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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감정의 기독교적 이해

핵심감정의 기독교적 이해 

노승수 목사


핵심감정은 무의식이다. 무의식이기 때문에 본인은 잘 지각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자신은 머리로 어렴풋하게 어떤 느낌인지는 알고는 있는 경우들이 있다. 핵심감정은 우리의 본성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밑바닥에 자리 잡은 감정이다. 이 감정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을 지각하게 된다. 현실에 대한 왜곡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 사람은 세상 살기가 힘든 것이다.
핵심감정을 팔자나 운명에 비유한다. 핵심감정이 한번 형성되면 그 심정으로 평생을 살게 된다. 좀처럼 이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핵심감정은 우리나라 속담에 잘 나타나 있다.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선조들의 지혜가 새삼 존경스러워진다. 세살버릇이 핵심감정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지 쉽다. 우리가 이 세살버릇을 알고 벗어나면 이 습관으로 살지 않고 내가 원하고 바라는 삶을 평생 동안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본다.
핵심감정을 불쌍한 영혼에 비유한다. 왜냐하면 핵심감정이 형성될 그 시기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유아적 상태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나 다른 사람들에게 붙어서 살아야만 되는 어린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쌍하다는 이 말에 사람들은 발끈한다. 이 말을 인정하기가 힘이 든다. 우리는 죄인입니다는 설교는 들어도 우리를 죄인 취급하면 발끈한다.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이 불쌍한 영혼은 하나님의 돌봄을 받지 못한 영혼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후 인간의 영혼은 진정한 돌봄을 받지 못했다. 성경에서 긍휼(םהר)과 자궁(םהר)이 같은 어원을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돌봄을 받지 못한 영혼들이다. 완전한 인정과 수용을 받지 못한 영적 유산(abortion)자들이다. 우린 이제 육신의 자궁 외에 하나님의 영적 자궁에서 두 번째 영적 출생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전적인 인정과 수용의 메시지를 하나님께로부터 들어야만 한다. 이 과정에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죄인인 우리를 부르셔서 의인으로 삼으시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나의 내면의 핵심감정의 목소리보다 더 귀기우려 들어야 한다. 돌봄이 결여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만들어 내어야만 했던 가짜의 나가 바로 핵심감정이며, 이 가짜 나의 목소리에 솔직해지는 것이 불쌍한 영혼을 만나는 것이다. 주관적인 감정인 핵심감정과 하나님의 무한 긍정의 목소리가 서로 만나야 한다. 그러나 이 불쌍한 영혼을 만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참나, 곧 하나님의 창조의 원형으로서 원의(참지식, 의, 거룩)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중생한 사람에겐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어린 영혼이 있다. 상처받기 이전의 어린 영혼을 만나서 그 어린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적 자궁의 돌봄을 받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은 먼저 자기 자신이 자기를 돌보는 자기 돌봄과 자기 양육 그리고 자기 공감이 먼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용서한 만큼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며, 자신을 사랑한 만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적인 불신자일 수 있다. 
또한 핵심감정은 내 삶 전체를 지배하고 현재의 나로 있게 하는 장본인이다. 핵심감정으로 인하여 나를 지탱하게 한 힘도 많이 되고 나를 힘들게도 했다. 이제부터는 나의 강점은 살리고 나를 힘들게 한 면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부분도 핵심감정과 관련된 부분이다. 이 핵심감정을 제대로 해결하고 이 부분을 잘 보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달란트와 은사도 찾아낼 수 있다. 이를 활성화시켜 나의 건강한 부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핵심감정은 기독교 신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야 한다(마16:24)고 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 신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도대체 자기부인란 무엇인가? 동양종교에서 말하는 무아지경인가? 그런 종류의 자기 인격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 내부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부인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것을 성경은 육(롬 8:6) 또는 옛 사람(골 3:9; 엡 4:22) 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상당히 추상적 개념이고 그것의 실체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핵심감정은 신자의 자기중심성의 진앙지(震央地)를 분명하게 목격하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핵심감정의 수련은 신자의 성화의 과정을 촉진하는 매우 훌륭한 도구가 된다. 
신자의 성화의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 할 수 있다. 첫째는 자기 부인의 보다 실감나는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죄 죽이기(mortification)이다. 둘째는 우리 안에 새사람의 씨앗이 자라는 소생(quickening)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과정은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감정은 이 두 가지 과정의 실제적 분기점이다. 죄 죽이기는 불쌍한 영혼으로 더불어 핵심감정을 가지고 작업해야 하는 부분이다. 소생은 영적 자궁으로 되돌아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고 어린 영혼으로 더불어 영적 자궁 안에서 하나님의 돌봄을 믿음으로 주장하는 작업이다.
핵심감정 공부의 필요성
성경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이 얻는 것이라고 하셨다(요 10:10). 핵심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중생한 인격을 실현하는 것이요, 그 생명을 누리는 삶이요 그 풍성함이 더하는 삶이다. 핵심감정을 공부하는 까닭은 이것이다. 자기를 알아야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삶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핵심감정은 곧 자기이다. 그러기에 꼭 알아야 하고 이것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다. 
핵심감정을 수련하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삶을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고, 그와 같은 우리 내면의 소리 때문에 핵심감정은 수련은 쉽다. 핵심감정에 휘둘려서 살게 되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도 보통사람들은 모르고 사는데 우리들은 왜 이 고생을 하느냐고 행복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일단 핵심감정공부의 맛을 보게 되면 공부를 안 하면 안 되게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핵심감정은 자신을 힘들게 하면서 주위에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준다. 특히 부모, 부부, 자녀관계에서 더욱 핵심감정이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니 가정이 행복할 수가 없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면 이 핵심감정이 해결되어야만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다.
핵심감정은 대물림된다. 나는 부모에게 부모는 그 윗대로 부터 핵심감정을 대물림 받게 된다.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배우자에게 그대로 드러난다. 더 이상 자녀에게 대물림하지 말고 내가 건강해 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달라붙어있는 핵심감정을 발견하고 이 감정으로부터 놓여나는 공부를 해야 하며 어떻게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무의식적으로 공부를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중생한 나는 성화되어져 갈 수 밖에 없고 내안에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인 원의(참 지식, 의, 거룩)의 씨앗은 성장과 열매를 향해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연적 과정이라면 수없이 고생하고 힘들여서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무의식이고 무의식인 한에서 이유도 모른 채 고통 가운데 그 삶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핵심감정 수련은 이 길을 비교적 지혜롭게 만들어 준다. 무의식을 의식화 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일만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깨달을 것을 기백번의 시행착오 끝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레슨을 통과하게 해준다. 
모든 관계에서 핵심감정이 작용을 하므로 이 핵심감정을 잘 지켜보고 있으면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에 중심을 두고 살 수 있는 것이다. 핵심감정이 가짜임을 알고 이제는 더 이상 속지 말고 살아야 할 것이다.그런데 핵심감정에 휘둘리게 되면 현실에서 느끼는 핵심감정이 진짜이고 현실로 착각하게 된다. 이 감정이 현실이 아님을 자각할 때에 핵심감정으로부터 서서히 놓여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