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햄릿은 우유부단했었고 리어왕은 오만함, 오셀로는 질투, 멕베스는 탐욕이 그들이 맞은 비극적 운명의 이유였다. 운명은 그들이 지닌 인간적 결함과 모순, 부패로부터 기인한다. 이것이 서양 정신사에서 비극이 지닌 모티프다. 비극의 원인이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서양정신사의 비극의 또 다른 특징은 세익스피어이 4대비극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들어가지 않는 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성격적 결함이 빚은 비극적 현실을 딛고서 살아야 하는 현실이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5:1에 나오는 아비와 아들의 음행은 고린도 교회의 영적 현실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면서 고린도라는 배경이 지닌 특수성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래스가 쓴 오이디푸스 왕의 배경이 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 그리스 비극은 테베와 아폴로 신전이 있던 델피, 그리고 고린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델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는 아폴론 신전의 마당에 새겨진 글귀이기도 하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는 아이가 없었고 델피에 신탁을 얻으러 갔다가 아이가 있을테이지만 그 아이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라이오스는 자기 아들을 목동에게 시켜 죽이라고 명했으나 아이를 불쌍히 여겼던 목동은 아이의 발을 줄에 묶어 나무에 매달아 두고 라이오스에게는 아이가 죽었다고 거짓 보고를 한다.
한편, 고린도의 목동이 이 아이를 발견하고 자식이 없던 고린도의 왕 폴리보스에게 아이들 데리고 간다. 폴리보스는 이 일을 비밀에 붙이고 그 아이를 자기 아들을 삼아 오이디푸스라고 했는데 오이디푸스(Oedipus)는 ‘부은(oedi) 발(pus)’, 혹은 ‘발(pous)을 안다(oida)’라고 풀이 될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유대인이고 그는 성경의 유페미아(euphemia), 곧 완곡어법에 익숙했을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발은 음부나 나체를 완곡하게 가리킬 때 쓰인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돌칼로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을 “모세의 발에 대었더니” 즉어가던 모세가 살아났다고 기록했다(출애굽기 4:24-26). “모세의 발 앞에 던졌다”(개역) 또는 “모세의 발에 갖다 대었다”(개정)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모세의 “발”은 “남근”을 일컫는다. 오이디푸스의 묶인 발은 그의 삶이 지닌 성적 부조리의 은유다. 그렇게 왕의 아이로 잘 자라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폴리보스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변에서 수근대던 소리를 듣는다. 괴로움에 델피에 신탁을 받으로 갔다가 "뼈를 준 아버지를 살해하고 살을 준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는 신탁을 듣고 혼란에 빠지고 만다.
마침 테베에 나타난 괴수 스핑크스의 문제로 인해 신탁을 구하러 오던 라이오스 왕의 일행과 테베 삼거리에서 오이디푸스와 마주치고 격분한 오이디푸스는 자기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게 된다. 그 유명한 스핑크스 이야기는 바로 이 비극의 대본에 나오는 이야기다. 스핑크를 해치운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으로 추대되어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낳는다. 그후 테베에 역병이 돌고 역병의 이유를 델피의 신탁에서 물었는데 살인자 때문에 일어난 역병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살인자를 찾기 위해서 장님 예언자 테레시야스를 부른다. 사실 이 장면도 매우 역설적인데 자신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오이디푸스와 모든 상황을 이해한 테레시야스의 상황이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테레시야스로부터 그 살인범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듣고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에게 라이오스에 대해 묻는데 점점 자신이 죽인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오카스테는 충격으로 자살을 하게 되고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딸이자 누이인 안티고네의 손에 의지해서 방랑자로서 삶을 마감한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사실 이런 그리스 비극의 현대적 재구성이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삶의 현실에 대해서 어둡고 알지 못한다는 부분에 착안하여서 사랑과 미움의 서사로서 우리 내면적 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재해석해 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프로이트의 업적만은 아니다. 이미 그리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Περὶ ποιητικῆς)에서 미메시스(Mimesis), 곧 심리적 재현(representation)을 통해서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카타르시스를 통해서 우리 삶을 새로운 지평에서 이해하게 된다고 표현했다. 프로이트의 사랑과 미움의 서사로서 오이디푸스는 우리 삶의 지평을 풍요롭게 해주는 현대적 이해를 담고 있다.
대부분의 정신 병리와 인간이 지닌 운명의 비극은 자신의 삶의 운명적 결함으로부터 유래하는데 이것은 바로 이 사랑과 미움의 서사에서 우리에게 금지된 것을 들여다보지 못함에서부터 비롯된다. 율법의 금지는 금지 자체가 그 목적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며 금지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금지 너머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인간의 부패와 결함은 이 금지를 대면하지 못하고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회칠하여 그것을 덮고 만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두려움은 자신의 자녀를 죽이라는 명령은 반인륜으로 되돌아 왔다. 자녀를 버리는 과정 자체가 반인륜이었으며 그 반인륜이 비극적 열매로 돌아온 것이다.
눈이 있으나 보지 못했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보지 못함을 한탄하여 자신의 눈을 찔렀을지 모르며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자기서 헛투르 내뱉은 근친상간에 관한 소문 한마디가 자기 삶에 되돌아와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자기 혀를 자르고 만다. 그럼에도 운명을 견뎌내고 살아내야 하는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비극인 셈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많은 것을 타인을 탓하며 환경을 탓하며 신을 탓하며 우리 운명을 원망하지만 우리 자신이 지닌 인격적 결함과 죄에서 비롯된 부패가 우리 삶에 결과로 되돌려지는 이 비극 앞에서 두려움과 연민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우리 삶을 용서하는 근간이 여기 있으며 우리가 삼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삶의 본질적 성격이 여기에 있다.
내 인격적 결함을 돌아보지 못하고 사랑 말고 우리 삶의 어두운 곳에 자리 잡은 미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삶을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도 빛 가운데 계시며 또 흑암 가운데 계신다. 그 두 지평이 우리 삶에서 융합되는 것이 구원이 우리 내면에 일으키는 변화다. 신앙 성장은 단지 카타르시스는 아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변화가 인문학이 가져다주는 심리적 변화와 삶에 대한 이해의 지평보다 못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우리가 믿는 십자가는 그 어떤 카타르시스와 비교할 수 없는 내면의 평안을 가져다주며 그 평안은 단지 내가 그리 느끼는 문제가 아니라 사시는 하나님과의 실제적 관계가 그렇게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신자는 당연히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아 아는 사람이며 이미 도래한 그의 나라 안에 사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우리 삶이 때로 비극적이라 하더라도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의 나라를 소망함으로 미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나를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은 우연이겠지만 율법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우리 자신의 결함과 부패, 그리고 그것을 황급히 덮어버림으로 우리 삶이 비극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이정표로서의 율법과 그것이 가리키는 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보지 못할 때, 언제든지 우리 삶을 엄습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우리 삶은 그렇게 비극인 것이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위로를 얻으려면 율법이 가져다주는 우리 비참을 알아야 한다. 그 미움의 지평을 통합하는 자만이 사랑의 지평, 곧 참된 은혜의 지평에 이른다. 거기에만 위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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