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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그리스 신화와 로마서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에게는 두 개의 별명이 나오는데 하나는 "산양 젖을 먹고 자란 자"이고 다른 하나는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된 자"이다. 이 두 별칭 중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눈이는 가는 별칭이 바로 "나중된 자로서 먼저된 자"이다.

 

제우스에게 이런 별칭이 붙게 된 것은 제우스의 부모였던 농경의 신 크로노스(Χρόνος, Krónos)와 대지의 여신 레아(Ῥέα Rhea)와 관계 있다. 태초에 혼돈(Kaos)이 있었고 이 혼돈으로부터 대지의 여신 가이아(Γαῖα, Gaia)가 태어났다. 그리스 신화는 "무로부터의 창조(ex nihilo creatio)"를 말하는 성경의 세계관과는 달리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ex nihilo nihil fit)"는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다. 가이아는 자신이 낳은 하늘의 신 우라노스(Οὐρανός Ouranos) 사이에서 12명의 티탄신들을 낳았다. 이 티탄신들 외에 외눈박이 거인, 키크롭스(Κύκλωψ Kuklōps)와 백개의 손의 괴수, 헤카톤케이레스(Ἑκατόγχειρες, Hekatonkheires)를 낳았는데 이들을 싫어해서 땅 속 깊은 곳 타르타로스에 가두었다. 가이아는 이것을 몹시 싫어했고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는 질문을 자신의 12 남매의 티탄신들에게 했다. 막내인 농경신 크로노스가 나서서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자신이 우라노스를 이은 2세대 티탄들 중의 최고신이 된다. 그러나 가이아와 약속했던 키클롭스와 헤카톤케이레스를 놓아주지 않았고 가이아는 크로노스에게 신탁을 남겼는데 너도 니가 아버지에게 한 것처럼 니 아들에게 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두려움에 빠졌던 크로노스는 같은 티탄신이자 대지의 여신인 아내 레아(Ῥέα, Rhea)가 낳는 자녀마다 잡아 먹어버린다. 계속 자녀를 잡아 먹힌 레아는 괴로웠고 제우스를 낳고 그를 먹히게 할 수 없어서 돌하나(옴파로스)를 낳은 아들이라면서 크로노스에게 먹이게 된다. 그리고 제우스를 그레데 섬에서 숨겨 키웠으며 그래서 그의 별명이 "산양 젖을 먹고 자란 자"가 되었다. 그가 자란 후에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 게 되었고 자신의 고모이자 자신의 첫 번째 아내가 될 티탄신이자 법과 정의의 신인 테미스(θέμις, Themis)를 찾아가는데 테미스가 크로노스에게 구토약을 먹일 것을 제안한다. 테미스의 제안을 받고 레아에게 찾아와 포도주에 구토약을 타서 먹였고 크로노스는 그동안 먹었던 자신의 자녀들을 토해내게 된다. 마지막으로 옴파로스(ὀμφαλός, Omphalos)를 토하고서야 제우스가 누구인지를 알아챘다. 이로써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올림푸스 시대의 최고 신, 제우스가 되고 이런 까닭에 가장 나중에 났으나 가장 먼저 된 신이 된 것이다. 제우스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막내로서 가장 먼저된 최고의 주신이 된 것이다.

 

이 장면은 흡사 바울이 로마서에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2:9-10)이 떠오르게 한다. 12명 티탄 신의 막내였던 크로노스와 형제들 중의 막내였던 제우스는 야곱의 12 형제의 막내나 다름없으면서 채색옷을 입은 장자 요셉과 요셉의 두 아들 중 맏이인 므낫세에게 오른 손을 얹지 않고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어 축복하는 야곱의 태도,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리브가에게 임했던 여호와의 신탁, 곧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롬 9:12)에 나타난 "막내 motif"가 떠오르게 한다. 게다가 마태복음 19-20장은 "먼저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유대인과 헬라인 곧 이방인의 구원 경륜을 담고 있다. 실제 로마서의 집필 의도는 9-11장에 나타난 바로 이 구원 경륜을 설명하고자 함이기도 하다.

 

그리스 문명과 신화를 보며 델피에서 테베와 고린도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바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문명의 중심지에서 아들을 잡아 먹는 신이나 아버지를 거세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여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을 증거했다. 살해하고 살해하는 신이 아니라 목숨을 내어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했다. 육체를 버리고 하늘로 상승하는 에로스의 사랑이 아니라 육체를 입으시고 세상에 임재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말했다. 그리스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 부분 중 하나가 플라톤과 플로티누스 등으로 이어지는 영지주의였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함으로 신이 육체 입으시고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고 가현주의자가 되기 쉬웠다. 그런 이교도 문화가 가득한 그리스 한 복판에서 그들이 섬기는 아테나나 아폴론, 제우스가 아니라 사시는 참 하나님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소개했다.

 

그리스 문화권이었던 로마의 전역에는 그리스 신들과 그 신들의 로마 버전의 신들이 가득했다. 바울은 아덴에서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신전을 보기도 했다. 그리스인인들은 우주가 둥글다고 생각했다. 둥근 세상의 바깥 테두리는 바다가 있고 그 중심에 땅이 있는데 제우스가 기르는 독수리 두마리를 바다끝에서 날리면 만나는 지점이 바로 델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고린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서 항상 신탁을 구했다. 그리고 이 델피에 바로 옴파로스, 곧 제우스의 배꼽이자 어머니 가이아의 자궁이 있다고 믿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발칸반도로 건너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고린도에서 18개월을 머물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고 그들을 통해서 로마 교회의 소식을 듣고 3번째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 머물면서 이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가 이 편지에서 땅끝인 스페인으로의 전도 여행의 계획을 밝힌 것도 그리스적인 세계관 곧 델피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세계와 빛에 관한 논고>를 발표를 하려다가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을 보고는 발표를 포기했다. 갈릴레이가 정죄된 것은 바로 이 옴파로스의 부정 때문이었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는 것에 대한 부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옴파로스가 땅이나 데카르트나 현대 과학자들이 말하는 중력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했어도 여전히 유럽 사회의 옴파로스는 그리스도가 아니었고 지금도 역시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명백하게 우주의 중심은 바로 그리스도시라고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그리스인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짐으로 7인의 그리스파의 집사를 세우는 과정도 바울 신학의 반영이다. 실제로 사도행전 16장, 드로아에서 누가는 바울 일행을 만나고 바울로부터 누가-사도행전의 소스를 주로 들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갇혀 있는 동안 다른 소스도 수집했겠으나 기본적 소스는 바로 바울의 복음전도에 대한 신학을 반영하였다고 보인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그들의 형편에 맞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헛된 신화에 착념하지 않고 그 신화로부터 접촉점을 찾아 복음을 설명했다.

 

마태복음 19-20장에서 우리가 만나듯이 바울의 로마서에 나타난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원경륜은 단지 바울의 신학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복음의 구체적 내용이었다. 특히 마태는 그리스도를 새로운 모세로서 소개하고자 했다. 헤롯의 아이들을 죽이는 사건은 마태복음만의 특수이며 이 장면은 모세의 출생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에게 오신 새로운 모세이신 예수는 모세처럼 산에 앉으셔서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가르치신다. 마태복음의 다섯 번의 강화는 오경을 떠올리게 하고 이제 이 모세적인 유니버스는 유대인과 혈통적인 이스라엘에 머물지 않고 온 인류 가운데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으로 드러난다. 특히 그리스도가 맏아들이 되셔서 나중된 헬라인으로 먼저된 유대인보다 먼저된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도리를 온 지중해 모든 백성들에게 선포했다. 복음은 그렇게 온 세상의 문화 속으로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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