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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중생과 회심

중생과 회심은 생명이 지닌 운동성을 보여줍니다. 믿음이라는 습관이 주입된 것이 중생이라면 이 습관이 가시적이며 인식 가능한 결과로 드러난 것이 회심입니다. 이것을 개혁자들은 semen fidei와 actus fidei라는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semen은 씨를 의미하고 이 씨는 habitus, 곧 성향을 지닙니다. 이 성향이 가시적 구현을 actus로 표현한 것입니다. 중생이 무의식적이라면 회심은 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나며 이런 운동적 성격이 생명이 지닌 근본적 성격입니다. 동시에 아리스토틀의 내재적 체계는 버리고 플레이토의 초월주의로 돌아감으로 어거스틴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중세 신학을 다 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 설명한 운동 개념은 아리스토틀의 흔적입니다.

칭의에서는 "주입"이라는 용어를 거부함으로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틀의 내재주의 개념을 거절하면서도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고 성화적 개념으로서 믿음과 은혜의 "주입"개념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세의 의화라는 이해가 빚은 펠라기우스주의로의 회귀를 교정하는 신학적 개념이었습니다. 칭의와 성화를 나누고 중생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초월주의를 채택함으로 이것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경향은 알미니안의 등장으로 후기 개혁파 신학으로 올수록 더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가 성화로 이어져 가는 과정에 대한 이해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중생이 회심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며 흔히 말하는 회심준비론입니다. WCF나 개혁파가 말하는 회심준비는 중생 전에 회심을 준비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일어난 중생이 실현되는 과정으로서 회심의 준비를 일컫습니다.

WCF 9. 3. 에서 "그러므로 중생하지 못한 상태의 그 자손들은 영적인 선을 전적으로 싫어하여 죄로 인해 죽은 자가 되었으며,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회개하거나 회개를 위한 준비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를 위한 준비"는 중생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당연히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유사 증상은 볼 수 있으나 삼위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회개를 할 수가 없습니다.

동시에 중생했다면 당연히 그 믿음의 씨는 우리로 하나님을 향해 진정으로 돌아서게 하고 그것이 회심을 위한 준비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