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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피지상심(披枝傷心), 가지를 꺾으면 마음이 상한다.

피지상심(披枝傷心), 가지를 꺾으면 마음이 상한다.

 

노승수 목사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 중에 나오는 글귀로 가지를 꺾으면 그 속이 상한다는 의미다. 어린 묘목이 혼자 자라면 곁가지를 많이 만든다. 그런데 이 어린 묘목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가지를 치게 되면 물과 병충해로 속까지 썩어 결국 죽는다. 나무는 중심의 힘을 키워야 큰 시련에 흔들림이 없이 거목으로 자랄 수 있다. 그래서 주변에 경쟁하는 묘목이 많으면 경쟁 때문에라도 곁가지를 만들지 않고 깊이 뿌리를 내리며 위로 자라게 된다. 곁가지가 많은 나무는 재목으로 합당치 못하고 열매도 제대로 맺을 수 없어서 나무로서도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결국 죽어서 땔감에나 쓰일 뿐이다. 그래서 나무를 잘 가꾸려면 처음에는 촘촘히 심어 곁가지가 자라지 못하게 하고 좀 자란 후엔 생육이 좋지 못한 나무를 솎아내어야만 거목으로 자랄 나무를 얻을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여러 선생과 경쟁자가 있어서 자기 학문과 인격의 깊지 못함을 깨달을 때, 곁가지를 만들지 않고 중심을 키우고 자라게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여서 장로교회가 치리회와 더 넓은 치리회 안에 있어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당회와 노회의 관계를 must be나 may be로 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혼자 독야청청하고 독불장군이고 자신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변에 이런 선생과 경쟁하는 친구들을 두지 않는다. 있더라도 자기와 자기 선생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다. 바른 것을 알려주어도 듣지 않으며 자기 주장을 입증할 자료에만 혈안이다. 자기가 믿는 것만 옳다 생각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귀기우려 듣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중심을 키우기보다 곁가지만 넓히게 된다. 이룬 것도 없으면서 까불고 기고만장하고 안하무인으로 굴게 된다.

 

사람 편에서 곁가지는 예를 들자면, 자기가 설 자리를 못 가리고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구분 못하며, 때와 장소도 구분 못하고 말을 함부로 해대며, 진득하니 학문의 정진을 이루지 않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어제 잠깐 본 것으로 이미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굴며, 함부로 말하고 자기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른다. 이런 일들은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해서 결실하는 나무로 자라기도 전에 뽑혀 땔감으로 던져지고 만다. 세례 요한도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고 말한다.

 

대학에 이런 글귀가 있다. 소인한거위불선(小人閒居爲不善), "소인배는 한가로이 혼자 있으면 좋지 못한 일을 한다"는 말로 남이 보지 않는 것을 기회로 나쁜 일을 할 기회로 여긴다는 의미다. 어린 나무가 혼자 있으면 곁가지를 많이 만드는 것도 이런 현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 맹모가 괜히 맹자를 위해서 이사를 세번이나 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한가로이 있을 때, 악한 것으로 꽃을 피운다. 신자가 교회로 거룩한 이유도 이 때문이며 성경이 거룩을 신자 개인을 두고 말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를 두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학에 소인을 설명하기 전에 군자를 설명하는 글이 나오는데 군자필신기독야(君子必愼其獨也)라 했다. "군자는 반드시 혼자만 아는 곳을 삼간다"는 뜻이다. 이 삼가는 마음이 바로 그 중심을 튼튼히 함을 의미할 수 있다. 이어지는 귀절이 십목소시십수소지기엄호(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로 "‘수많은 사람의 눈이 보고 있고, 수많은 사람의 손가락이 가리키니, 이 얼마나 두려운가"는 의미다. 이 구절들은 원래 禮記(예기)에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대학 誠意(성의)편에 나온다.

 

결국 군자됨은 공동체로 있을 때, 구현되는 것이다. 성경도 이와 다르지 않게 설명한다. 성도라는 표현은 거룩할 "성"에 무리 "도"를 썼다. 교회의 2000년의 신학과 믿음의 선진들로부터 종적으로 교훈을 얻고 현재 속한 교회와 치리회들 속에서 은혜를 입지 않고 스스로 가지를 꺾으면 속이 상해 결국 결실을 얻지 못하고 땔감으로 버려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