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사/현대교회사

마틴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Jones 1899-1981)

마틴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Jones 1899-1981) 
1. 영혼의 의사
- 남웨일즈의 카디프(Cardiff)에 있는 도날드 스트리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헨리 로이드 존스는 회중교도였고 후에는 칼빈주의 감리교회에 출석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장학생이었던 그는17세에 성바돌로매 병원의 의과대학생으로 입학했다. 4년 뒤 의사자격을 모두 얻었으며 유명한 의사 토머스 호더를 돕는 역할을 맡았다. 그 즈음에 기독교인으로 머물렀던 그의 신앙에 근본적인 변화를 받았다.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면서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었다. 한 교회의 지체였고 정규적으로 예배에 참석했으며 모든 설교자들이 그렇게 인정해주었다. 금세기(20세기) 교회가 저지르는 가...장 큰 오류 중 하나는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란 증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은 나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주고 참된 회개에 이르게 하고 거듭남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설교였다.” 
그의 신앙고백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 내 행동과 생각으로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사, 허물과 죄로 죽었고 세상과 육체와 마귀의 노예임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내속에 선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하셨다. 그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뿐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본성이며 중심이 아예 죄악덩어리였다. 이 사실은 내 자신에게는 아무 소망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게 했다. 그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그분을 보여주셨다. 값 없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의를 주시고 당신의 아들이며 영광스러운 기업의 후사가 되었음을 보여 주셨다.” 
2. 목회자로서의 소명과 첫 사역지 에버라본(Aberavon)
- 1926년 가을, 의사로서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기로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고 마음을 정했다. 그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설교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소명을 받은 것이다.”라고 했다. 당시 정규 신학과정을 거부했다. 훗날 사람들은 이 문제를 두고 그를 비판하기도 했으나 당시 신학교는 성경관에 문제가 있었다. 지나치게 고등비평적이었으며 인본주의 철학과 결합된 자유주의 신학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그 해11월 20일 샌드필즈(Sandfields) 교회-베들레헴 선진운동 교회(Bethlehem Forward Movemnt Church)-의 청빙을 받아 이후 에버라본에서의11년간의 목회를 시작했다. 에버라본에서의 계속된 전도설교는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으로 이끌었고 형식적인 기독교인이었던 아내 베단 필립스의 영혼도 구원으로 인도했다. 1927년 결혼한 베단 필립스(Bethan Phillips)는 남편의 설교를 통해 마음이 바뀌는 이들을 보고 즐거워하면서 자신도 그리스도인으로 여기고만 있었다. 2년간의 주일설교를 통해 눈을 열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비로소 죄가 용서된 것과 하나님의 평강을 알게 되었다. 당시 그의 설교의 한 부분이다. 
“우리의 본성은 어두움을 사랑하고 빛을 미워합니다. 마음은 부패했으며 선보다 악을 즐거워합니다. 옳은 것과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나 우리의 본성은 그것을 사랑하지도 않고 행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 문화, 교육을 다 동원해도 사람의 본성을 돌이킬 순 없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그러했고 소문난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변화의 능력인 복음! 그 복음 안에 있는 구원은 사람의 노력과 열심의 결과가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당시의 설교들이 근본적으로 잘 못 되었다고 믿었다. 성령의 첫 번째 사역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을 낮추고 죄를 회개케 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해주고, 위로해 주며, 즐겁게 해주는 설교는 참된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로이드 존스 목사는 알고 있었다. 복음 앞에서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 그것은1892년 스펄전이 죽은 후 로이드 존스를 통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1927년에서 1938년까지11년 동안 남웨일즈에서의 전도설교를 통해 구원의 역사는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2년 당시 웨일즈에는 ‘옥스포드 그룹운동’(Oxford Group Movement)이 일고 있었다. 이 운동은 후에 ‘도덕 재무장 운동’으로 더 잘 알려졌으며 미국에서 건너온 루터교 목사인 프랭크 부크맨(Frank Buchman)의 영향이 컸다. 진리 속에서 기독교의 신앙회복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체험’을 통해서 신앙을 찾자는 것이다. 이 단체는 꿈이나 신비한 체험들을 중시하였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운동을 외롭게 저지하였다. 로이드 존스가 확신하는 것은 진리가 먼저이지, 경험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3. 웨스트민스트 채플(Westminster Chapel)
- 1938년 캠벨 모건(Campbell Morgan) 목사의 협력 목회을 제의 받고 런던으로 옮겨 왔으나 곧 이어 터진2차 세계대전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4년 후 캠벨 모건 목사의 퇴임으로1943년 경에 단독목회자로 청빙을 받았다. 이후1968년까지 목회를 하며 숱한 하나님의 인도와 구원의 역사를 경험한다. 웨스트민스트 채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갈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의 설교와 교제를 통해 모두가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 1947년엔 실행위원회의 초대 의장이 되었고 복음주의 학생 국제연맹(I.F.E.S)의 총재가 되는 등 대학생 선교단체 여러 곳에서 설교하며 젊은이들과 잦은 만남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했다.1968년에 로이든 존스는 암으로 건강이 아주 나빠 은퇴를 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목회에서 은퇴한 것은 아니었다. 로이든 존스가 이전에 했던 일들이 계속 되었다. 그는 웨스트 민스터 친교회에 참여하고, 교회의 상태와 부흥의 필요성에 계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1969년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그의 설교와 명강의는 「목사와 설교」라는 제목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잠식되어 있던 미국교회와 신학에 정통 복음주의의 바람을 일으켰다. 1980년에 그는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마지막 예배를 드린 곳은 바르콤(Barcombe)에 있는 작은 침례교회였다. 그는 죽기 전에 자녀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그러니 나를 낫게 해 달라고 구하지 말라”라고 했다.
그는 아베라본 베들레헴 교회에서11년 동안,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30년 동안 목회를 하였으며 웨일즈에 있는 그의 무덤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 메시지는 로이드 존스 목사의 일생 동안 그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4.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의 전도운동을 보는 시각
- 1954년 빌리 그래함의 헤링게이 전도운동(Harringay Crusade)이 열리게 되었다. 교회가 침체기로 접어드는 분위기를 반전시킬 것을 복음주의자들은 기대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별로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오해와 비판을 받으며 외로움을 겪기도 했다. 그 전도운동 대집회의 모습은 최면효과를 유발하는 강력한 조직력의 압박, 음악과 장황한 호소에 순간 감정적으로 반응하며 순간적으로 믿음을 갖는 듯해도 금방 넘어져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 이외의 방식에 의존하는 것은 구원,거듭남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가 절대적인 주권으로 작용한다는 것에 배치된다. 구원, 거듭남은 성령의 고유한 사역이기 때문이었다. 
5. 청교도신앙
- 로이든 존스가 청교도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존 휴톤이 편집인으로 있었던 「The British Weekley」라는 신문을 정기구독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19세기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 역사를 읽을 때 그는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예외 없이 청교도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글을 탐독한 사실을 알았다. 특히1925년 리차드 박스터의 전기를 읽고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조나단 에드워드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1931년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전집 두 권을5실링에 사고 나서 “지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비유 속에 나오는 자와 같았습니다. 그 두 권이 제게 끼친 영향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드에게서 청교도주의의 절정과 극치를 보게 되었다. 1976년에 로이드 존스는 웨스트민스터 청교도 연구회에서 행한 “조나단 에드워드와 부흥의 중요성”이라는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교도들을 알프스에 비유하고 루터나 칼빈을 히말라야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드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시험을 받곤 합니다. 제게 있어서 그는 언제나 사도 바울을 가장 닮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그는 조나단 에드워드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청교도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관심은 그가 웨스트민스터의 청교도 연구회에서19회의 강연을 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작가로도 알려져 있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설교가이며 목사인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독특한 설교방식을 발전시켰다. 성경 한 권에 대한 연속설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베드로후서 강해설교"이다. 그리고21년 동안 계속해서 그와 같은 연속 설교를 했다.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은"산상수훈 강해설교"와5년에 걸친"에베소서 강해설교", 12년에 걸친"로마서 강해설교"인데, 이 설교들은 대부분 책으로 출판되어 쉽게 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