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 이후 1000년 간 그리고 현재의 로마 가톨릭 교회까지 "주입"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순종으로 획득하신 의를 주입하셨다는 교리가 그것입니다. 이 교리는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파생된 정통 교리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우리가 순종하면 구원 불순종하면 형벌이라는 자력 구원론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어거스틴은 그의 신학의 후반기로 펠라기우스의 이러한 주장에 난점이 존재하던 시점입니다.
그의 신학의 전반기는 마니교와의 논쟁으로 마니교적인 결정론을 논박의 주된 논제가 자유의지에 대한 강조였기 때문입니다.
펠라기우스의 신학은 자유의지를 극한으로 몰고가는 신학이었고 어거스틴의 전기의 논지와 유사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펠리기우스를 논박할 때 주로 내세웠던 것이 예정론과 은총론입니다.
이때, 그 유명한 "선행 은총"과 "후행 은총"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교리가 중심을 이루게 됩니다.
최근 불거진 "준비론"이 이 교리에서 파생한 교리입니다.
루터가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이었다는 것 외에 그렇게 애착했던 저작물이 "노예의지론"과 "소요리 문답"이었는데 그는 이르기를 이 두 저작물만 남아 있다면 고대 교회의 복음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루터의 "노예의지론"은 바로 후기 어거스틴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마니교도와 논쟁에서 결정론을 논박하기 위해서 자유의지를 강조했으나 우리의 자유의지는 죄로 기울어지고 죄를 기뻐하는 노예의 의지라는 것이 어거스틴과 루터의 논지입니다.
이 펠라기우스의 신학이 종교개혁 시기 유럽에 횡행했습니다. 이것을 세미펠라기즘, 곧 절반의 펠라기우스주의라고 부릅니다.
이 신학은 그 모양에서 어거스틴의 은총의 신학을 닮아 있지만 그 속은 펠라기우스주의를 닮아 있었습니다.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가 순종으로 얻은 의를 "주입"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현재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교리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합니다.
시작은 이렇게 은혜로 시작했는데, 그런 신자가 범죄하면 이 주입된 의를 "상실"하는 구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가 그리스도가 획득하신 의이지만 그것의 존재하는 곳이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주입"이라는 교리로 설명한 것입니다.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의 상태는 타락한 아담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의를 상실하는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상실한 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고해만 하면 끝이냐 그게 아닌데 신부가 "보속"이라는 것을 요구합니다.
이 보속에는 예전 영화 미션에서 보았던 살인죄를 범한 주인공이 자기 갑옷을 그물에 넣고 정글을 끌고 다니던 "고행" 혹은 "금식" 또는 종교개혁 당시의 "면죄부"를 돈 주고 사는 것을 포함했습니다.
그럼 로마 가톨릭은 왜 이런 보속을 요구했을까요?
이는 죄를 두 가지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담의 첫 범죄의 결과로 사망의 형벌과 첫 범죄 행위의 잘못입니다.
이것은 우리 범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우리 범죄는 아담에게 약속했던 사망의 형벌을 부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사망의 형벌을 주님께서 사하셨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행위에 대해서는 아담에게 보속할 것을 요구하셨고 우리도 같이 자범죄에 대해서 이 행위를 갚는 보속을 요구하신다는 방식으로 죄문제에 대한 성경의 해석을 보입니다.
이 보속을 마치고 나면 사제가 사면을 선포하고 이때, 다시 우리가 그리스도가 획득하신 의를 다시 회복하는 구조를 띱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했는데, 죄를 회개하고 다시 의를 회복하는 절차는 우리 순종이 그리스도의 의를 결정하는 구조를 띠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절반의 펠라기우스주의라고 한 것이며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의의 주입"이라는 교리를 폐기하고 "의의 전가"라는 교리를 채택하게 된 것입니다.
의의 주입은 그리스도가 획득한 순종의 의가 위치하는 곳이 우리 내부라면 의의 전가를 이 의가 위치하는 곳이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 안입니다.
우리는 단지 이 의에 "동기화"된 상태를 "의의 전가"라고 합니다.
그럼 여기서 의문 한 가지 그럼 이 전가 교리를 택한 종교개혁자들은 이전의 어거스틴의 교리와 1000년 넘게 지속한 "주입"의 교리를 버린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의문에 질문은 일단 "아니오"입니다.
버린 게 아니라 문제가 되는 부분만 수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의화"라는 교리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거스틴에게서 이어져 오는 교리입니다.
의화란 우리가 의롭게 화한다는 의미인데 그 방식이 뭐냐면, 바로 "주입"입니다.
주입은 앞서도 말씀드린 대로 죄를 짓고 회개할 때, 고해와 보속이라는 순종의 행위로부터 주입을 부르기 때문에 행위구원론으로 경도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의화"를 "칭의"와 "성화"로 구분한 것입니다.
이 구분에서 알 수 있듯이 "주입"의 교리를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버리면, 사실 우리 형편이 재세례파나 세대주의자와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어거스틴을 이단의 괴수로 모는 꼴이기도 합니다.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고
칭의는 법정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때 의의 위치는 그리스도 안이고 우리는 단지 믿음이란 도구로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 신학적 해석은 우리가 행하는 여러 잘못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실제 우리 행위와 관계가 없도록 만들며 우리의 지속적인 실수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원형적 의에 지속적으로 동기화되면서 우리 행위와 무관하게 그리스도의 순종의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나서 여전히 어거스틴의 신학을 이어서 성화에 있어서는 "은혜의 주입"이라는 교리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이는 대요리 문답 77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법적으로는 우리 지위가 전혀 변함이 없는 "칭의"에 의해서 결정되도록 하고 우리 존재는 이전 교리를 따라 여전히 은혜가 주입되지 않고는 거룩해질 수 없는 구조를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눈치 채셨겠지만 좀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가톨릭 교회가 흔히 보속이라고 설명하는 죄의 행위에 대한 보속의 행위를 그리스도가 대신하신 것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형벌을 언약에 의해서 법적으로 이어받은 것을 십자가에서 사람 대신 받으신 "형벌적 대속"을 이루신 것을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칭의와 성화의 교리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이 교리를 믿는다는 것을 함의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이단을 경계했듯이 우리가 칭의와 성화에 관한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이 참된 진리라고 믿는다면 이를 이단으로 삼는 자들이 가만히 들어온 거짓 선지자라는 사실을 주지하고 분별하는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죄의 형벌에서 자유한 자는 반드시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칭의만 있고 성화를 부정하거나 법적 지위만 있고 존재적 변화를 부정하는 모든 교리는 역사적이고 사도적 교회가 보편적으로 가르쳐 오던 진리에 반하는 거짓 주장이라는 사실을 주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목회지를 두고 여러 차례 기도와 시도를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부득불 두 자녀와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생업에 전선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여건입니다. 제가 자주 포스팅을 하지는 못하지만 거짓을 주장하는 자들의 어깃장에 현혹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안에서 모든 형제와 자매가 평안하기를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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