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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겐샤이와 겐세이

'겐샤이'이 우리에게는 일본어 겐세이(けんせい, kensei)가 떠오르게 하는 말이다. 일본어 겐세이는 "견제하다"는 의미이지만 "겐샤이(जेनशाई, Gensha)"는 고대 힌디어로, 누군가를 대하는 나의 태도와 방식이 그가 스스로를 작고 하찮은 존재로 느끼도록 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작은 존재로 대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대하는 방식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 전통에서 우리는 우리 비참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비참이란 원래의 자신을 알아야 지금의 처지를 비참히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이라는 비교점이 있을 때 지금 자신이 먹는 돼지 쥐염 열매와 품군보다 못한 자기 처지에 대한 비참에 대한 인식이 생긴다.

 

겐샤이는 이 비참을 너머 아버지 집에서 만나게 될 환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환대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바라보는 것이다. 겸손(humility)은 흙을 의미하는 후무스(humus)에서 온 말이다. 내 본질이 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가 빛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타인을 겐샤이 할 수 있다.

 

칼뱅이 자주 인용했던 버나드는 그의 책 하나님의 사랑에서 사랑의 최고의 단계를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단계라고 밝혔다. 그런 사람은 타인을 만날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아들을 주시고서라도 구원하시고자 했던 깊은 사랑을 목격한다. 그런 시선을 타인을 존중하고 자신의 본질이 흙임을 잊지 않는 시선이 겐샤이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대할 때 겐세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견제하고 방해하며 상대의 말에 관심이나 상대 자체에 대한 환대를 보이기보다 시기와 질투로 일관한다. 둘째 아들도 이런 시선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저 품군이기를 바랬다. 이것은 자신이 아버지에 가졌던 불만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 불만은 맏아들에게서도 관찰된다. 그렇게 둘째가 아버지에게 환대받는 꼴을 못보는 것이다. 겐세이를 한다. 내가 중심이어야 하고 사람들의 관심이 나에게 와야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겐세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겐세이는 그를 초라하게 하며 그것은 이용이지 환대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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