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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사랑의 역동과 종교적 병리

사람은 사랑과 관심을 자기에게 모으려는 성향이 있다.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하고 사랑받기를 바란다. 인간의 본성인 셈이다. 여기에 잘못은 없다. 문제는 사랑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사랑은 대상이 필요로 하고 대상의 자발적이고 때론 예상 밖의 태도들을 통해서 사랑과 인정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정상적인 형태의 사랑이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나서 자신의 필요를 울음만으로 채움받는 경험을 오래토록 한다. 라캉의 표현대로 상징계, 곧 기표와 기의를 담은 언어적 상징체계가 발달하기까지 아이들은 우는 것을 통해서 양육자와 의사소통을 한다. 언어 이전에 엄마와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베이비 싸인이라는 것도 발달하기에 언어 이전에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배고픔, 불안, 짜증 등을 엄마에게 전달할 수 있다. 몸이 불편한 아기는 짜증스럽게 울어대고 아이를 돌보는 엄마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하며 이래도 저래도 소용없는 상황에서 자기 마음에 올라오는 "짜증"을 통해서 아이가 짜증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프로이트는 "역전이"를 상담자가 가진 내면적 욕구의 내담자를 향한 전이로 설명했지만 시카고 정신분석학파의 알렉산더는 "내담자가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이라고 설명을 했다. 이 통찰은 후에 대상관계 이론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아이의 짜증은 엄마의 마음에 불러일으킨 짜증을 통해서 전달되어진다. 이처럼 언어 이전에도 인간의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성 내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타인의 필요를 빨리 간파하고 잘 배려하고 직장 내에서도 부조리에 앞장 서서 타인의 입이 되어 주는 사람은 그가 더 이전 어린 시절에 이런 종류의 결핍의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타인의 필요를 빨리 간파한다는 말은 우선 내 안에 욕구에 대해서 잘 알아주지 않는 환경에 있었다는 말이며 그것을 나라면 잘 알아주었을텐데, 그렇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양육경험의 반영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내 안의 심리적 타인은 내 욕구를 반영한다. 달리 말하면 타인은 주체의 거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앞서 언급한 사례처럼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의 필요를 적극 해결해주던 이는 그렇게 열심히 챙기고 배려했음에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보잘것없는 배려에 억울함을 느끼거나 간헐적 폭발을 경험하게 된다. 목회 현장에서 전해져오는 버선발로 나와 환영하는 권사를 조심하라는 표현은 여기에도 적용이 된다. 그런 행동과 태도는 배려받고 관심받기를 바라는 열망의 표현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좌절될 때 찾아드는 배신감을 타인에게 투영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에서 주체는 타인에게 결정권을 주지 않는다. 그들로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주체는 일종의 전능자가 되어 있으며 타인을 조정하려고 들 뿐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배려하며 친절하다. 그 사이의 주체의 욕망은 은밀히 감춰져 있다. 이런 상태는 양육과정 상 주체가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일을 책망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책망받는다고 우리 욕구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욕구는 은밀해지고 무의식이 된다. 이렇게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없게 된 주체는 그 욕망을 타인에게 투영한다. 그리고 그 타인에게 투영된 욕망은 양육자의 태도이기도 하다. 타인은 주체의 거울인 셈이다.

 

자기 욕구의 무의식화는 타인과의 관계성을 내재화한다. 자기 안에서 작동하는 무소통적인 체계가 된다. 나는 전능자가 되어 어느새 타인을 내 방식대로 통제하며 그 통제가 들어먹지 않을 때, 분노하거나 냉정해짐으로 타인을 지배하려고 든다. 그러나 사랑이란 내 욕구의 표현과 그것에 반응할 타인의 선택권과 결정권이 서로 맞물릴 때다. 성경은 이것을 언약관계로 묘사한다. 언약관계 안에서 주체인 인간은 자기 연약과 필요를 위해서 하나님과 이웃이라는 타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들의 도움과 긍휼을 청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들과 섭리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방식의 필요를 항상 채워주지 않기에 유연하게 또 다른 타인에게 요청할 수 있는 유연성과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이 열린 사실에 대한 유연한 대처가 필요하지만 은밀한 욕구을 지닌 전능한 주체는 경직되어서 자기 방식을 무한 반복하고 관철하려고 든다.

 

이 과정에서 실패의 반복은 타인과 세계와의 단절이 공고화되는 결과를 낳고 자기 정당화를 위해 "자기 의"를 쌓는 결과를 낳는다. 여기에 작용하는 것을 "신뢰"인데 주로 "동일시 과정"을 통해서 이뤄진다. 아이가 최초의 양육자와의 동일시를 통해서 타인과 자기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는 과정은 현대 문화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며 종교적 메커니즘 안에서도 여전히 작동한다. 예를 들어, 여자가 좋은 백을 원하는 것과 남자가 좋은 차를 원하는 것은 그것의 가치를 자기 가치로 삼는 동일시에 기초한 것이다. 주체는 타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일시하는 신앙의 과정도 이런 패턴 중 하나다.

 

이 힘과 추동은 상승의 힘이며 자기 가치를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신앙은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신 그리스도와의 동일시이며 이 방향은 인간이 자기고양을 위한 자연적 과정과 반한다. 십자가는 단지 죄의식의 해소와 그 카타르시스를 기반해서 자기 욕망을 해소하는 과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 판매되던 면벌부는 자기욕망대로 사는 삶이 가져다주는 죄의식에 대한 해소와 욕망을 이어가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종교였다. 이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 "자기 의"이다. 사랑과 미움의 해소를 통해서 주체는 공고해진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이런 자기완결적이며 전능적인 주체의 공고화가 아니다. 오히려 내 욕구와 필요를 충족하시는 타자이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기대어 있는 것이다. 엄마 품에 아이가 엄마로부터 모든 필요를 공급받듯이 내 모든 필요에 대해서 하나님께 그 선택권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자기의 짐을 스스로 지고 그럴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요청하되 그것을 수락하거나 거절할 권리를 이웃에게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동적으로 상대의 선택에 내 모든 운명을 맡긴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나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 진실하게 반응하는 것을 의미하며 내 이웃에게 거기에 반응하거나 그렇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언약 관계 안에서 주체는 사랑의 책임이 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듯이 이웃과 타인 역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거기에 반응을 선택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런 선택과 책임들은 앞서 언급했던 배려받기를 바라면서 배려하는 행동을 하고 그것이 되돌아오지 않을 때, 억울함과 간헐적 폭발을 겪는 삶과는 결이 다르다. 내가 책임 질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도울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잘 구분되고 정돈된 삶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 의"로 동일시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타인은 그저 내 은밀한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 타인이 자신의 자녀라해도 마찬가지다. 은밀한 욕망은 타인을 지배하고 조정하는 방식으로 자기욕망에 타인이 반응하게 만든다. 그들은 끊임없는 자기 고양의 힘에 편승한다. 타인과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하면 못할수록 자기정당화를 위해서 자기 체계를 공고화하면서 자기 성을 쌓는다. 이것이 종교적으로 작동할 때, 율법이 갖는 권위와 그 정당성을 자기와 동일시하고 거기서 의를 취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선다. 율법과 자기동일성을 강조하면서 자기에 반대했던 모든 대상을 율법으로 정죄한다. 그렇게 율법은 정당화의 도구가 되고 제사는 죄의식을 해소하는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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