것은, 한국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셋째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었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4․19와 5․16이 일어났고, 박정희 정권에서는 산업 드라이브를 추진했다.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기술력과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야 했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력 착취와 빈부격차 증대라는 부작용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토착화 신학이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잠시 살펴보아야 한다. 토착화 신학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둘 다 존재한다. ①토착화 신학의 긍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첫 번째는 신학 함에 대한 고민을 했다는 것이다. 신학이 서구의 신학, 정통 신학이라도 우리의 정서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영지주의를 가르치면서 구원파나 시한부 재림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② 토착화 신학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하였다. 사실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는 정통신학자들의 관심 밖이었다. 토착화 신학의 등장 이후부터 교회는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③ 이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와 주체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민족과 역사에 대한 고민이 바른 것인지를 돌아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도 안고 있었다.
① 지나친 상황화였다. 이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Context의 극대화였고, 따라서 이들은 Text를 너무 떠나버리고 말았다. ② 이들은 반동신학으로 흐르고 말았다. 김재준은 박형룡을 비판하면서 신학을 전개하였다. 김재준의 신학을 갖고 신학을 한 책들은 항상 박형룡을 공격하며 신학을 시작했던 것을 볼 수 있다. ③종교혼합주의 현상의 등장이다. 
⑵ 복음주의 운동
① 1972년에 KETS(Korean 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 한국 복음주의신학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때 앞장섰던 사람은 총신의 김의환 교수, 서울신대의 조종남 학장, 장신의 한철하 교수, 고신의 오병세 교수이다. ② 다른 흐름은 출판사들의 등장이다. ③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성격의 교회 설립이다. 선두에 선 교회들은 사랑의 교회(옥한흠 목사), 온누리 교회(하용조 목사), 남서울 교회(현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 지구촌 교회(이동원 목사) 등이다. Elitism(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지만 이들은 한국교회 복음주의 운동의 모델이 되었다. 이들은 ①교파를 초월하려 하였다. 이들 교회들은 자기 교단 출신의 신학생들만을 교역자로 고용하지 않았다. 또한 이 교회들끼리는 서로 다양한 교류를 하고 있다. ②전통적인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는 양보하지 않았지만, 비 본질에 대한 부분은 관용하였다. ③사회적인 책임의식을 많이 강조하였다. 온누리 교회는 문화적인 부분에 많은 투자를 하였고, 남서울 은혜교회의 경우에는 장애우 사역이나 북한 돕기 사역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랑의 교회는 “민족을 책임지는 교회”라는 기치를 걸고 있고, 지구촌 교회는 KOSTA라는 걸출한 작품을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교회가 바로 이렇게 “전통적인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교회”이다. 그렇게 할 때에 그 교회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개혁주의에 대한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복음의 대사회적이고 민족적인 책임을 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복음주의는 양 극단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다. 영미에서 일고 있던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 그리고 한국 복음주의 협회, 한국복음주의 신학회, 생명의 말씀사를 비롯한 초교파적 복음주의 출판사, 그리고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으로 한국교회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신학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사회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는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운동이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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