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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우리 안의 우상

우상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안에 있는 보편적 타인의 표상은 그 원형이 중간대상에 기원을 둔 하나님표상이다. 이름은 하나님표상이라고 붙었지만 로마서 1장이 선명하게 설명하는 바 만물에 신성의 충만을 보고도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게 되는데 이것은 어린 시절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특히나 성장기의 아이는 오이디푸스기를 거치면서 내사되어 오는 부모를 모사한 상을 자기 안에 형성하게 되는데 유아들의 전능한 사고 방식 곧 환상에 의해서 포장되고 미숙한 사고의 형태로 일생을 지속하는 표상이다. 이 표상들 때문에 참되고 사신 하나님은 일정부분 왜곡되며 그렇게 정도차가 있으나 모두 우상숭배의 DNA를 지니고 있다.

2계명이 불신자들을 향한 계명이 아니라 신자들을 향한 계명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인 숭배, 순교자 숭배, 목사 숭배, 흔히 국뽕이라는 국대 선수들로 인한 자존감 고양, 명품을 휘두르면서 갖는 자기 고양감, 교회에 헌금이나 헌신을 많이 함으로 갖는 자기 의, 무엇인가를 선망하며 애정하는 덕질과 팬덤, 자기 신분을 포장하고 높이는 일, 신분이나 학벌을 세탁하는 일, 돈을 사랑하는 일, 자기 욕망을 위해 타인을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일, 그런 용도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일 등등 이 모든 것이 우상숭배다.

이 모두가 타락이 빚은 아버지와의 갈등 관계의 산물이다. 대상관계 이론으로 가면 이것을 모성 오이디푸스로 보고 화해의 근거를 찾으려 들지만 그런 식의 구조는 인위적이다. 그리고 화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외에 달리 다른 길이 없다. 우리 안에 우상의 DNA가 벗겨지려면 삼위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선 것이 아니라 자기 만족의 추동에 있어서 아무런 달라짐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는 하나님의 만족을 구하는 추동이 일어나야 진정한 의미의 돌아섬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대상과 수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의 덕은 바로 그 지향점이 삼위 하나님께 맞춰져 있으며 그 결과 빚어지는 우리 안의 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