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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기타미분류

“교회를 위한 신학, 그 실천적 의미에 관하여”

교회를 위한 신학, 그 실천적 의미에 관하여

 

장호광(안양대 신대원, 조직신학)

 

선교초기 한국교회는 사회의 앞섬이 였다라고 박정신 교수는 말한다. 구한말 한국교회는 변혁과 개혁의 시기에 역사와 시대를 앞서서 변혁하는 공동체였다. 교회가 교육, 문화, 여성문제, 정치문제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앞섬이로서의 교회는 해방 직후 권위주의 시대와 군사독재시대를 지나면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오늘날 한국교회는 오히려 모든 면에서 사회보다 뒤쳐져 있는 뒷섬이가 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탄식하고 있다. 작년 한 해 한국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굳이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미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는 냉소적 시선을 넘어서 혐오의 수준에 가까웠다.

그러한 혐오 증상은 2018년이 시작되면서 더욱 심화되고 고착화되는 듯하다. 왜 그럴까? 한국 기독교계의 원로 중 한분인 고 옥한흠 목사가 한국교회가 세속화되었다라고 진단하였다. 세속화, 그렇다. 한국교회는 이로 인해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 현상이며 한국교회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교회가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이 시점에, 교회가 왜 세속화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개혁은 상황과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을 다양한 차원에서 찾아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교회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정체성 위기와 외부로부터의 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외부로부터 오는 도전과 위기는 후기현대주의의 산물인 자유방임적 문화와 관계성의 위험이라 할 수 있다. 본 글은 외적 한국교회의 위기보다, 내적인 위기에 대해 주목하며, 그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향이 무엇인가를 제시해 보려고 한다.

 

한국 교회 내적 위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신학의 실종에 있다. 신학은 성경에 토대를 두고 출발했으며, 기독교 변증을 통해 그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초기 기독교가 많은 이단들과 철학사상의 위협을 받으면서 교리와 실천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교부들은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것이 정통신학으로 발전했다.

한국 장로교회는 칼빈에 의해 형성된 개혁주의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 위에 세워져 있다. 이러한 신학전통 위에 한국교회가 세워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신학은 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교리를 변증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정통교리를 혼돈케 하고 목회의 생명과 맥을 끊고 있는 잘못된 신학으로 변질되고 있다. 신학의 목적과 방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학의 바른 역할은 목회의 방향을 성경적으로 제시하고 목회의 현장에 활력을 불러 일으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교리와 실천의 현장인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면 신학함이 잘못 되었다. 왜냐하면 교회 없는 신학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은 항상 교회를 염두에 두고 신학을 생각해야 한다. 신학함이 교회의 유익과 목회자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지 못한다면, 신학이 실종된 위기의 목회현장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세 가지로 나누어 제시하려 한다.

 

1. 말씀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학은 시종일관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다. 신학은 성경이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유일한 원천임을 믿는다. 성경만이 인간이 죄로부터 구원받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며,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성경이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지금도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칼빈은 성경은 마치 하나님께서 친히 발언하고 계신 것 같은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기독교강요, 1.7.1). 그는 성경에 근거한 신학은 하나님께로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안내자며, 교사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교회는 말씀 선포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도, 존재할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기준이요 법칙이며, 그리스도인을 영적으로 부요하게 만드는 영적 유산이다.

수년전 한국을 방문한 강해 설교의 대가인 데니스 레인 목사는 교계의 한 신문 인터뷰에서 영국교회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요소로서 사람들이 더 이상 성경의 말씀을 믿지 않게 된 점을 첫 번째로 꼽았다.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는 한국교회도 바로 데니스 레인이 영국 교회에 대하여 진단한 것으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종교개혁은 루터의 말씀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었다. 한국교회가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삶을 가르쳐야 한다. 단지 말씀을 통한 축복만 기대하고, 우리의 삶의 위로를 위하여 말씀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의 뿌리는 사경회인데, 바로 그것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성도들의 삶에 적용시킨 것이다. 오늘날의 부흥회는 부흥사 자신의 의도가 지나치게 부각되어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님을 통하여 회개와 성화의 역사가 바르게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성령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과 함께’(per verbum et cum verbo) 역사하신다. 말씀에 대한 무지와 무시는 그 저자인 성령님의 의도를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객관적인 말씀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인간의 신비스런 경험에 끌려 다니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현 부흥회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올바른 해석은 멀어지고 주관적으로 체험되는 신비적이며 풍유적인 해석으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진정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강조해야 한다. 말씀은 교회의 기초요, 신학의 기초이며, 기독교윤리의 기초이다. 성경은 구원을 위하여 명료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성경은 교회와 성도를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성경은 그 자체로서 구원을 위하여 충분하기에 다른 교회의 보조물(전통과 회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성경관을 가지고 종교개혁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로마교회를 개혁하였다. 성경은 교회를 검증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쳐야 한다. 칼빈은 목회자들에게 하늘의 교리를 설교하는 것이 명령되었다고 한다(기독교 강요 4.1.5).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에 있어서 한국 성도들의 신앙관은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약한 신앙관은 바로 성경을 바르게 풀어주지 않은 데서 기인한다. 교회 안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지만 신학자나 목회자가 성경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보이는 현상만을 중시하여 성경 안의 기본교리를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았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중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목회자의 깊이 있는 성경해석 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성경에 근거한 신앙 고백서나 교리서와 같은 좋은 역사적 문헌들을 성도들에게 가르쳐 성경의 뼈대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는 말씀으로부터 태어난다. 그러므로 말씀 밖에는 교회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말씀을 교회에 맡기셨다. 교회는 성경 외의 다른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성경만이 교회의 시금석이요 규칙의 역할을 감당한다. 말씀인 성경은 항상 교회 위에 있다. 칼빈은 자신의 신학을 결코 성경 이외의 다른 곳에 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말씀의 저자이실 뿐만 아니라, 말씀의 통역자이시다. 내적 교사이신 성령의 조명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의 내적 부르심 없이는 아무도 믿음에로 나아갈 수 없는데, 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다. 구원과 관련한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성령의 숨은 사역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개인주의나 체험적인 신비주의에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자신의 숨은 구원사역을 자신의 형상인 말씀 밖에 세우시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과 말씀은 동일하지 않지만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자신의 종으로 부르시고, 이 종을 통해 진리와 복음을 보존하시고 전달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없는 곳에는 더 이상 진리도 믿음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종인 교회의 큰 일(opus magnum)"은 하늘의 아버지께 순종하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다. 몸이 머리에 순종하듯이 그와 같이 교회도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섬기는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몸이기 때문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성령과 말씀으로 다스리신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 속에 내주하시는 가장 분명한 증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시고 그들과 교제하기를 즐거워하신다. 이러한 인도와 교제는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인 믿음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성령과 말씀과 믿음은 삼중적 스펙트럼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 세 가지 요소를 통해 살고 성장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를 성령공동체요, 말씀공동체요, 신앙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셋은 모두 함께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서 동역한다.

 

2. 예배의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

 

급변하는 현대문화속에서 교회의 예배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각성이 대두되고 있다. 그리하여 예배갱신, 예배개혁, 혹은 예배회복을 추구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그에 따른 예배의 변화가 한국교회에도 선풍처럼 번지고 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전통적인 예배에 만족하였고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급속한 성장으로 치열한 산업경쟁사회로 진입하던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예배에 불만이 표출되었다. 사경회의 전통이 오순절적 부흥회와 기도원운동, 은사집회 등으로 전환되면서, 그러한 성령집회에 익숙해진 신도들은 전통적인 예배로 만족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많은 기성교회의 교인들이 오순절계의 교회로 이동하거나 자기교회의 예배를 그러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성령운동은 기성교회의 내부적 필요와 연결되면서 교파를 초월하여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영향이 자연히 예배의 변화를 초래하였는데, 특히 통성기도나 철야기도, 심야기도와 같은 기도에서, 그리고 예배가 뜨거워야 된다는 인식의 확산을 가져왔다.

한편, 복음송가를 처음으로 사용한 오순절교회의 영향이 기성교회의 청소년들의 음악적 필요와 연결되면서 찬송에도 영향을 미쳤다. 80년대에 찬양과 경배를 통해 예배를 변화시키고 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이 진행되었고, 가스펠송이 크게 확산되었다. 기성교회는 처음에 이를 금지하거나 제한하였으나, 점차 복음송 세대의 성장과 함께 수용하게 되고 드럼과 대형스피커가 강단으로 진입하기에 이르렀다. 70년대부터 시작된 매스미디어와 대중문화의 보편화는 80년대에 거부할 수 없는 대세로 정착하였으며, 80년대의 교회성장운동은 목회자 세미나의 홍수시대를 열었고 각기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였다. 90년대는 세기말적 위기감과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로 사회의 대세인 정보화와 테크놀로지의 수용문제가 대두되었다. 대교회들은 테크놀로지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교회전산화를 추진하였고, 위성중계 시스템을 설치하여 위성교회들을 만들고 있다. 대중문화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문화사역이 확산되고 예배에 대중적인 음악 이외에도 연극이나 무용 등의 예술적 장르를 도입하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은 시도들은 모두 예배의 위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더 이상 전통적 예배에서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예배의 참석이 하나의 신앙적 의무로 인식되고, 지루하고 무의미한 시간을 참아낼 뿐이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도 못하며, 특별한 체험이나 은혜도 받지 못한다. 급성장하던 한국교회는 정체를 보이고, 청소년들은 교회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고 대중문화가 그들에게 충분하고 다양한 즐거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교인들에게 교회생활이란 예배의 참석을 의미하는데, 예배가 적용성(relevance)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도의 교제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다(요일 1:3). 예배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흠향과 영광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예배 참석자들이 열정적 축제감을 느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열납이 일차적으로 고려되지 않는다면 결국 예배의 실패를 결과한다. 개혁교회는 이런 문제를 성찰하고 해결함에 있어서 칼빈의 예배론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1) 칼빈의 예배개혁

 

교회역사상 가장 큰 예배의 위기는 중세에 발생하였으며, 종교개혁은 이러한 예배를 회복한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은 교회개혁이며 예배개혁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보다 이신칭의교리에 근거한 교리중심의 개혁자였다면, 칼빈의 일차적 관심은 오염된 예배의 개혁과 회복에 있었다.

칼빈은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인데, 예배가 타락하고 오염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원리에 따라 예배의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 회복에 그의 생명을 걸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참된 예배와 그릇된 예배를 구별한다. 로마교회의 우상숭배가 그릇된 예배의 전형이라고 생각하고 제111-12장에서 집중적으로 우상예배를 비판한다. 참된 예배는 롬 12.1-3이 가르치는 영적 예배로서,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예배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에게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하였다. 칼빈은 410장에서 그릇된 예배의 세 가지 유형을 소개하였다. 첫째는 사람의 생각을 가르치는 예배이다.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는 예배(15.9, 29.13-14),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가르치는 예배(2.4-8)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실질적으로 그 시대의 정신과 민족적 전통, 또는 교파적 전통(장로의 유전) 등 인간의 생각을 가르치는 예배의 왜곡이다. 특별히, 그는 골 223절의 "자의적 숭배"(will worship)를 가장 전형적인 그릇된 예배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혹독한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종교적 철저성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전혀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종교성이다. 자기의 종교성과 영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과 예배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철저하고 인간적으로 존경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에게는 그릇된 예배인 것이다. 그것은 그 시대인들의 종교적, 정서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그 민족의 종교적 전통을 반영하며, 그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할지라도, 올바른 예배가 아니며 인간중심적인 자기예배일 뿐이다. 둘째는 바리새인의 예배이다. 칼빈은 "바리세인의 누룩"(23.3, 16.6)을 조심하라고 경계한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율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권위를 주장하며 무리한 실천을 강요하고, 스스로 본을 보이지 않으면서 지식만 팔고 있는 삯군이 인도하는 예배가 바로 그릇된 예배라고 규정한다. 예배를 좌우하는 것은 예배 인도자라는 점에서, 이 지적은 중요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배하지 않는 형식적이고 지식적인 차가운 죽은 정통의 예배가 여기에 속한다. 셋째는 연극적 예배다. 분위기와 의식은 우아하고 화려하며 음악과 설교는 장엄하지만, 인도자는 연극배우와 같이 연기를 하고 신의식과 외경심이 결여된 멋있는 예배다. 교인들은 예배를 즐기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없다.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예배이지만, 연극을 관람하거나 음악회에 참석하거나 감동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명강의를 들은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순간적인 엑스타시가 있지만,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 경험 자체를 소중히 생각하고 흠모할 뿐이며, 그 체험은 마음의 열기를 고조시키는 종교심리적 조작에 의한 유사경험일 뿐이다.

칼빈은 이러한 거짓 예배를 교회에서 정화하기 위하여 성상철거, 미신타파, 단순한 성경적 예배로의 복귀, 말씀에 대한 강조, 예배자가 이해할 수 있는 서민적 언어사용을 통하여 경건하고 순수한 영적 예배를 드림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오늘날의 개신교회 예배는 칼빈의 예배개혁을 통하여 정착된 형태이다.

 

2) 성경적 예배개념

 

교회의 예배회복에 있어서 그 규범이 되는 성경의 예배개념은 무엇인가? 신약에서 예배를 의미하는 용어로는 '프로스쿤네오''라트레우오'가 사용되었다. 전자는 '예배하다'는 동사형이 60, '예배하는 자'(proskunetes)라는 형태가 1회 나타난다. 70인경에서는 구약에 사용된 히브리어 '샤카'를 이 단어로 번역하였는데, ‘머리숙여 절한다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며, 3/4이 하나님에게 예배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왕상 1918절에서는 '나샤크', 즉 입맞춤과도 연결된다. 신약에서 사용된 60회의 용례를 분석해 보면, 극소수의 부정적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절, 경배, 예배한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위엄을 실감할 때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경우, 제자들이 그의 신성을 체감하는 순간 엎드려 절한다. 한편, 육체적 행위로서의 절은 그 대상이 보이는 경우로 한정된다.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승천까지 계속되지만, 그 후에는 결코 예수님을 예배하면서 육체적 행위로서의 절을 하지 않는다. 4:20-24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절하는 영적인 의미로 제시된다. , 진정한 예배는 이제 마음의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자기를 낮추고 복종을 서약하는 겸비한 예배자세와 헌신행위를 의미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라는 말도 '배례(拜禮)', 즉 절하는 예식이다. 따라서 예배의 '프로스쿤네오'적 성격은 경외와 숭배, 그리고 자기부정과 절대복종의 서약이다.

'라트레우오'라는 단어는 종(servant)을 의미하는 '라트리스'에서 왔으며, 따라서 종의 섬김과 봉사행위를 가리킨다. 이 말이 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에 대한 섬김으로 제한된다. 영어에서 예배를 'service'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 근거한다. 3:12는 출애굽의 목적이 하나님의 예배에 있다고 말한다. 10:12이하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진정한 섬김이 삶에서 진실하게 수행되어야함을 가르치는데, 이로서 예배가 의식과 생활의 두 면을 포함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21회가 동사형으로, 그리고 5회가 명사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의식과 생활에서의 예배라는 양면을 표현한다. 제사나 기도와 같은 의식으로 섬기는데 사용되는가 하면, 성결과 의로(1:75), 경건함과 두려움으로(12:28), 청결한 양심으로(딤후 1:3), 성령으로(3:3) 섬기는 생활의 예배와 봉사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라트레이아'의 용례를 살펴보면, 3회는 구약의 제사와 연관된 예배이며, 16:2는 유대인이 기독교인을 핍박하여 출교하고 처형하는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예'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롬 12:1의 영적 예배에 사용되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는 영적 예배는 구약적 예배를 완성하고 승화하는 예배의 결정적 형태이다. 따라서 예배의 '라트레우오'적 성격은 의식과 생활로 표현되는 섬김의 구체적 행위이다.

이러한 예배의 성경적 용례를 종합하자면, 예배란 (1) 그 대상이 배타적으로 삼위 하나님에 한정된다. (2) 그 계기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거룩과 능력에 접하여 자기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성을 느끼는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격과 감사이다. (3) 그 자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으로, 사랑과 경외심에서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절대복종의 표현이다. (4) 그 방법은 제사, 봉헌, 찬양, 기도, 말씀, 성례의 의식과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다. (5) 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예배의 위기는 교회의 위기이며, 교회의 약화는 예배의 약화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예배를 신학적으로 재조명하고, 예배와 신학의 분리가 그 중요한 원인이라는 인식하에 예배의 본질에 대해 활발한 신학적 논의가 전개되어야 한다.

 

3) 바른 예배에 대한 제언

 

(1) 바른 예배의 원리

예배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그 목적을 위한 방편이다. 따라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예배 순서는 무의미하고 형식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면 예배의 직접적 효과는 무엇인가? 예배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의식과 헌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예배를 기쁘게 받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열납을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평화와 결실로서, 예배자가 체험할 수 있다. , 하나님과 인간의 쌍방적 교제가 이루어질 때 예배가 완성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열납할 수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4장과 롬12장은 진정한 예배를 가르쳐 주는 중심성구이다. 따라서, (1)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 진실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3) 헌신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 성경적 예배의 회복

 

성경은 공동예배를 권장하고 있으며, 성찬, 말씀, 기도, 찬송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초대교회는 그에 따라 성경적 예배를 유지하였으나, 중세교회와 개신교회는 편중된 강조를 통하여 예배의 균형을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적 가르침과 초대교회의 전통을 중시한다면, 예배의 균형 있는 회복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1) 성찬의 회복: 종교개혁까지 교회는 매일, 혹은 최소한 매주 성찬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중세 카톨릭의 과도한 성찬집중에 대한 반감으로 일부 개신교회가 성찬을 11-2회로 축소시키고 그것도 형식화되었다. 칼빈은 그러한 축소를 "마귀의 간계"라고 비판하고 가능한 한 자주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기독교강요 4.17.46). (2) 말씀의 회복: 설교는 개혁교회에서 강화되었으나, 말씀을 읽는 것은 약화되었다. Sola Scriptura는 강조하지만, Tota Scriptura는 중시되지 않고 기호에 맞는 성경을 교파주의적 방식으로 설교한다. 설교에 설교자의 주관적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치하고, 설교자의 경건이 부족하여 성령의 조명과 인도가 약하다. (3) 기도의 회복: 기도회가 예배로 흡수됨에 따라 진정한 공동체적 기도가 약화되고, 성도들의 공동기도가 성직자의 전유물로 집중되었다. 또한, 기도자의 준비부족과 대상착오적인 연설식 기도가 등장하여 기도를 오염시키고 저질화하였다. 초대교회적 기도문의 회복이 요청되며, 모든 예배자가 공감하고 공동기도할 수 있는 공기도의 인식이 필요하다. (4) 찬송의 회복: 시편과 바울서신 등에서 보는 대로 찬송은 예배의 본질적 요소였으나, 종교개혁이후 약화되었다. 그에 따라, 예배가 경화되고 찬양의 활력이 상실되었다. 보다 열정적이고 즐거운 영적 찬양의 회복이 요청된다. 예배의 구체적인 형식은 성경이 확정하지 않았지만, 그 원리는 명시되어 있다. 성경으로부터 기원하는 예배의 전통이 역사적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전통은 중시되어야 한다.

오늘날 목회현장이 유행처럼 번지는 프로그램과 자유로운 예배형태로 예배의 본질을 벗어나고 있다. 교회들은 예배에 새로운 요소들을 첨가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예배에 있어 전통적 요소와 특징을 변화시켰다. 예배 인도자는 성경의 짧은 구절을 낭독하고 기도시간을 훨씬 덜 사용한다. 많은 교회들은 음악 분야에서 중대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교회는 예배 시간을 바꾸었다.

이처럼 종교개혁자들이 이루어 놓은 전통신학의 핵심과 전통은 교회성장이란 대명제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얼마 전, 36년간 소그룹과 현대적 예배, 봉사 중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미국교회와 전 세계 교회의 모델이 되어온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는 지금까지 나의 사역은 실수했다라고 말했다. 사역의 실패를 인정한 말이다.

빌 목사는 영적 성장은 훌륭한 교회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기도, 성경읽기, 교제라는 원리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즉 목회 본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경과 신학에 근거한 예배의 본질을 회복해야만 한다.

 

3. 신학중심 목회는 부흥의 수단이다.

 

신학의 실종은 곧바로 성도들의 혼란을 부채질하게 하며, 바른 신앙의 기초가 없는 성도들로 하여금 갖가지 풍조를 따르게 함으로써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지게 한다. 신학의 정립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 진리들을 바르게 전파하기 위함이다.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어야할 지도자들이 신학적 혼돈에 빠져있거나, 신학의 정립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실종되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 부정적인 모습들을 벗어버리고 한국교회가 신앙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새로운 갱신이 요청되고 있다. 그래서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1) 한국교회의 신학적 혼돈들

 

오늘날 목회자는 교회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질적인 면과 본질적인 면에 소홀히 하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부흥과 성장을 위해 성경이 제시하는 방법보다는 세속적인 처세술과 인본주의적 방법을 부흥의 수단으로 사용하곤 했다. 신학이 교회부흥의 강력한 수단이어야 한다. 성경적 목회가 실현되고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려면 신학이 살아나야 한다. 신학은 신학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학 없는 목회는 반드시 교회의 혼란과 정체성 혼란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또한 교회가 부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위해 매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진리를 외칠 때 교회의 부흥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1) 교회의 기초적 오해들

지금 세계 교회를 돌아보면 급속한 복음전파가 이루어지는 나라들도 많지만, 이미 세워진 교회들이 심각하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들도 많다. 한국교회는 최근 수년 동안 많은 교회들이 양적인 성장과 내적인 성숙을 이룩하였다. 그 결과 성도수가 1천명 이상 되는 대형교회가 3백여 개를 넘을 정도로 외적 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 대형교회의 진단을 통해 앞으로 교회 발전을 지향하는 현대 목회자들의 경향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한 검토를 해야 할 시기에 접어들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키시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대형교회든지 소형교회든지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목회자의 능력이나 은사는 도구에 불과하다. 대형교회든 중소형 교회든 성도들을 모으고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지금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각종 예배와 행사에서 어떤 원리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깊은 검토와 연구와 고뇌가 매우 적은 실정이다. 교회는 어떤 한두 사람들의 지도력으로 세워지거나 운영되지 않고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은총에 의해서 세워진다. 한국교회는 먼저 목회자들이 앞장서서 자신을 점검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혼란은 번영 신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한국교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로버트 슐러 목사에 대해서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슐러 목사는 수정교회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였는데, 설교는 불신자 전도를 위하여서 아주 파격적으로 짧아졌고, 교회는 각종 상업적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수정교회는 모든 프르그램을 유료화하였다. 로버트 슐러가 주장하는 성공은 자아를 높이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자기 부인과 낮아짐을 강조하는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 요소들이 많다. 슐러의 목회가 지닌 문제점은 심리학자 노만 빈센트 필 박사의 적극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심리학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긍정적 사고방식을 근거로 하여, 심각한 스트레스와 낙심에 잠긴 성도들에게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격려와 위로를 하는 것이다. 로버트 슐러식 성공을 지향하는 복음운동은 물량주의, 세속주의, 개교회주의, 사업주의 등 문제가 많다. 슐러 목사는 부인과 함께 오르간 하나만 가지고 미국 제일의 관광도시, 디즈니랜드가 있는 로스엔젤레스 남부도시 아나하임에 이주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고 강조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와 같이 세상의 성공을 찾으라고 격려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에 영향을 깊이 받은 한국대형교회의 목회적 원리는 과연 성경적 근거가 있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분만을 즐거워하는 목적에서 추진되는 것일까? 경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은 도외시한 채, 사람들의 부귀영화를 축원하고 빌어주는 세속적인 것이라면, 아무리 큰 교회라 하더라도 자성해야 할 것이다. 오직 복음에 입각한 목회원리를 정립하고 시행해야 하며, 성경적인 반성과 점검을 해야 한다.

 

(2) 주관적인 신앙의 위험성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건전하게 정립하려면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바른 신학을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한국교회가 주관적 신앙의 증진에만 힘쓴 나머지, 그쪽 방면으로 경도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한국 성도들은 기도원에 가서 자신의 내적인 능력과 충전에 힘써왔다. 부흥회를 통해서도 자신이 능력 받는 일에만 힘써 왔다. 이런 주관적인 신앙의 개인주의와 신비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어서, 맹목적이며 현실 도피적인 근본주의자들로 전락하게 된다. 독일 경건주의 운동도 한때는 무미건조하고 역동성이 결여된 정통신학과 신앙을 갱신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지만, 주관주의(subjectivism)에 빠져 개인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심화시키다가 슐라이어마허의 감정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극도의 개인주의적인 신학운동으로 흐르는 실패를 맛보았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역사의 한 복판에서 객관적으로 역량을 발휘하여야한다. 물론 신앙은 신비하고 초월한 것이다. 그래서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하다. 침체에 빠진 한국교회를 살려내는 길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존하는 길뿐이다. 진정한 교회의 부흥은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부흥은 어떤 유명한 목사나 어떤 저명한 설교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인간의 산물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객관적인 신앙증진을 위해서 공동체적으로 모이고, 공공의 장소에서 함께 기도하고 노력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새롭게 부흥시킬 만한 목회자들을 가르치시고 능력 주셔서 일하게 하신다.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무엇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심령을 감화시키고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기름 부어주심에 달려있다. 모든 하나님의 일군들이 가져야할 가장 필수적인 갱신 방법은 경건의 능력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5)고 가르쳐 주었다. 하나님은 마음을 정하여 부르짖고 열심히 노력하는 성도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은혜를 주신다. 은혜와 사랑을 주셔서 그분을 흠모하고 찬양하게 하시는 것이다. 순수하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일군들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답보상태에 빠진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과 갱신을 도모하는 일은 인간의 논리에서 나오는 어떤 프로그램을 만든다거나, 이성적인 비판의식에서 나오는 대안만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능력으로 무장한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 이세벨과 아합의 광풍노도와 같은 우상숭배의 시대와 비슷한 오늘날에 살면서, 부흥을 염원한다면 능력의 사자 엘리야처럼 낙심과 좌절을 겪게 된다(왕상 19:9-14). 부흥은 엘리야처럼 특별한 열심을 내어도 안 되는 것이며, 그 어떤 인간이 개발해낸 방법론만으로 일어나는 것 역시 아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겸손하게 마음을 다하여 간구할 뿐이다. 부흥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기적과 이적의 역사이다.

 

2) 신학의 긴박한 필요성

위에서 제시한 문제의식이나 한국교회의 문제를 극복하는 대안은,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신학을 정립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신앙의 정립은 바른 신학을 충분하게 체득하는 데서 나온다. 인위적인 방법으로는 건전한 교회를 오래 동안 유지하거나 발전시킬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려 주시는 성령의 감화로 가능하다는 생각만 성경적 확신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교회들은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큰 교회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성령의 주권 속에서 강하게 성장하여 박해와 시련을 이겨냈다. 그들은 모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성경적, 신학적 바른 기초를 가지게 되었다. 한국 초대 교회는 박해 하에 있었고 엄청난 배척을 당했지만, 건전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헌신하여 연약하게 되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신앙적 확신과 순진함이 있었다. 하나님은 한국 초대교회 성도들을 강하게 하셔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고난을 이겨내도록 확신을 주셨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은 하나님이 주신 크나큰 은혜의 체험이었다. 이제 한국교회가 살아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교회 갱신을 통해서 모든 병폐와 부조리를 갱신하는 길이다. 한국의 부패한 시대정신을 청산할 수 있는 신앙적 능력을 회복하고, 교회의 기초가 되는 안목을 서둘러 정립할 때이다.

세계교회는 지금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신학사조에 크게 침식을 당하고 있다. 이것은 관용주의와 혼합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더욱더 번져나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퍼져 나온 이후 교회의 절대적 권위와 존귀함은 사상적 도전을 극도로 받고 있다. 그리고 오래된 교회들이 주장해온 성경적 권위도 부정한다.

어찌하든지 한국교회를 바로 살리는 길은 바른 정신을 마음의 비석에 새기는 것이며, 이는 신학의 바른 이해를 통해서 준비된다. 앞에서 지적한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은 종교적 혼합주의가 한국교회에 심각하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을 기본적으로 충분히 이해하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균형 잡힌 안목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토대로 하여 신학을 바르게 정립할 때에 가장 순수한 기독교 신앙을 찾게 된다. 신학이 잘못된 설교 혹은 신학이 없는 설교는 계시의 목적을 왜곡하고 윤리적인 교훈에 그치고 말거나 잘못된 적용으로 혼선을 초래하게 된다. “선포가 없는 신학은 공허한 것이요 신학이 없는 선포는 맹목적이 된다는 말은 설교자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의미 있는 경구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느 나라보다도 더 많은 기독교적 형태를 갖춘 이단들과 사이비 기독교와 유사 기독교, 불건전한 신비주의, 혼합주의가 자라나고 있다. 한국기독교 백이십 여년의 역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불건전한 메시지를 선포하는 이단적 가르침이 독버섯처럼 많이 자라나고 있다. 이것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의 신앙적 안목이 바르게 형성되지 못한 결과이며, 허술한 신앙에서 비롯한 것이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가르침들이나 출판된 서적들은 예외 없이 성경적이며 체계적인 기독교 신학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건전한 신학을 통해서 바르게 세워지든지, 불건전한 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비뚤어지든지 그 열매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바르게 세울 신학적 안목을 갖추는 시대적 긴박성을 절감한다. 그리고 하나 더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교회부흥의 원동력은 신학의 회복에 있다. 바른 목회신학으로 무장하여 설교하고 그 목회관을 실현시킬 때 교회가 부흥된다고 믿는다.

교리를 알면 삶이 보인다:

현재는 미래(종말)에 달려 있다

 

보통 사람들은 현재가 미래를 결정짓는 것으로 이해한다. 보이지도 않고 결정되지도 않은 미래는 현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현재를 어떻게 꾸려 가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현재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역으로 미래가 현재를 결정짓는다. 일반 사람들에게 미래는 보이지도 않고 결정되지도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미래는 이미 결정된 미래다. 그 미래의 결정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사건이다. 언제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를 모를 뿐이지 언젠가는 반드시 오신다. 당신의 다시 오심은 시간에 마침표를 찍는다. 시간성이 종말을 고하고 영원성이 도래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과거와 현재는 이미 결정된 미래에 의해 만들어지며 진행된다. 미래가 현재를 결정짓는 힘이며 근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즉 종말을 현재의 환경과 여건, 특히 경제적 여건에 따라 뜨거운 감자가 되기도 하고, ‘식은 감자로 이해하는데 있다. 1960, 70년도에 우리나라가 살기 어려웠을 때 종말이 거의 모든 교회에 뜨거운 감자로 부각되었다. 현재가 힘드니 예수님이 빨리 재림하셔서 하늘나라로 올리어지기를 학수고대했었다. 그래서 그 당시 강단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종말을 다루는 설교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드라마틱할 정도로 급성장하여 잘 살게 되니 종말과 관련된 설교가 자취를 감추었다. 성도들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예수님이 천천히 재림하기를 바라는 듯한 성향을 보여 주었다. 경제적 형편이 갑자기 좋아지니 현재를 더욱 즐기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종말이 경제적 형편에 따라 뜨거운 감자가 되기도 하고 식은 감자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종말에 대한 편협 되고 잘못된 이해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다시 말해 종말을 너무 교리적으로만 치우쳐 이해했기 때문에 나타난 왜곡된 현상이라는 말이다. 보통 종말론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은 천년왕국’, ‘중간기’, ‘재림의 징조’, ‘최후의 심판’, , 주로 교리적 내용이다. 때문에 종말하면 그리스도인의 현재 삶과는 거리가 먼 교리적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에 있어서 종말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에게 종말은 현재그리스도인의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한 잣대이자 능력이다. 이미 정해진 종말적 사건이 현재에 본질적 의미를 제공해주며 근거 짓는다. 이제 칼빈이 종말을 특히 현재와 연결시켜 어떻게 주장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칼빈은 종말론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하늘에서의 영원한 안식처를 기다리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며, 그리고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부활하실 그날을 준비해야하는 인간을 향해있다. 신앙의 확실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떠한 의심도 보이지 않는 영원한 삶의 소망에 근거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그 근거를 가지며, 종국적으로는 우리의 이성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비로 가리어져 있는 영원한 삶을 위한 부활에 그 근거를 가진다.

우리가 늘 예배 시에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도 영혼뿐 아니라 육체를 포함하는 영원한 삶을 위한 부활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그 신앙고백은 우리가 어떻게 이 땅을 도덕적 행위를 통해 아름다운 본향으로 만들 수 있는 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긴장 속에 펼쳐지는 우리의 삶 속에 기다림의 미학이 스며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모순과 대립으로 가득 찬 종말론적 긴장은 일상적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를 통해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체적 시각에서 보자면 미래에 이루어지게 될 종말적 사건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에게 현재는 단순한 현재가 아니라 항상 미래에 의해 둘러 싸여져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삶 되게 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칼빈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 있다. “우리는 변화무쌍한 이 땅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얻으려 노력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의 종말론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미래의 삶에 대한 묵상(meditatio futurae vitae)’은 단순한 묵상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전 존재를 미래에 이루어지게 될 영원한 삶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묵상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종국적 목적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머물 장소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미래적 삶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인식론적 원리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에서 형성된다. “그것은 사랑의 열정처럼 하나님을 섬기도록 우리를 몰고 가며 움직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또한 골로새서 15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사단의 유혹과 육신의 탐욕,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늘에서의 삶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그래서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는 것보다 더 높은 지혜가 구해져서는 안 된다. “바르고 영원한 삶을 향한 열정을 일깨우기 위해 마지막 부활에 대한 소망보다 더 예리한 자극제는 존재치 않는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칼빈의 통찰은 종말론적 관점 없이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하늘의 것이 땅의 것이 공존하지만 교회 공동체적 삶에 있어서는 하늘의 것이 보다 더 풍성하다 .

칼빈에 있어서 종말론의 의미가 단순히 섭리론과 관련된 부차적인 신학사상으로 간주된다면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의 종말론적 관점은 그리스도인의 거룩성을 유지시켜나가는 강력한 동인으로서의 의의 또한 갖는다. 다시 말해 그의 종말론은 단순히 교리적 사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반영되는 것이며 삶의 분별력을 높여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이 천국에 대해 가지는 소망은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사슬과 얽매임으로부터 해방시켜주며 이 땅의 삶 속에서 찾아오는 무거운 짐을 잘 참고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며 힘이다. “이 시간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과 질고, 그리고 무거운 짐을 영원한 하늘나라에 맡김으로써 견딜 수 있게 한다.” 새로운 하늘을 기다리는 자는 기다림과 더불어 새롭게 되기를 시작하며 동시에 새롭게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케 하며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과 고통이 끝나게 되는 마지막 날에 대한 기다림은 현재 우리에게 닥친 낙심과 절망을 멈추게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만이 우리의 육신을 요동치게 하는 탐욕에서 멈추게 하며 모든 불행 속에서 인내를 낳는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가장 큰 위로 중 하나는 구원에 대한 기다림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가장 달콤한 위로이다.” 때문에 미래에 닥칠 소망은 현재당하는 십자가의 쓰라림을 가볍게 해준다.

칼빈에 있어서 영원한이라는 말과 미래적인이라는 말은 상호 교호적이다. 다시 말해 영원성이 미래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속에 들어와 빛을 비추며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참아내는 인내를 제공한다. 때문에 영원은 현재의 삶의 부속물이나 장식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을 미래에 얻게 될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곳으로 이해하게하는 근거이다.

환언하면, 칼빈에 있어서 예수님으로 인해 생겨난 소망은 단지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으로 이루어진 이미 실현된 종말은 우리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현재적인 사건으로 가져온다. 따라서 부활은 현재를 해석하는 틀을 제공해준다. 고난과 실패로 가득 찬 삶이라 하더라도 부활의 빛 안에서 삶은 소망으로 빛날 수 있다. 부활은 미래적 사건이자 현재적 변화이다. 이것은 곧 현재와 미래에 있는 우리 삶의 희망이다. 부활의 빛, 생명의 빛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을 드러내준다. 부활의 소망은 인간의 생명을 확인하게 하며 또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는 힘으로까지 확장된다. 인간이 모든 역경을 견디고 죽음까지도 별것 아닌 일로 여기며 자신의 삶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은 부활의 빛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모두 같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도 부활의 빛 안에서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이 빛 안에서 가능한 일이다. 부활은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며 악에 꺾이지 않는 생명의 소중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 안에서 생명을 바라보는 그런 시각은 우리의 현재 삶을 규정해준다. 칼빈은 부활을 통해 우리 삶의 한가운데 생명의 소중함과 소망이 뿌리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칼빈에게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부활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규정해주는 윤리적 잣대이자 규준의 역할을 하는 결정적 사건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재 삶 속에 나타나는 긴장은 칼빈의 히브리서 111절에 대한 설명에서 잘 보여준다. “영원한 삶이 우리에게 약속되었지만 그러나 죽음 또한 약속되었다 우리는 의로운 자로서 약속되었지만 우리 안에 여전히 죄가 정주해 있다. 우리의 삶이 축복으로 둘러싸여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지만 끝없는 고통으로 넘쳐흐른다. 물질이 넘칠 것이라고 약속 받았지만 실상 우리는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고통을 겪는다. 하나님은 우리 편에 서 계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의 부름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우리를 소망에 서 있지 않게 한다면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칼빈은 자신의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관한 증거로써 성경을 읽을 것을 권한다. 부활에 대한 소망은 의로운 행위로 인해 당하는 핍박과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사라진다면 모든 신앙심의 근거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현재의 교회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난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면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찾아 올 축복의 날들을 바라보면서 인내하고 견디어 나가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하늘에 대한 소망에 뿌리를 내려야 흔들리지 않고 견고해 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중한 선물은 자신의 독생자를 값없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속에 대한 소망이다.

모든 사물의 끝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냉혹한 진지함이 묻어나있다. 그러나 그것은 의심이나 건조하게 메말라있는 소리가 아니라 위로와 격려의 소리이며 소망에 대한 기다림의 묻어남이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언약의 빛 속에서 우리의 삶에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하며 끊임없는 투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여정으로 이해한다. 칼빈은 그런 삶의 여정을 강도들로 가득 찬 숲을 지나는 여정으로 비유하지만, 우리를 멸망의 나락으로 영원히 떨어지게 하는 그런 여정으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오실 주님은 질병과 염려와 절망의 무거운 짐으로 인해 갖는 고통과 낙심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현재 삶의 잣대이며 규준이신 그리스도는 또한 미래의 규준이 되신다.

칼빈의 내세에 대한 소망, 즉 종말론적인 소망은 단순히 미래에 이루어질 소망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양심 그리고 의지를 동원해 현재의 우리의 명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리게 하는 근거이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칼빈은 종말에 대한 기다림을 성도의 거룩한 삶을 위한 잣대로 삼았지 중세 수도원에서 행했던 것처럼 고요히 명상에 잠겨 자기를 내적으로 통제하려는 잣대로 삼지 않았다. 미래를 기다리는 삶의 태도는 시간에 대한 숫자적인 놀이가 아니라 비록 비밀과 신비로 가득 차 있지만, 이미 도래한 기다림이며 그런 기다림 속에서 긴장과 성장이 동시에 진행된다.

칼빈은 자신의 교회 성도들이 거할 처소와 본향에 대해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목적지를 향하는 방랑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기위해 그의 글 속에서 계속해서 오실 주님을 상기시켰다. “부활의 희망과 심판에 대한 사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정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게 한다.” 미래와 현재의 관계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구체화된다. 즉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삶은 종말론적 삶이며 그것은 열광적인 요청이나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순전한 겸손과 엄격한 절제를 통해 특징지어진다. 우리는 그런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달으며 동시에 하늘나라에서 맛보게 될 영광을 미리 체험한다.

오실 그리스도로부터 그려진 삶의 모습은 행위를 무시하거나 감각적인 것을 무시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발을 디딘 땅에서 엄격한 책임성을 가진 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순례자이다. 그래서 매번 디디는 발걸음과 더불어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기대되는 답변을 생각한다. 소망으로 가득 찬 칼빈의 종말론은 괴테의 개별적이며 미학적인 삶의 관념과는 다르며, 목적을 이 땅의 것에서 찾으며 신의 이름을 빌어 휴머니즘에 초점을 맞춘 근대 실증적 행복론과도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칼빈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세계는 일상적 삶 속에서 갖는 역할과 임무를 통해 형성되며,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내적으로 자유로워지면 질수록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의식이 보다 강해진다. 그리고 그런 의식은 이 땅의 삶 속에서 수행되는 우리의 실천을 구체화시킨다. 우리가 가진 소망의 활력은 우리의 기질에 담겨있는 기력(氣力)으로부터가 아니라 소망의 대상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러나 미래에 닥칠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소망은 지금 그리고 여기서실존적 결정을 내리게 하며 우리의 현재를 각인시킨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인이 갖는 소망은 단순히 개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롭게 되자마자 우리는 힘을 다해 영원한 유산의 목적을 향해 온힘이 모아져야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칼빈이 마지막 부활에 대한 소망이 그리스도인의 현재 삶을 규정해주는 잣대이며 규준이라 해서 현재를 미래에 비해 상대화시키거나 가치절하 시킨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오실 그리스도의 날에 대한 동경이 우리의 현재성을 약화시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닥칠 영원한 미래적 사건에서 갖게 되는 긴장은 이 세상 속에서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게 하며 이웃을 섬기게 하는, 즉 성화의 길을 걷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그리스도인이 현재 누리는 삶을 간과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 특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육신을 죽이고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현실 도피적이며 비관론자로 빠질 위험성이 있다.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그런 현실 도피적 삶이나 세상을 등지고 금욕적인 삶을 영위할 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과 이 땅에서 누릴 일시적 삶을 비교해본다면 이 땅에서의 삶을 상대적으로 가치절하 시킨 것은 당연하다. 그런 사실을 칼빈의 욥기서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땅의 삶과 하늘에서의 삶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한다면 고요를 그 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 세상의 사라질 모든 것들을 무시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내세에 대한 소망을 주시는 동시에 현재 삶에 큰 가치를 부여해 주신다. 이 세상 자체는 높은 가치를 갖지 않지만 그러나 하늘로부터 엄청난 가치를 부여 받았다. 이 땅에서 가지는 우리의 삶은 고요와 평화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점철되어있다. 물론 종국에는 승리가 담보된 싸움이지만 육신에 대한 염려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육신에 속한 것들은 이 땅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수단이지만,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서는 사라지게 될 것들이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종말론적 신앙은 삶에 있어서 무거운 짐이거나 두려움의 근원이 아니라 기쁨과 만족의 샘이며 이 땅의 일들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항상 새로운 용기와 힘을 공급하는 원동력의 역할을 한다. 칼빈은 감옥에 갇힌 성도들에게 현재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모든 유혹과 싸워 승리하도록 고무시켰다.

칼빈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세상을 멀리하며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펼쳐지게 될 미래는 자기가 그린 상상의 미래가 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싸우는 싸움은 미래를 향한 싸움이며 그리스도께서 지금 그리고 여기서우리와 함께하는 싸움이다. 그런 싸움은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칼빈에 있어서 영원성이란 우리의 덧없는 삶 속으로 뚫고 들어와 활력소를 제공하며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불어 넣는 원 근거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무시는 어떤 경우에도 세상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등지며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살아감을 자각하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세계를 관리하고 돌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영원을 향해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소망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현실과 세상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문화나 규범, 그리고 예술과 학문 등 인간의 자율권과 이성의 능력에서 나온 생산물을 단순히 세속적인 것으로나 혹은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장차 오실 주님에 대한 기다림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을 통한 사역으로 인도하는 역동성을 불러일으키게 하며 선한 싸움을 위해 강하게 무장시키는 능력을 낳게 한다. 마지막 부활에 대한 칼빈의 사상은 단지 저 세상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이 세상저 세상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가르침이다.

칼빈은 교리적 주제, 가령 예정론이나 삼위일체론, 악의 기원 등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에 의해 설정된 인간인식의 한계를 존중하려 노력했다. 그 중에서도 그는 종말에 일어날 모든 일을 자세히 설명하려는 시도에 신중을 기했으며 두려운 마음으로 접근하려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통해 알려주신 것 안에서만 마지막 일들에 대해 알 수 있을 뿐이며,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또한 칼빈은 지옥의 형벌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자세한 지식을 가지려는 시도 대신 그런 문제가 우리의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지옥의 형벌에 대한 묘사는 우리를 두려워 떨게 만드는 것에 근본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악한 행실을 통해 입게 될 손상과 보상이 얼마나 큰 지를 자각하게 해주는데 의의가 있다. 악인은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인해 파생될 지옥의 형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칼빈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는 두려움에 떨게 하는 실재성인 동시에 윤리적 특성을 지닌다. 그런 진노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진노와 노여움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어쨌든 칼빈의 종말론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질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부활에만 방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정체성(Identity)을 확립시켜주며, 지금 당하는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원적 능력이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하며 거룩한 삶, 즉 성화의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