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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구원론

토마스 보스턴의 소요리문답 강해 : 효과적인 부르심

토마스 보스턴의 소요리문답 강해 : 효과적인 부르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죄인 간의 신비로운 연합은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볼 주제인 죄인을 향한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해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디모데에게 하나님 뜻을 위해 사는 데는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따르지만 이에 굴하지 말고 확신을 가지고 복음의 교리에 착념하라고 격려합니다. 이 본문은 그렇게 권면하는 바울 자신과 디모데가 그래야 할 분명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일을 토대로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일.

(1)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을 그들에게 적용하사 그들을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적용된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죄의 질병으로 죽은 일이 없을 정도로 이 일은 효과적이므로 그들이 구원받을 거라 말해도 전혀 문제 가 없습니다.

(2) 그들이 아직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성령으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자기에게로 그들을 부르사 구원하셨습니다. 먼저 구원하시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먼저 부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효과적인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부르심은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 부르심의 주체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렇게 부르신 자들 역시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이유.

(1) 부정적으로 그들이 행한 무슨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감동시켜 자신들을 부르시게 할 만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2) 긍정 적으로.

[1]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영원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롬8:30). 영원 전부터 구원을 받고 구원의 도구가 되기로 예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목적을 성취하시는 가운데 그들을 구원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또는 은총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런 은혜 또는 은총이 영원 전부터 주어졌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작정 안에서 그들 손에 쥐어진 것만큼이나 분명하게 시간상에서 실제로 그들에게 수여되는 것을 확실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이유에 대한 이런 설명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효과적인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더욱 공고히 합니다.

 

본문은 다음 교리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입습니다.”

여기서 저는 효과적인 부르심의 본질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적용해 보겠습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은 영혼이 은혜 상태로 들어가는 첫걸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진 영원한 목적이 죄인들에게도 내려오는 첫걸음이고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가 택함을 받은 영광을 향해 다시 올라갑니다. …

 

I. 효과적인 부르심에 대한 일반적인 개괄

먼저 효과적인 부르심이 무엇인지 일반적으로 개괄해 보겠습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은 그렇지 않은 부르심과 상반됩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은 그 부르심에 담긴 뜻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부름 받은 대상이 그 부르심을 듣고 부르신 이에게로 옵니다.

효과적이지 않은 부르심은 부르시는 진정한 의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다시 말하면 부르심을 받은 대상이 부르신 이의 의도대로 그 부르심에 응답하거나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 의도에 부합하게 적용해 보면,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1.  하지만, 복음의 부르심이 전혀 효과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상 복음의 부르심을 듣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이에 해당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도다”(마 22:14). 그리스도께로 오라는 부르심과 청함과 탄원을 받지만 이들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과 같이 이 부르심에 전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잠1:24). 부르시는 의도와 뜻은 적어도 이들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고 하시는 부르심의 주체인 하나님의 의도는 전혀 잃어버릴 수 없고 매우 분명한 것이지만 이들에게는 그렇습니다(사46:10). 부르심을 받지만 그리스도께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조차도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다 멸망합니다.

1.어떤 사람들에게 이 부르심은 효과적으로 역사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아주 드뭅니다(마 22:14).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일어나 그리스도께로 갑니다. 자기를 부르신 이에게로 나아가는 것은 그들이 받은 부르심의 목적일 뿐 아니라 그들을 부르신 이의 뜻입니다.
  
이들은 복음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습니다. 낚시로 치면 부르심이라고 하는 복음의 미끼 주변을 배외하기만 하는 여느 사람들과 달리 이들은 그것을 냉큼 물고는 놓아 주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불과 유황으로 멸망할 소돔성에서 나가자는 소리를 농으로 치부하다가 성과 함께 멸망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 성읍에서 탈출한 롯과도 같습니다.

 

II.             효과적인 부르심을 입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누가 이렇게 효과적으로 부름을 받는지 보겠습니다. 본문은 효과적인 부르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택정함을 입은 사람들만이 그렇게 부르심을 받는다는 뜻입니다(롬 8:30; 행 13:48). 다른 사람들은 말씀 사역을 통해 외적으로 부르심을 입기도 하고 성령의 보편적인 역사를 맛보기도 하지만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지는 않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활을 쓴다고 할 때, 하나님은 그중 자기 백성이 누구고 화살이 누구 가슴팍에 꽂힐지 정확히 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과 자유로움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만약 하나님이 타락한 피조물이 가진 본성적인 위계를 중시하셨다면 천사들을 더 우선에 두셨겠지만, 하나님은 타락한 천사들이 아닌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천사들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났고” 하나님은 그런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습니다(유 6절). 매우 특별한 사랑입니다.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잠 8:4) 우리는 마땅히 이런 하나님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시 8:4)!

1. 효과적인 부르심을 입은 자들 역시 그렇지 못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죄악 되고 악한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여기서 보면 그들 역시 부름 받지 못한 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하시고 부르시되 우리 행위를 따라 부르신 것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간음한 자나 우상숭배자와 같이 부름 받기 전에는 오히려 다른 사람 보다 더 악한 자로 살았던 사람도 많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사도 자신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홀을 입은 것은”(딤전 1:13). 옹이로 가득 차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와 같은 사람들에게 은혜가 역사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 대부분은 세상적이고 외적인 조건으로 볼 때 가장 미천한 자들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6~28). 물론 하나님은 때로 탁월한 지혜를 가진 사람, 큰 권력을 가진 사람 세상적으로 가문이 좋은 사람을 택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은혜는 오히려 많이 배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은 간과하고 그들과 비교에 볼 때 갓난아이와 같은 사람들 앞에 앉아 그들을 가르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자와 유력한 사람을 간과하고 가장 비천한 고아와 같은 사람들을 불러 하나님의 아들과 나란히 앉히고 천국의 권속이 되게 하십니다.

 

 

III.       택하신 자들을 어디에서부터 불러내시는가

하나님이 이들을 어디에서부터 불러내시는지 보겠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는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 하나님과 그분의 이성적인 피조물들 사이에 그리고 이들 피조물 서로 간에 복된 사회적 연대가 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복된 연대는 죄로 말미암아 송두리째 흔들리고 끊겨 버렸습니다. 벨탑 경우를 보면 죄가 들어옴으로 수많은 사람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과 단절되고,거룩한 천사들과도 끊어지고,허영의 산자락 여기저기로 모두 흩어졌습니다. 이 단절과 흩어짐을 고치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세우시고, 그 안에서 택정함을 받은 자들이 히나님과 다시 조우하고 자기들 스스로도 다시 모이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 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2:25).

 

1.   악한 자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에서 나오도록 부르심을 입었습니다(요일 5:19). 성경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을 교회(Ekklesia)로 일컫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고 하는 이 모임은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역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요 11:52).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들은 본성적으로는 마귀가 부리는 염소들 사이에서 곁길로 다니는 길 잃은 양이었습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해 이런 무리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우리 안으로 들어온 자들입니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황폐하고 더러운 집에서 먼지가 수북이 쌓여 감춰졌던 ‘잃어버린 동전’입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해 그들이 지어진 원래 목적대로 쓰이도록 회복되고 건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자기 신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이런 부르심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그들의 몸과 영혼이 이 세상을 등지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살전 5:24).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시 45:10).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아 4:8). 비참하고 죄악 된 상태에 있는 세상에서 떠나도록 부르심을 입습니다. 세상의 방식과 역사에서 떠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세상과의 사귐에서 나오도록 부르심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들이 여전히 세상에 살지만, 이들은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들을 멸시하고 미워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2.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전혀 다른 세상의 복된 사귐으로 들어갑니다. 이 부르심은 이렇게 외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들이 부름 받아 이른 이 사귐은 하나님 그분과, 거룩한 천사들과, 그들보다 앞서 부름 받은 천지에 있는 모든 성도와, 이 사귐을 있게 하신 복된 끈이자 이들이 조우하는 연합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귐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
2:22-24). 지금도 이 부르심이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라고 소리를 발하고 있습니다(마 22:4). 노아와 그 식구들처럼 이들 역시 하나님의 진노의 홍수가 불경건한 세상을 집어삼 킬 때 안전하게 거할 방주 안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롯과 같이, 이 땅에 남은 자들에게 불과 유황이 이 땅에 내릴 때 소알과 같이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죽어 갈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라고 하는 위대한 희생제사로 배설된 잔치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스스로 보복하는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 아래로 들어가야 할 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택에 참여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부름받은 구체적인 것들은 그들을 섬기며 영원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I. 효과적인 부르심이 어떤 사람에게는 효과적이 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효과적이지 않은 이 부르심을 어떤 사람들에게만 효 과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1.   부정적으로.
(1) 복음의 부르심이 효과적인 부르심이 되고 말고는 복음을 죄인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 얼마나 경건하고 얼마나 뛰어나고 얼마나 진지하냐에 하등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전 3:7). 그렇습니다. 만약 도덕적인 설득력 같은 것이 죄인을 하나님께로 데려오는 요인이라면, 호소력과 설득력을 갖춘 사람들은 수많은 회심자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효과적인 부르심은 그런 것으로 좌우되지 않습니다(눅16장). 지옥에 있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하속들이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할 만큼 이들의 눈에도 그리스도는 탁월하게 드러났지만 성경은 이들에 대해 뭐라고 말합니까?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라고 하지 않습니까(요 12:37. 38)?
(2)
이들이 자유의지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하게 사용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 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위로부터의 권능이 임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복음의 부르심대로 따라가 길 원할 수 없습니다(요 6:44). 만약 개개인의 자유의지라는 것에 따라 부르심에 대한 반응이 각기 달라진다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라고 힐문했겠습니까? 사람은 모두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 무슨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2.   긍정적으로.
  
이와 관련해 우리는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는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의 부르심에 함께 해서 그것을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만드는 분은 하나님의 성령입니다(요 6:63). 그러므로 성령이 한량없이 부어지는 때가 바로 부르심을 따라 영혼을 데려가기 좋은 때입니다. 성령을 거두시는 때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시 110:3).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 53:1). 루디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복음의 외침은 사람들의 귓전을 때릴 수는 있지만, 그들의 마음을 여는 것은 하나님의 팔입니다. 스칸데르베그{Scanderbeg}의 언월도(검의 일종_편집자 주)를 보고자 열망해 온 터키 황제인 마호메트 2세가 그 검을 본 후 별로 특별한 것이 없다고 말하자 무기의 가치는 그 무기를 쥔 사람의 힘이 좌우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II. 효과적인 부르심의 필요성

이렇게 부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부르심의 필요를 부르심을 받는 자들의 본성적 상태가 어떤지를 잘 아는 사람들은 분명히 압니다.

 

1.   그들은 하나같이 멀리 있는 자들입니다(엡 2:13). 하나님에게서 멀고, 그리스도에게서 멀고, 모든 선에서 멀리 있습니다(엡 2:12).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본질상 우리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공간적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니까요(행 17:27).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전쟁과 평화, 흑과 백, 지옥과 천국이 먼 것처럼 하나님과 멉니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본성,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와 정반대입니다(롬 8:7). 그러므로 죄인이 도무지 저항 할 수 없을 만큼의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부르심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께로 갑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올 수 없으니 ”(요 6:4).

2.   그들은 완고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기 때문에 이런 부르심이 필요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엡 5:14). 이들이 탄 배는 매순간 파도에 좌초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이 이 뱃전을 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나와 같이 이들은 지금 배 밑창에 내려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자신이 처한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영적인 감각도 모두 무뎌지고 사라져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나라고 목사가 외치고 양심도 소리를 높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마지못해 일어나게 되어도 이내 다시 머리를 괴고 잠을 청합니다. 조금 더 자자, 조금 더 눕자 합니다. 지옥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이런 상태는 계속될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의 잠에 취해 있는 그들을 하나님의 성령께서 효과적으로 부르십니다.

3.   설령 잠에서 깬다 해도 지금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전혀 알지 못 합니다(행 2:37). 자신들이 누운 집에 불이 난다 해도 어디로 피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들을 깨운 율법의 빛으로는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말씀이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가르치지만 성령이 권능으로 이들을 부르시기 전에는 도피성으로 피하지도 않고 도피성으로 난 길이 어딘지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바로 뒤에서 ‘이것이 바른 길이나 너희는 이리로 가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이 열리지 않으면 자연인에게 그리스도는 가려진 구원자 일 뿐입니다.

4.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았다 해도 그곳으로 가려 하지 않습니다(요5:40). 자신들이 품은 정욕을 버리지 않으려는 것이 이들의 본성입니다. 하늘 가나안의 젖과 꿀이 복음을 통해 주어졌지만 이들의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있을 때 주변에서 뒹굴던 고기 가마를 잊지 못합니다. 정욕을 버리는 것은 마치 자신의 오른손을 베어 버리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능력 있는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산천을 뒤흔드시고, 바위를 쪼개시고, 무덤으로 죽은 자들을 내놓게 하시고, 큰 물고기로 요나를 토해 내게 하셨던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의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본성적으로 이들은 그리스도께로 나오기를 원하지 않고, 권능의 날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시 110:3). 자신이 가진 죽음에 이르는 질병을 발견했다 해도 의원을 모실 생각도 안 하고 그 의원이 처방한 방법대로 따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각성된 많은 죄인이 돌팔이 의원들을 따릅니다. 믿기보다는 자신들을 상하게 하는 율법으로 돌아가 자신의 몸을 인위적으로 억압하고 슬퍼하고 학대합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근본적으로 복음을 통한 구원의 길을 미워하는 적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효과적인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5.   설령 각성이 되어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고 싶다 해도 죄책에 짓눌려 감히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고,이는 헛된 말이라” 하면서 뒤로 물러납니다(렘 2:25).
  
사람이 잠든 상태에서는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로 나아가는 일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양심이 각성된 후에는 그것이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결국 아담과 같이 주님 말씀을 들으면 숨기만 하고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까지는 그 앞에 나아가려 하질 않습니다. 복음의 초청이 그토록 많은 은혜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홀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7-9). 각성되지 않은 죄인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정작 각성된 후에는 물을 뿌리지 않고 먼지가 수북이 쌓인 바닥을 쓸 때처럼, 의심과 두려움이라는 먼자가 일어나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 합니다.

6.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고 싶어도 하나님 아버지께 이끌림을 받지 못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요 6:44). 죄인들은 본성적으로 잠자고 있을 뿐 아니라 죄로 죽은 자들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이 없으면 이들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부르는 이 부르심은 죽은 자를 블러일으키는 소리입니다(요 5:25). 이 부르심의 결과는 새로운 피조물의 창조입니다(엡 2:10; 4:17).

 

 

 

III. 효과적인 부르심의 본질

이제 효과적인 부르심의 본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은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선택받은 죄인의 영혼에 일어나는 성령의 이런 역사는 죄인의 지성과 의지에 이중적으로 일어납니다.

 

1.  지성에 일어나는 역사.
 
지성은 영혼이 가진 주도적인 기능으로 죄 때문에 어두워져 버렸습니다(엡5:8). 영혼을 잠들게 한 사탄은 이런 지성에 대한 일을 완전히 마쳤습니다. 지성에 난 창문을 다 막고, 커튼을 쳐 빛이 들어 오지 못하게 함으로 영혼이 죽음의 잠에 빠지게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힘이 빠진 삼손에게 한 것처럼 죽음의 잠에 빠져 힘을 잃은 죄인의 영혼의 눈을 뽑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창조에서 하셨던 것처럼, 이런 상태에 빠진 영혼에 두 번째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1-3). 여기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는 두 가지입니다.

(1) 시내산에서부터 영혼을 밝히십니다.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하는 것, 다시 말해 율법을 통해 영혼에 역사하십니다(요16:8). 하나님의 성령은 불에서 구한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영혼에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직 빛과 혼재하는 흑암과 어둠과 폭풍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께서 영혼에 주시는 이런 깨달음의 내용과 효과와 방편과 깊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깨달음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a.죄를 깨닫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하나님의 성령은 죄인에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구체적인 죄악들을 그 앞에 펼쳐 놓으십니다(시 50:21). 이전에는 죽어 땅속에 장사된 것과 같던 죄악들이 다시 살아납니다(롬 7:9). 종의 영이 결박된 죄수를 끌어다 출생에서부터 그의 삶을 차례로 보여 주시고 그가 지은 죄악들이 확연히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전에는 도무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죄가 얼마나 악독한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분명히 보게 하십니다.

a.비참함을 깨닫습니다(요16:8).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가 잃어버린 자요 소망 없는 자임을 깨닫게 하십니다(눅 15:7). 죄책을 가진 자로 드러나고 그의 가슴에 판결이 내려짐으로 자신이 영원한 죽음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봅니다. 하늘에서 온 천사가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으므로 만약 그대로 죽는다면 영원히 멸망할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를 정죄하고,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그를 원수로 여기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보입니다.

 

[2] 이런 깨달음의 결과로 세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a. 찔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행 2:37). 이제 죄인의 양심이 그를 괴롭히고,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끌어안고 살던 뱀에 심장을 물렸습니다. 지난날의 어리석음과 광기에 죽음과도 같은 슬픔과 고뇌가 그의 영혼에 넘실댑니다.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죽인 것을 알고, 그렇게 죽은 자신의 주검을 보고 비탄에 빠집니다.

b. 두려움. 빌림보 감옥의 간수가 느꼈던 바로 그 두려움입니다(행 16:27). 이제 그는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런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지 깨닫습니다. 공포가 그를 엄습합니다. 금세라도 자기 위에 무너져 내릴 것같이 자기 위에 드리운 심판의 그림자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아무리 완고한 죄인이라도 죽음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생각에 나뭇잎 하나가 떨리는 소리에도 사시나무 떨듯이 떱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의 심장을 검이 되어 꿰뚫습니다.

C. 안절부절못함(행 2:37). 이제 이런 영혼은 심판대에 누인 것처럼 그런 자신에게 무슨 소망이 있기라도 한지 의아해합니다. 때로 기대를 하다 다시 두려움에 빠지는 일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처지에서 구원받길 바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머리와 가슴을 온통 채우는 구원받고 싶은 열망에 다른 염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이제 이 영혼은 다음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그 말씀이 과연 진리임을 절감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3] 이런 깨달음을 가져오는 방편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은 말씀을 사용해 이런 결과를 불러오십니다. 특별히 율법을 통해 그렇게 하십니다. 죄수의 몸이 된 선택받은 영혼을 시내산에 데려가신 하나님의 성령은 맹렬하게 타오르는 의로운 율법을 그에게 가르치십니다.

a.계명을 가르쳐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롬7:7). 율법이 하나님의 촛불이 되어 자신의 마음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핍니다. 거울과 같이 자신을 비춰 주어 이전에 도무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a.율법이 발하는 위협과 저주를 통해 성령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깨닫게 하십니다. 그에 대한 판결을 읽혀 들립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갈 3:10). 모든 계명 하나하나가 저주를 발하고 있음을 본 죄인은 이 모든 저주 하나하나가 바로 자기에게 해당함을 알고 자신의 죽음을 확신합니다.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고, 지은 죄마다 하나님의 진노를 함께 엮는 율법이 이제 마침내 이 죄인을 사망과 함께 엮습니다.

[4] 죄에 대한 확신의 정도에서 율법을 통한 이런 확신이 다 같은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깨달음이 있을때 그런 확신은 더욱 깊어집니다.

a.자신의 행실과 말과 마음의 죄들은 물론 자신의 본성이 얼마나 죄악 된지도 깨닫게 될 때입니다(롬 7:14). 자신을 선이 아닌 항상 악으로 치닫게 하는 자기 영혼의 타락한 본성을 확신해야 합니다. 자신의 환부가 어딘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환부에 약을 바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유대 백성에게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그래서입니다(렘 4:3). 쟁기를 자신의 부패한 본성의 뿌리에 대고 그 본성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죄로 가득 찬 우리 본성은 박토로 덮인 돌밭과 같습니다. 그래서 죄를 깨달았음에도 자신의 죄악 된 본성을 제대로 보지 못해 멸망에 이르게 된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깨달음은 거품입니다. 환부가 충분히 절개되지 않고 주변만 만지작거리다가 정작 중요한 치료는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a.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느낄 때입니다(요 16:8).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은 자들에게서 성령이 이처럼 역사하시는 것도 바로 이 필요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다른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죄인들은 결코 그리스도께 오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의 죄악이 처음 시작된 지점부터 그들을 추적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방주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전혀 쉴 곳을 얻지 못하게 말입니다.
   이를 통해 자신은 그리스도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절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얻지 못하면 아무 소망이 없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는 것은 물론 죄에서 구원받으려면,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는 물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이 반드시 필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죄를 슬퍼하고 행실과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도 그런 것으로는 자기가 가진 죄책의 어느 하나도 없이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죄책을 없애는 데 그렇게 무기력한 것처럼, 자기 안의 정욕을 죽이는 데도 그렇다는 것을 절감해야 합니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적용하겠습니다.
(a)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각성하게 하심을 아직 누리지 못한 많은 사람은 얼마나 소망이 없는지요!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효과적인 부르심의 전조는 아직 당신에게 이르지 않았습니다.
(b) 죄를 깨닫게 하는 역사가 시작되었는데도 오히려 그것을 회피하고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얼마나 미련한 짓입니까! 이런 죄인들은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자이고 자신의 구원을 막으려 애쓰는 자입니다.

 

 

(1)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한 성령의 역사는 시내산에서부터 영혼을 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총명이 일깨워지는 것입니다(행16:18). 값진 진주를 찾는 것입니다(마 13:45. 46). 영적인 생명과 건강을 염려하는 영혼이 위대한 의원을 만나는 것입니다. 지루하게 계속된 캄캄한 어둠이 지나고 새롭게 떠오른 태양이 가져다주는 것과 같은 생기로 가득한 일깨움이 시작되는 일입니다(호 6:3). 이런 조명을 통해 밝히 드러나는 내용 과 그 결과와 방편과 정도를 살펴보겠습니다.


[1] 이런 조명을 통해 알게 되는 것 역시 두 가지입니다.

a.능히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과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하고 절망적이든 그리스도는 자기를 치료하실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히 7:25).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분이야말로 자신의 상황에 꼭 필요 한 분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본성과, 그분이 담당하신 직분으로 영광을 발하시는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분께는 죄인을 의롭게 할 공로와 그들을 거룩하게 하실 성령이 충만한 것을 봅니다.

b.그리스도께서 기꺼이 죄인들을 구원하려 하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구원하려 하심을 알게 됩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이스라엘에는 소망이 있고, 특별히 자신의 구원과 관련해 소망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악한 죄를 지은 자신이라도 복음을 통해 주어지고 선포되는 사죄의 은택에서 배제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됩니다. 친히 피로 값 주고 사신 은택에 참여하라고 자기를 부르시고, 자기를 끌어안으시려 팔을 내미시는 구주를 발견합니다.

 

[2] 이런 조명으로 죄인은 소망을 갖습니다. 값진 진주를 손에 넣기를 열망하는 지혜로운 상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 진주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마13:46). 이 소망과 더불어 영혼은 그동안 떨구었던 고개를 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4). 아직 해안에 이르지 못하고 깊은 바다를 지나는 영혼이 절망으로 좌초되지 않게 붙잡아 주는 영혼의 복된 닻입니다.

 

[3] 이런 성령의 조명을 가져다주는 방편은 성령의 손에 붙들린 영광스런 복음입니다(행 26:17, 18). 그리스도가 이 복음의 주제이십니다(엡 3:8). 율법은 질병을 찾아내고,복음은 의사를 찾게 합니다. 전자는 거스른 율법의 뇌성으로 이루어지고, 후자는 복음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로써 상한 영혼이 고쳐지기 시작합니다.

 

[4] 이런 성령의 조명은 밝을수록 더 좋습니다.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의지와 구원하시는 그분의 능력에 더 온전히 사로잡힐수록 그가 가진 모든 두려움에서부터 더 빨리, 그리고 더 온전히 벗어납니다. 각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붙들도록 할 만큼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막 9:24). 그렇다면 아무리 적어도 자신의 성령의 역사로 이루신 결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조명을 기뻐 받으십니다(아 6:10).

 

 

1.  죄인을 효과적으로 부르시는 성령의 두 번째 역사는 의지에서 일어납니다.
  본성의 상태에 있는 죄인의 의지 역시 끔찍할 정도로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영혼의 의지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롬
8:7). 복음의 부르심이 그리스도께 죄인의 마음을 열기 위한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효과적인 부르심은 루디아에게 이루신 것과 같이 죄인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여는 역사입니다(계 3:20).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해 열리는 두 가지 문이 있습니다.

(1) 총명이라고 하는 대문입니다. 이 대문은 앞에서 말한 이중적인 조명을 통해 열립니다. 죄의 확신이라고 하는 율법의 폭풍에 반쯤 열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영혼에 효과적인 부르심이 이루어졌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2) 의지라고 하는 방문 또한 열립니다. 이 문이 열리면 비로소 이 역사가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와 죄인이 만납니다. 이는 정말 위대한 역사입니다 의지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는 먼저, 의지를 새롭게 합니다(겔 36:26) 하나님의 성령은 죄인의 완고한 옛 의지를 들어내십니다. (그 의지는) 죄인의 목을 뻣뻣하게 해 그리스도께 고개 숙이지 않게 한 강철과 같은 심줄입니다. 그러시고 나서 성령으로 그의 마음을 새롭게 하심으로 그에게 새로운 의지를 주십니다. 죄는 영혼이 가진 모든 기능을 완전히 뒤틀어 버렸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의지를 그렇게 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원래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도록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본성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를 대적하도록 틀어져 버렸습니다(롬 8:7).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해 어느 정도는 처음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도록 지어진 상태로 돌려 놓으셨습니다.
  
의지가 새롭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영혼에 실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영혼에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옛사람의 권세를 파하고 제한 새로운 성품이 의지에 부여됩니다(엡 4:23, 24).

   의지에 새로운 질서와 경향성이 심기는데 주로 두 가지로 이야기해 볼 수 있습니다.
[1] 선을 향해 더 유연하게 기울어집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돌과 같은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은혜가 이런 마음을 하나님 뜻에 순응하는 살과 같은 마음으로 바꿉니다. 밀납을 녹이는 불처럼 은혜는 이런 복음을 능력 있게 녹여 거기에 거룩함을 각인합니다. 항상 ‘제가 무엇을 하길 바라시나이까?’라고 묻는 이런 마음은 거룩해지고 깨끗하게 되고 위대한 의사의 돌보심 아래 있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본성적인 완고함과 아집과 반항심이 사라지고, 멍에를 지게 할 수 없던 황소가 잠잠히 서서 멍에를 받게 됩니다.
[2] 선을 향한 의지의 경향성이 생깁니다(렘 31:18). 본성적인 반감이 정복되고, 잘못된 것을 향해 기울어졌던 의지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이 만지심으로 오히려 그 반대로 질서 잡히고 하나님 뜻에 머리를 조아리고 그 뜻을 향해 갑니다. 다윗은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시 11936).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가게 하시길 바란다고 합니다(살후 3:5). 불처럼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철과 같이 굳고 차디찬 마음을 부드럽게 해 하나님 뜻에 맞게 구부리십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시 110:3).

지금까지 우리는 선택받은 영혼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의 역사는 이중적이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2.  선택받은 영혼들에게 일어나는 성령의 이 이중적인 역사를 통해 일어나는 복된 결과가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이를 통해 죄인들은 복음을 통해 값없이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부르심을 효과적인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 해 보아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이 부르심을 통한 효과적인 결과.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요 1:12). 복음이 죄인을 향해 이렇게 소리를 발합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렘 3:22). 그리고 이것이 효과적인 부르심일 때 죄인들은 이 부르심에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렘 3:22)라고 화답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마음을 얻으시고, 죄인이 정복당합니다. 언약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복음이 선포하는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스스로 의 지혜를 포함한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 모시고, 모든 것 대신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모든 것을 위해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부르심의 위대한 목적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렸더라도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면 아직 이 부르심에 대답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슬퍼하고, 여러 의무를 준행함으로 행실이 달라졌다 해도 복음이 제시하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이 아니라면 아직 이 지점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2) 죄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할 근거. 복음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제시합니다.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잠 8:4). 복음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주어진 것도 아닌데 죄악 된 피조물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우리 같은 죄인들은 그것을 꿈꿀 수도 바랄 수도 없습니다(마 22:4).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명령합니다(요 3:23).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큰 곤경에 빠질 것을 경고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6).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또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3) 어떻게 선택받은 영혼이 이 부르심에 대해 효과적으로 반응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그렇게 하도록 설복하십니다.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 영혼에는 음 중심에 상담가가 있는데 이 상담가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그 영혼이 기쁨으로 동의하고 움직이게 할 수 없습니다. 죄인은 이 부르심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머뭇거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 만 그동안 사탄은 죄인의 부패한 마음과 더불어 그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온갖 반대되는 이유를 찾아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은 영혼으로 하여금 이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그런 모든 장애를 없이하시고 죄인으로 하여금 이 부르심에 그대로 순응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앞에서 말한 이중적인 조명을 통해 죄인들을 가로막는 모든 사탄의 거짓을 훼파하십니다. 한 편으로 죄인은, 자신의 상실하고 타락한 상태로 괴로움과 고통을 당합니다. 이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기에게는 영원히 아무 소망이 없음을 봅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기꺼이 그렇게 하시려는 그리스도의 마음과 자신이 이 부르심을 받아들였을 때 누릴 완전한 행복에 마음이 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인은 이 부르심에 자신이 응답하는 것이 마땅함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는 성령께서 영혼을 돌이키실 때는 그가 가진 합리적인 본성에 맞게 그렇게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을 위해 시용된 것보다 더 강력한 주장이 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자신의 은혜로운 역사로 이런 주장을 영혼이 깨닫게 하시는데 누가 그것을 거부하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피의 보수자가 바로 뒤에서 추격해 오고,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도피성이 있다는 사실보다 죄인으로 하여금 이 부르심을 받아들이게 하는 강력한 무엇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4) 이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죄인이 받는 도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렇게 할 수 있게 도우십니다(엡 119.20). 이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빨리 달아나 생명을 보전하라고 하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더러 일어나라고 외친다고 그가 일어나겠습니까? 하지만 나사로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부르심과 더불어 그 부르심을 듣는 사람들이 응답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영혼은 생명과, 그리스도께로 달려가게 하는 발과, 그리스도를 부둥켜안게 하는 손과심지어 하나님을 믿기 위한 믿음을 생명의 성령께로부터 받습니다. 이를 통해 부르심의 역사가 성취됩니다.

        이때 특별한 방식으로 의지가 새롭게 됩니다. 하나님께 순응적이 된 영혼이 실제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새로운 성향을 갖게 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과 연합합니다.

 

 

IV. 적용

이제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온 내용을 가지고 적용을 해 보겠습니다.

1. 교훈

(1) 효과적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게 된 복을 누립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이 이루신 구속이 이들의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다음과 같은 특권을 누립니다.

[1]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 하나같이 이들의 유익을 위해 역사합니다(롬 8:28). 이들이 맞닥뜨리는 어려움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이들에게 드리웠던 저주는 다 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세상을 항해하는 동안 만나는 모든 풍랑과 바람은 이들을 좌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마침내 다다를 포구에 더 빨리 이르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때문에 사람 들이 이들에게 던진 돌들은 하나같이 보석들로 변합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일을 통해 이들은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로 드러납니다. 이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들이 부름 받은 영원한 목적을 이루도록 유용하게 역사 합니다.

[2] 이들은 영원히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무리에서 건짐을 받은 이들은 이제 결코 그들 틈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다. 새롭게 부름 받은 무리 중에 끝까지 안전하지 못하고 중간에 잃어버릴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시작하신 선한 일을 마침내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동산에 이르는 첫발을 내디딘 사람들답게 마침내 그곳에 다다르기까지 한걸음씩 내딛길 쉬지 않습니다.

 

(2) 효과적으로 부름 받지 않은 자들은 비참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한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의 외적인 부르심을 듣지만 그 중에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적은지 모릅니다. 오, 복음의 부르심을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구원과 정죄가 여기에 달렸습니다. 맞습니다. 이 부르심을 듣고 반응하지 않는 당신은 잃어버린 상태요, 하나님의 진노와 죄 아래 있습니다. 이 부르심을 듣고도 무시하면 이 부르심을 한 번도 듣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태로 떨어질 것 입니다(잠 1:24). 복음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죄인들로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복음의 부르심이 효과적으로 역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증거 몇 가지를 보이겠습니다.

[1] 복음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음에 역사하는 것을 한 번도 맛 보지 못한 사람들은 효과적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사 53:1; 시 110:3). 여전히 복음의 물방울이 닿는 곳에 앉아 있어서 귀로 그 복음을 듣긴 하지만, 한 번도 이 복음의 물방울이 마음으로 스며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음성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당신은 여전히 자신의 죄 가운데 있습니다

[2] 이런 사람들의 영혼에는 말씀의 영향이 영속적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 동안에는 뭔가가 좀 남아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마 13:6). 체와 같이 물속에 있을 때는 물을 가득 담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물은 온데간데없어져 버립니다. 언제고 하나님의 성령이 효과적으로 당신을 부르신다면, 그 혼적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당신이 집에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계속 남아 당신 삶의 방향을 바꾸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 것입니다.

[3] 세상과 짝하고 악과 함께 뒹구는 것을 예사로 압니다. 많은 복음의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사람 그대로입니다.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요일 5:19). 당신이 복음의 부르심을 듣고 순응한다면 그 무리에서 나와 세상의 방식과 모든 것을 버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무지하며 기도도 하지 않는, 전반적으로 불경건합니다. 오, 세상에 속한 것으로 드러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세상에 속했는지 아닌지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의 말을 합니다. 가나안 땅의 말을 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길을 따라갑니다. 죄악 되고 부정한 삶을 계속 사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합니다. 이들은 항상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가 누구인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추구하고 빠져 사는, 세상적이고 잠시 지나가는 것들에서는 선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많은 사람이 가는 쉽고 편한 길을 갑니다.

[4] 자신들이 죄악 되고 잃어버린 상태에 있음을 한 번도 깨달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은 죄인을 효과적으로 부르시는 성령께서 첫 번째로 하시는 일입니다. 일생을 자기 편할 대로 살고, 자신이 죽은 후에 불멸하는 영혼이 처하게 될 상태 때문에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 대해 이 이상 우리가 더 할 말이 무엇입니까(눅 11:21)?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소망이 없는 잃어버린 자임을 한 번도 깨달은 적이 없습니까? 그 렇다면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당신이 아직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자신을 마귀의 자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당신이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5] 죄에 대해 한 번도 깊이 자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마 13:6). 영적인 잠에 곯아떨어져 있다 이따금씩 게으르게 눈을 뜨긴 하지만 완전히 잠에서 깨지는 않기 때문에 다시 깊은 잠에 끓아떨어집니다. 현저한 죄책 때문에 가끔 놀랄 때가 있긴 하지만 허탄한 생각과 무익한 말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는 보지 못합니다. 눈에 티가 들어가지 않는 한, 계속 흙먼지를 가지고 장난하길 쉬지 않는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실제 자신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일 때문에 놀라는 때가 있긴 하지만, 그들의 본성이 바로 그 죄라는 사실이 그들 앞에 펼쳐져 본 적은 없습니다. 칭의를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함은 물론, 거룩해지려면 그리스도의 성령이 필요함올 절감해 본 적이 없습니다.

[6] 양심의 찔림을 무시하고, 죄에 점점 무뎌져 가고, 죄를 지적당했을 때도 교묘하게 발뺌하기가 일쑤입니다. 결국은 영혼의 멸망으로 드러나게 될, 성령을 소멸하는 일들을 일삼습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한 성령의 저항할 수 없는 역사에 대해 외인이라는 매우 분명한 증거입니다. 벨릭스와 같이 성령이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을 자꾸 미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행 24:25). 성읍을 건축한 가인처럼, 이런 사람들은 죄에 대한 찔림을 모면 하기 위해 일들에 대한 분주한 생각으로 마음을 채웁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이 되어 영 소망이 없게 되기까지 죄와 죄에 대한 깨달음을 덮고 마침내 질식시키려 또 다른 죄로 달려가고 육신적인 쾌락으로 그 깨달음을 외면합니다. 고침 받기를 거부하다니요! 이 얼마나 자신의 영혼에 잔혹한 일을 하는 것입니까!

[7]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 한 번도 의미 있는 조명을 받아 본 적 이 없는 자들입니다. 위선자도 율법과 복음을 아는 지식에 있어 어느 정도는 조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히 6:4). 하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공통적으로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비추임이 있습니다(요 4:10; 시 9:10). 이를 통해 그리스도가 가지신 구원의 능력과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기꺼운 마음을 발견하고 그분이야말로 죄인을 구원하시기에 합당한 분임을 깨닫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그리스도를 부여잡고 놓지 않겠다고 결심할 만큼 이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깨달음은 매우 탁월합니다(마13:45. 46). 그리스도를 향한 이런 깨달음으로 그 앞에서 모든 세상의 가치는 빛을 잃습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생명의 양식과 비교해 이전에 시달리던 모든 죄악 된 정욕은 이제 돼지 여물통에 있는 콩깍지 따위로 여겨질 뿐입니다.

[8] 이들이 설령 복음의 빛을 갖게 된다 해도 거기에는 마음과 의지를 녹여 하나님 뜻에 부합하게 하고 복음의 부르심에 순응하게 할 만한 열이 없습니다(욥 24:13). 성령의 일반적인 역사를 통해 오랫동안 빛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이 여전히 돌과 같은 마음이 제해지지 않은 상태로 있고, 완고한 그런 마음이 풀어지지 않은 상태로 있습니다. 발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과 거룩함을 향한 적개심이 여전히 팽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6장 4절 말씀처럼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이 그런 예입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돌풍에 대문은 열려 성령의 일반적인 역사들이 있긴 하지만 마음의 방문은 여전히 굳게 닫힌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외부 성곽은 많이 무너졌지만 마음이라고 하는 보루는 여전히 철옹성 처럼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이러저런 정욕이 마음 보좌에 앉아 왕 노릇 하고있습니다.

[9] 여러 가지 종교적인 일에 힘쓰긴 하지만 복음을 통해 제시된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사귐 같은 것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시작은 잘하지만 결국 처참하게 훼손되고 부정하게 되어 버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이따금씩 비추는 빛과 뒤로 잡아 이끄는 정욕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느라 모든 귀한 기회를 다 소진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가까워지려 힘쓰기보다는 여러 가지 종교적 의무에만 힘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가 부지런히 짜 놓은 거미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거기서 죽는 거미처럼, 이런 사람들은 한 번도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 않다가 그대로 멸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빌 3:3). 죄를 용서받기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은 느끼면서도 성화를 위해 그분과 친밀히 사귈 필요는 보지 못하고 그런 마음도 갖지 못합니다.

 

2. 권면

악으로 방향 지어진 세상에서 나와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십시오. 복음의 부르심에 순응하십시오. 죄인들이여,그리스도께로 나오십시오. 그러기 위해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1) 당신이 등지고 나와야 할 세상이 어떤 곳인지 생각해 보십시오(엡 2:12).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 입니다. 사실상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람들이 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는 사회입니다. 당장 이런 세상에서 떠나야 합니다.

[1] 순전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죄악 되고 타락하고 부정한 곳입니다(딛 1:15). 악으로 방향 지어진 곳에 속해 사느니 차라리 개 사육장에서 개 들과 지내는 것이 낫고, 돼지 우리에서 돼지들과 뒹구는 것이 낫습니다. 세상에 속한 영혼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성한 데가 없고 진물 나고 가렵고 아픈 욥의 몸과 같습니다. 손가락 하나조차 성한 곳이 없어 스스로는 가려운 몸을 긁을 수도 없습니다. 구석구석과 모든 기능이 죄로 더럽혀진,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허영과 악으로 가득합니다. 열린 무덤과 같은 그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가증하고 역겹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교양 있는 행위라고 하는 것들조차 죄악 됩니다(잠 21:4). 종교에 열심인 사람도 예외는 아닙니다(잠15:8)

[2] 가장 비참한 사회입니다(계 3:17).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은 세상의 상태는 얼마나 소망이 없는지요! 세상에서 그리스도 밖에 있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의 비참함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이 겨누고 있는 과녁입니다(시 7:12.13).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사회는 감옥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죽어서 그 감옥을 벗어난다 해도 바로 지옥이라는 감옥으로 옮겨 질 뿐입니다. 이미 정죄를 받아 지옥에 있는 자들이나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자들이나 이미 불속에 던져진 마른 장작이 그 곁에서 곧 불속에 던져지길 기다리는 장작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먹구름이 금방이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퍼부을 기세로 항상 그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습니다(요3:36).

사탄이 지배하는 사회가 어찌 다른 모습을 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그렇게 살다가 죽는 사람들이 사탄 말고 누구와 영원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죄인들이여, 이만하면 이제 그곳에 있을 만큼 있지 않았습니까? 신명기 1장 6절 말씀처럼 당신에게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오 레바논에서 나오십시오(아4:8). 하나님의 진노의 흥수에 쓸려갈 불경건한 자들의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의 방주로 들어오십시오. 부패와 타락으로 무너져 내릴 소돔성과 같은 세상에서 서둘러 나오십시오. 얼른 그곳을 떠나 안전히 거할 수 있는 소알 땅으로 도망하십시오.

 

(2) 당신이 속하도록 부름 받은 사회가 어떤 곳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부르심은 가장 고상한 사회로의 부르심입니다(빌 3:14). 이 사회는 거룩하고 행복한 사회입니다. 이 땅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들인 성도들이 다 여기 속했습니다. 영화롭게 된 성도들, 거룩한 천사들, 그리고 이 사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이 이 사회를 구성하십니다(히 12:22-24).

이 세상을 떠나 이 거룩한 부르심으로 나오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놀라운 특권을 누릴 것입니다(엡 2:19). 영광의 기업을 이을 자요,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후사가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은총 가운데 행복하고 영원토록 온전히 하나님을 누리는 완전한 복을 누릴 것입니다.

 

 

3. 당신을 부르시는 이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듣는 것은 사람 목소리지만, 그 목소리가 전하는 말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께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고 말합니다(히 12:25). 우리 주 예수께서 성부께로부터 나라를 받으셨습니다. 사탄의 나라가 훼파된 바로 그 자리에 그 나라를 세우시려, 악으로 방향을 한 이 세상으로 오셔서 자기 영광에 참여할 자들을 불러내십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당신께 “일어나라, 주가 부르신다”고 말합니다.

[1] 우리 주님이 부르시므로, 당신은 주님께 와야 합니다. 당신을 위해 문이 열렸습니다. 이 음성을 듣고 오는 자 가운데 내쫓기는 자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사55:1). 타락한 천사들에게는 그런 특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타락한)천사들이 그런 당신을 시기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당신이 그런 특권을 누리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2] 그렇게 해서 오는 당신을 결코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요 6:37). 이미 부르심을 받은 것을 보면 당신은 틀림없이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어차피 거절될 테니 지금 가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는 불신앙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당신을 향한 부르심이 계속되는 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장이 아직 파하지 않았고, 당신이 환영받을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그치는 날이 옵니다. 그때는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문이 열려 있을 때 어서 오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 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 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눅13:24, 25).

[3] 그리스도의 부르심에도 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 부르심 때문에 당신은 곤경에 빠질 것입니다. 중보자가 자신의 부르심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보응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부르시는데 오지 않으렵니까? 그리스도께서 부르실 때 오지 않으면 임금의 노와 더불어 고통 가운데 오게 될 것입니 다(마 22:7).

이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도록 조심하십시오. 부르심을 입은 자답게 모든 말과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