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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한국교회사

한국(한반도) 초기 선교와 장로교 형성

한국(한반도) 초기 선교와 장로교 형성


2012년 9월 1일을 시점으로 한국 장로교회 총회 성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이 의미 있다고 보여 되짚어 보고자 한다. 
한반도에서의 기독교 선교의 역사는 사실 상당히 오래되었다. 아마도 신라 시대에 당나라 군사들을 통해서 네스토리우스를 태두로 하고 있었던 경교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짙다. 몽고를 모체로 하고 있는 원나라 궁정에서의 경교의 지위에 대해서는 이제 많이 연구되고 있다. 불행스럽게도 원나라와 고려 사이의 그 종교적 교섭사는 불교를 중심으로만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 흔적을 알 길은 없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반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로마 가톨릭 교회 안의) 예수회의 해외선교 활동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이르렀으며, 중국에서 활약한 마테오 리치의 선교정책과 일본에서 활약한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선교활동은 중국과 일본 양국의 새로운 세계관 형성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종결하고 막부시대를 열면서 조선정벌을 시작하면서 당시 막부 안의 천주교 세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장으로 삼아 조선침략을 강행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1592-1598)이다. 고니시는 이때 예수회 일본 부관구장이었던 고메스 신부를 동행시켰으며, 포로로 잡아갔던 조선인들을 기독교신앙(천주교)으로 개종시키기도 했다. 
중국은 또한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7)을 통해서 조선에 압박을 가했으며, 막대한 조공을 요구하면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잡아가기도 했다. 이때 소현세자는 볼모지 중국에서 예수회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조선으로 돌아갈 때 중국인이면서 천주교 신자였던 교인 5명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기독교(천주교)는 중국에 사신으로 오가게 되었던 조선의 유학자들 특히 실학자들의 손을 통해 본격적으로 조선 땅에 유입되었다. 당시의 중국 중심의 국제 사회 속에서 실학자들은 중국에 들어와 거주하고 있었던 주로 예수회 신부들을 통해서 서양을 접하면서 서양의 과학문물과 그 문물의 배후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고 판단되었던 종교신앙과 사상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중국에 있던 서양 신부들에게 직접 세례를 받는 자들도 있었지만, 더 중요하게 유교경전의 강독문화에 익숙했던 실학자들은 성경과 천주실의 및 중국어로 번역된 여러 서양 서적들을 조선으로 들여야 탐독하였으며, 유명한 천진암에서 강독모임을 갖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 아다시피 유교중심의 조선 정치사회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유학자들은 정치적 파벌 싸움에 휘둘리면서 길고 긴 극심한 박해를 받는 길에 들어가게 되었다. 조상숭배와 제사문제, 효의 문제 및 당시 유럽 열강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한 경계심과 중국중심의 사대주의, 및 정치적 주도권 싸움에서의 패배로 말미암아 천주교(서학)로 대변되었던 기독교는 조선 반도에서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불붙게 된 박해는 신유박해, 경신박해, 병인박해 등을 거치면서 기독교 신앙(천주교신앙)을 박해받는 사람들의 종교로 각인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천주쟁이들'에 대한 박해는 단순한 종교신앙에 대한 박해가 아니라 복합적인 의미를 지녔었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조선의 유교적 정통성 수호를 전면에 내세운 정치이념의 공세로서 후기 조선에 불교를 대신해서 일어난 새로운 정적 세력인 서학에 대한 척결을 의미했으며, 당시 이미 서구 열강에게 시달리고 있었던 일본과 중국, 특히 중국에 대한 유교왕국 조선의 충성과 자부심이라는 이중적인 입장의 표명을 의미했다. 동시에 서구 열강에 대한 조선 유학자들과 정치인들의 경계와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복합적인 표현이 '천주쟁이들'에 대한 철저한 박해와 쇄국정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조지 휫필드(1714-1770)와 존 웨슬레(1703-1791)의 부흥운동과 조너선 에드워즈(1703-1758)의 영향을 통해 일어난 제1차 대각성 운동, 그리고 그 다음 세대인 찰스 피니(1792-1875)의 회개에 대한 강조를 통해 제2차 대각성 운동의 물결이 휩쓸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기독교의 영향력을 감지할 정도로 발전된 현재의 미국이 형성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대각성 운동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부흥운동은 미국의 기독교 신앙 안에 부흥운동의 열매들과 효과들을 놓고 그것을 견제하는 신앙적 입장인 구파와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신파의 입장을 만들게 된다. 이 시기와 이러한 사건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시기의 부흥운동(특히 제3차 대각성 운동)을 통해서 미국 안에 선교운동이 일어나고 대대적으로 선교사들이 파송되면서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에까지 미국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에 속하거나 이 시기의 영향권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시기에 굳게 닫혀 있는 쇄국의 문을 열고 개항(1876)이 일본군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현재의 우리 한국민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지금까지도 가하고 있는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은 당시 지구촌의 타 지역에서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던 서구의 기독교에서 침략적 요소를 삭제시켜주고 오히려 저항의 수단이자 도움으로 받아들이도록 작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일본에 의해서 조선정부는 미국과의 수교의 필요성을 고려하게 되고, 드디어 1882년 '한미수호통상'이 체결되면서 한반도 안에 본격적으로 천주교가 아닌 개신교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제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의 조선침탈의 영향은 조선사회를 초토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었다. 성리학중심의 유교적 왕도정치와 쇄국으로 일관해 오면서 '천주쟁이들'에 대한 끔찍한 박해를 통해서 자만하고 자위해왔던 폐쇄된 왕국 조선은 그들에게 닥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의지했던 중국 청나라도 새로운 무기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무너져 내렸다. 한반도 안에서 러일전쟁과 청일 전쟁을 치러내면서 일본은 착실하게 조선정부를 와해시켰으며 한반도를 집어삼켰다. 일본의 침탈은 조선왕조를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그 왕조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성리학의 이념을 무력화시켰다. 
이미 천주교를 통해서 기독교를 일부 경험했고 기독교가 그 안에 지니고 있었던 유교와의 대척점들을 익히 알고 있었던 유학자들과 그 세력은 제국주의 일본의 무력시위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민중들에게 유일한 대안은 동학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들에게 동학은 이미 개벽을 외치는 불온한 민중혁명 세력이었다. 서학이란 말로 대변되던 천주교 세력은 너무도 극심한 박해 때문에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매우 신중한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정치적 공백과 함께 종교적이며 사상적인 공백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 기이한 하나님의 섭리로서 기독교(개신교) 세력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왕조를 대신하는 박해세력으로 등장했다. 
1884년 알렌이 의사(의료선교사)의 신분으로 인천 항을 밟고 서울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듬 해인 1885년에 장로교회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 아펜젤러 목사가 입국한다. 언더우드는 미국의 북장로교회 소속이었는데, 그 뒤를 이어서 미국의 남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과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 캐나다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 및 호주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세 가지 점을 특기할 수 있다. 첫째로, 이들이 조선땅에 선교하러 들어올 때에 이미 천주교가 있었고 천주교신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활동은 아주 미미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정치적, 종교적, 사상적 공백 상태와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조선인들은 민족 생존을 위한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었는데, 그 도움의 손길로 바로 신대륙의 개신교 선교사들을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 선교사들은 조선땅으로 입국하기 전에 먼저 조선말로 번역된 성경책을 들고서 조선땅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 조선어 역본의 작업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와 성서공회 소속의 선교사들을 통해서 만주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중국주재원인 알렉산더 윌리암슨과 그 제자인 존 로스, 매킨타이어를 통해 중국선교의 일환으로서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고 로스 목사를 통해서 성경번역이 이루어졌다. 로스는 1878년 통역자였던 이응찬의 도움을 받아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고 1887년 번역을 완성하여 "예수성교젼셔"를 출간한다. 이 번역본을 당시 압록강을 오가면서 인삼장사를 하던 조선인들의 전도에 성공하면서 그들을 권서인 삼아 조선어 성경을 조선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에서도 성경번역 작업이 시작되어 조선왕조 온건개혁파로서 일본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반에 갔다가 동경 축지 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미장로교회선교사 낙스에게 세례를 받기까지 하게 된 이수정이 그 일을 감당하게 되었다. 1883년 5월부터 성경번역을 시작하여 1885년 신약성경을 출판하게 되는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일본을 거쳐서 조선 땅으로 들어가면서 이수정이 번역했던 마가복음서 쪽복음을 들고서 한국에 입국했던 것이다. 
셋째 특징은 이 선교사들이 자기 교파와 교단에 대한 충성보다 오히려 연합해서 선교활동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여러 개의 교단들을 만들기보다 조선에 조선개신교회 하나를 만들기를 원했으며 그런 방향으로 서로 협력했다. 물론 단 한 개의 조선개신교회는 생겨나지 못했지만, 최소한 하나의 장로교회와 하나의 감리교회로 제한하는데는 성공했다. 
이러한 조선 초기 선교사들의 성향은 미국 대각성 운동에 따른 신파의 영향을 보여준다.
조선땅에 들어와 활동했던 초기 선교사들의 성격과 활동을 어느 정도 정확히 규명하려는 작업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다. 그들에게서 현재의 우리의 모습의 일부를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한 그들 자체에 대한 여러 혐의와 비판을 어떻게 공정하게 다루느냐 하는 역사적인 문제가 개재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장로교회에서 선교사로 지원하여 파송받은 장로교회 선교사들은 신학적으로 구파(Old School)와 신파(New School) 중 어느 입장에 서 있었을까? 일본 총독부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들은 은밀한 의미에서 미제국주의의 앞잡이들이었는가? 
미국 출신 선교사들의 신구파 입장의 문제는 오늘날의 전반적인 한국교회의 모습과 관련해서 특히 중요하다. 현재까지의 많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볼 때, 대체적으로 한국 초기 선교사로 활동했던 미 장로교회(및 감리교회) 선교사들은 구파의 신학적 입장을 어느 정도는 견실하게 견지하면서도 대각성운동의 후예들로서 회개를 강조했던 주로 신파의 입장을 지녔던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땅 안에서의 선교사들의 연합 운동에서 그리고 1907년에 이루어진 12신조 채택은 믿는 바 내용의 충실성보다는 회개와 변화, 체험을 중시했던 신파의 성향을 드러내준다 할 것이다. 특히 12신조 채택의 경우는, 초기 선교지라는 상황을 고려한다 해도 교회의 미래를 결정할 신학적 견실성에 대한 추구가 중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현재 각 교회가 믿는 바의 내용보다는 믿음의 현상에 집중하고 있는 경향이 한국 초기 선교사들의 성향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느슨한 점은 나름의 장단점이 있음은 물론이지만, 여전히 장로교회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잡음과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당시 조선의 멸망과 일본총독부의 압제, 미국무성의 입장과 관련해서 미국 출신 선교사들이 일본의 제국주의에 간접적으로 동조했다는 견해가 한쪽에서 매우 큰 목소리로 외쳐지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이미 일본과 먼저 수교하고 특히 가즈라-태프트 밀약을 통해서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한반도 지배에 대한 상호양해를 체결했던 미국은 미 선교사들에게 그 점을 충분히 공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점에서 미 선교사들은 애매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초기에 미 선교사들을 비롯한 대다수의 선교사들이 침략을 당하고 압제 받게 된 조선인들에게 대해 동정적이었으며, 조선인의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강화시켜주는 촉매제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동시에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고 강하게 밀고 나갔다. 이것은 아마도 미 국무성의 입장에 대한 고려도 작용했겠지만, 동시에 아직 연약한 조선인 교회들이 정치에 휘말려서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을 염려하는 배려심이 배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이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했음에도 실제로 초기와 중반기의 조선인의 민족주의와 일제의 압제에 대한 저항정신의 원천은 교회였으며, 그 교회들의 자원은 바로 선교사들이었다. 
미국과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의 이러한 민족정신과 저항정신의 원천은 미국의 청교도 정신과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통해 그들에게 형성되어 있었던 국가적 차원에서의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의식(국가의 언약)에 있었다. 그것은 믿음으로 각성되어 새롭게 된 하나님 백성들은 자기가 속한 사회와 민족과 나라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이 나라를 되찾고 주권을 회복하는 일에 있어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신앙인들이 선두에 서서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을 체질적으로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이 그들의 선교 활동에 전면적으로 등장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저변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태도였다. 이러한 자세는 아마도 나라를 상실한 뒤 민족의 미래를 걱정했던 많은 선각자들에게 이심전심으로 자연스럽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미국 출신의 선교사들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망에 일조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에 대해서는 단연코 아니라(No)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초기 미국 선교사들은 아직은 산업화되기 전의 미국 사회 출신들이었다. 그들이 비록 미국의 이익에 둔감한 사람들은 아니었으리라 추측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선교에,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투신한 헌신적인 사람들이었다. 몇몇 그렇지 않은 선교사들의 예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조선에 와서 조선에 정착하고 조선과 조선인,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헌신했으며, 평생을 헌신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 모습이 부끄러울 정도로 몸을 내놓고 목숨을 내놓고 헌신적으로 수고했던 것이다.
조선 땅에 들어왔던 초기 미국 선교사들의 대각성 운동의 전통에 바탕을 둔 신파(New School)의 성향은 특별히 회개와 회심을 통한 개인적인 삶의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변화를 강조했던 그들의 선교 활동의 특성에서 특별히 두드러졌다. 
아직도 성리학의 도학정치를 국가이념으로 내세우고 있었던 유학자 중심의 관리들이 비록 무능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아무리 천주교와 차별화하고 있다 했을지라도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지에서 파송되어 들어온 선교사들의 활동을 완전히 허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외교상으로 허용된 거주지와 전도지역을 넘어서서 지방으로까지 선교를 다니기도 했다. 
이들은 개인전도와 시장에서의 전도집회, 교회당 안에서의 모임과 기도회 등을 통해서 강력하게 회개를 강조했다. 대각성운동의 후예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한 회개 촉구는 그들에게 아주 익숙한 전교의 패턴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들의 전도 대상이 반상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백정과 노비들에게까지 이른다는 점이었다. 동시에 회개에 호응한 사람들의 반응은 주위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들이 실제로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인 면에서 변한 모습을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선교사들의 전도만이 아니라 그들이 세운 학교와 병원이라는 신문물과 학교와 병원을 통해서 선교사들이 조선의 각양 계층의 사람들을 대하고 다루는 방식과 관계 자체가 조선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 저항하지도, 자기를 지켜내지도 못하고 오히려 민초들에게 커다란 부담으로만 작용하고 있었던 지배계층들의 유교적 도덕과 윤리는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일본총독부가 세워지면서 명실상부하게 성리학의 유교적 도학정치는 조선인들의 마음에서 종언을 고하고 신대륙 미국에서 온 백인 선교사들이 민초들의 새로운 리더십으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백인 선교사들은 선진 문명의 수혜자들로서 어느 정도 우월감을 지녔을 수도 있고, 안식교의 어느 선교사처럼 자기집 사과나무를 따먹은 소년의 얼굴에 도적이라 새기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선교지 백성들이 자신들의 전도의 메시지에 호응하여 회개하고 변화받는 복음의 능력에 헌신한 대각성 운동의 후예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들의 선교 사역에서 맺은 결실인 조선인 개종자들 및 추종자들과 즉시 동역관계를 형성했으며, 이미 1901년에 장로교 선교사들 중심으로 장로회 신학교를 평양에 세우고 이를 '평양신학교'라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빨리 조선 기독교인들을 각성시키고 계몽시키고 독립적인 근대적 신앙인으로 세울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미 1890년에 조선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당시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북장로교회 선교사 네비우스 부부를 초청하여 자립, 자치, 자전이라는 삼자원리를 소개받고 여러 교파가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며 선교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한 선교정책을 전수받게 되었는데, 이때 네비우스 선교사 부부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했던 것이 성경중심의 신앙형성, 성경중심의 교회 정치와 전도였다. 선교사들은 성경을 번역하여 성도들에게 성경을 읽혔으며, 매년 여러 차례 사경회를 개최하여 성경의 뜻을 풀어가르쳤다. 사경회는 일주일 내내 농한기에 주로 열렸는데, 먹을 쌀과 솥을 짊어지고 와서 밥을 해먹으면서 집회장소에서 잠을 자는 형태의 집회를 진행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새벽) 기도회를 하고, 아침밥 먹고 성경공부하고, 점심밥 먹고는 전도하러 나가고 오후 늦게 들어와 저녁밥 먹고 저녁부터 밤까지 호롱불을 켜놓고서 부흥집회를 하는 패턴이 자리잡게 되었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노력은 불과 한 세대만에 조선 땅에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6월 20일 평양 장로회 신학교는 첫 회 졸업생 일곱 사람을 배출했으니, 그들이 바로 서경조, 방기창, 양순백, 한석진, 송린서, 길선주, 이기풍이다. 곧 이어 같은 해 9월 17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독노회)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미국 등지에서 온 선교사 38명과 조선인 회원 40명으로 조직하고 신학교 졸업생 일곱 사람을 목사로 장립하고 그 중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의하게 된다. 
이듬 해 9월에 제2회 노회가 서울 연동 교회에서 개최되고, 그 다음 해인 1909년 9월에는 평양신학교에서 제3회 노회를 개최하고 블라디보스톡에 최관흘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결의하고 1910년 9월에는 제4회 노회가 평북 선천 염수동 교회에서 개최되었으며, 1911년 9월에는 대구 남문안교회에서 제5회 노회가 개최되고 이 회의에서 7개의 대리회를 7개의 노회로 개편하고, 이듬 해 노회를 총회로 격상시켜 모이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11년 10월 15일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전라노회를 조직하는 일을 필두로 해서 12년 4일에 서울 신문내교회에서 경충노회를, 12월 6일 부산진 교회에서 경상노회를, 12월 8일에 황해도 봉산 모동 교회에서 황해노회를, 이듬 해인 1912년 1월 18일 평양신학교에서 평남노회를, 1월 29일 원산 상리 교회에서 함경노회를, 2월 15일에 선천 남교회에서 평북노회 이상 7개의 노회를 조직하여 대한예수교 독노회가 7개의 노회를 두게 된 총회를 구성하게 되어 드디어 1912년 9월에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를 평양 경창문 안 여성경학원에서 개최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인 52명, 외국인 선교사 44명으로 된 목사 96명과 장로 125인이 참석했다. 
그 뒤의 한국교회의 역사, 특히 한국 장로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의 역사는 일본제국주의의 지배 안에서 영욕과 부침의 세월을 겪게 된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가 있기를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