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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다시 읽기①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다시 읽기①
이 주 일 (청년부 가족장/ 예수대학 강사)
들어가며 : 꼭 쉐퍼를 읽어야만 하는가?
이 글을 쓰기 전 내가 아는 어떤 분이 내게 쓴 글을 읽게 되었다. 요지는 예전에 나를 통해 프란시스 쉐퍼를 소개 받고<거기 계시는 하나님>과<이성에서의 도피>를 사서 읽어보았는데, 도무지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고 따라서 아무것도 제대로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분은 내게 어떻게 해야 프란시스 쉐퍼를 잘 이해할 수 있는지 물어왔다.(주1)
어쩌면 이 분의 고민이 프란시스 쉐퍼를 읽고자 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고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로 ‘수능’이라는 대학입학시험에 끼워 맞춰진 편협한 교육 현실 속에서‘생각하게 하는’ 교육 보다 ‘기능적인’ 교육을 받아온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기계적인 암기에는 익숙해도 ‘현실과 책을 읽어내는 방법’은 잘 모른다.(주2)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은 ‘당연한 것’이며 ‘옳은 것’이다. 즉, 일반적 해석은 옳은 것이며 그것과 다르게 ‘읽어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들은 정해진 게임의 룰 속에서 ‘얼마나 빠르게 달릴 것인갗만을 고민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달려가다가 갑자기 누가 옆에서 툭 치면서 ‘그런데 너는 왜 여기서 달리고 있는데?’라고 물어보는 순간 자기가 왜 달리고 있는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를 대답할 수 없다는 비참한 현실을 깨닫게 된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와 같은 ‘기능적 교육’에 길들여진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어려운 저자임에 틀림없다. 때로 난해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굳이 이런 어려운 책을 읽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잘만 하셨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예로 들며 신앙이란 ‘단순한 것’(즉, 지적인 깊이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믿고 싶어질 때도 있다. 
솔직히 말해 프란시스 쉐퍼를 연재하고 있는 나의 경우라고 해서 별다를 것은 없다. 나에게도 쉐퍼는 여전히 어려운 저자다. 10여년 전에 처음 라브리에서 성인경 목사님과 함께 쉐퍼를 읽었던 이래로 최근 쉐퍼 연재를 하기 위해 다시 삼부작을 집어든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내가 쉐퍼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혹시나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쉐퍼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그에 대해 정확한 대답을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쉐퍼를 다시 읽고 또 내가 이해한 만큼이라도 소개하려는 이유는 현대 복음주의 교회에 쉐퍼가 지니고 있는 강력한 중요성 때문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처럼,역사적 기독교, 다시 말해 정통적 개혁주의의 핵심 명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한다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이 말은 하나님을 ‘잘못’ 알게 되면 하나님을 ‘잘못’ 믿을 수밖에 없고,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롬10:17).(주3)또한, 잘못된 성령 운동과 신비주의 운동이 만연한 현대적 종교 상황에서는 한 가지를 더 강조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①성령의 조명하심 아래(이것은 직접 계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②하나님의 유일한 직접 계시인 성경을 ‘우리의 이성을 사용해서’ 읽고 이해함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으려면, ‘성경’이라는 언어화된 하나님의 직접 계시에 유일하게 토대를 두고 ‘성령의 도우심’과 ‘이성’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잘못된 성령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왜곡된 견해처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직접 계시’를 통해 그 분과 날마다 의사소통하며 그 분을 알고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을 수 있다. 이성이란 비록 타락으로 인해 제한되고 왜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과 ‘참되게 의사소통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도구인 것이다.(주4)
프란시스 쉐퍼의 관점에서 볼 때(또한 나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이와 같은 ‘참된 지성’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믿음의 선행 조건이라면, 참된 지성을 잃어버린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일 수가 없다! 따라서 현대 복음주의 교회 개혁의 핵심은 바로‘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참되게 회복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주5)
여기까지의 내용에 동의한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가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뭘 그렇게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인가? 너무 지나친 비판이 아닌가? 또는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문제가 많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인지,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 것인지 도저히 알기 어렵다며 한숨을 내쉬는 분도 있을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으며 믿는 대로 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한 핵심이다. 또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 참된 영광을 드리기 위한 핵심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영광을 받으신다!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 문제를 고쳐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 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아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늘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허둥대곤 한다. 
20세기(그리고 21세기에도) 복음주의 교회의 맥락에서 무엇이 문제이며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지를 짚어내는 것은 모든 문제의 핵심이 된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와 같은 핵심적 문제에 대해 답변을 준 사람이다. 그의 글이 (특히 그의 삼부작은) 결코 쉽지는 않지만, 우리가 머리를 싸매며 눈을 부릅뜨고 그의 글을 ‘읽어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의 글을 제대로 읽고 나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분명히 단 것이다.
1.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프란시스 쉐퍼는 일생에 걸쳐23권의 저작을 남겼고, 그의 편지를 모은 책 한 권과 로마서를 강해한 테이프를 풀어 녹취한 책 한 권까지 포함하면 25권을 남겼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거기 계시는 하나님The God Who Is There>(1968),<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Reason>(1968),<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1972)의 3권은 쉐퍼의 핵심 저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일반적으로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trilogy)이라고 말한다. 쉐퍼 스스로도 “이 세 권의 책이 없으면 이후의 책에 있는 여러 가지 적용들이 기초를 잃게 된다”(Schaeffer, 1972)고 말하고 있을 정도로 이 삼부작은 쉐퍼의 핵심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된다. 따라서 어렵지만 쉐퍼의 책을 읽는다면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쉐퍼의 삼부작이 그의 사상의 골자를 설명하는 핵심 저작으로 여겨진다는 점은 분명하나, 1976년에 쓴<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또한 삼부작에 버금가는 핵심 저작이며 따라서 삼부작과 함께 읽혀야 한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다. 비록 쉐퍼 전집에서 이 책이 ‘기독교 사회관’이라는 범주로 분류되어 있으나(또 그렇게 분류되는 것이 타당하나) 쉐퍼 사상의 핵심을 이해하기에 매우 훌륭한 저작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당분간 쉐퍼 사상의 골자를 소개하기 위해 삼부작과 더불어<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함께 다루도록 하겠다.
2. 쉐퍼의 ‘질문’?
우리가 성경을 읽건, 인문학을 읽건, 사회과학을 읽건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때 유용한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내용은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인가?’라고 질문해 보는 것이다. 어떤 저자든 글을 쓸 때는 반드시 자신만의 독특한 문제 의식, 즉 ‘질문’을 갖고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자 글을 쓰게 된다. 그런데 글을 읽는 독자가 저자가 지금 어떤 질문에 대해 대답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면 글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반드시 ‘지금 이 사람은 무슨 질문에 대해 답하려고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쉐퍼가 삼부작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시 말해, ‘어떤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자 하는 것이었을까?
3. 20세기 상황과 복음주의 교회
프란시스 쉐퍼는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유럽에 선교사로 건너가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시기를 보내며 서구 문명의 격변기를 모두 경험하였다. 무언가 세상이 크게 변했고, 또 이로 인해 지식인들과 노동자들(하위 계층), 그리고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고방식이 생겨났다.(주6)복음주의 교회는 여전히 기존의 방식과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고 있었으며 동일하게 전도하고 있었다. 문제는 복음주의 교회가 새로운 흐름 속에 있는 젊은이들, 지식인들, 노동자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기존에 복음을 듣고 믿던 사람들에게 성경적 관점에서 당연한 것들로 전제되었던 생각들이 새로운 세대에게는 존재하지 않거나 변형되었고 따라서 이들에게 더 이상 교회가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교사로서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복음 전도에 대한 소명감이 있었던 쉐퍼는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바뀐 것인지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몇 가지 중요한 핵심적 결론을 얻게 되었으며, 이 내용을 20세기 교회가 반드시 이해해야만 제대로 된 복음 전도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쉐퍼가 볼 때, 이러한 핵심적 내용을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복음 전도는 실패로 끝날 것이며 더 이상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로운 세대에게 가르치고 지키도록 만들 수 없을 것이었다.
따라서 ‘기독교 철학 및 문화관’ 또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쉐퍼의 삼부작은 (특히 내가 볼 때) 철학서가 아니다. 분명히 그의 책은 ‘철학’의 내용을 다루지만 철학서가 아니며, 미술과 음악 등의 ‘문화’를 다루지만 문화서가 아니다. 그의 책은 학술적 의미에서 신학서도 아니다. 그의 책은 복음을 제대로 현 세대에 전하기 위한 ‘변증학’을 설명해 놓은 책이다.(주7) 즉, 쉐퍼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20세기 상황에서 교회는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20세기 상황에서 복음 전도의 장애물은 무엇인가?’
오 늘날 우리가 처한 비극적인 상황은, 사람들이 진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영향을 입고 있지만 도대체 일이 어떤 추세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분석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독교 가정의 젊은이들은 이전의 진리관에 따라 교육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젊은이들은 현대의 진리관에 시달린다. 머지 않아 이들은 자기들 앞에 놓여 있는 여러 진리관들을 이해하지 못하여 혼란스럽게 될 것이다. 혼란한 상태는 당황스런 상태로 변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젊은이들은 압도된다. 불행하지만 이런 일들은 젊은이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목사들, 기독교 교육가, 복음 전도자, 선교사에게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해하기로는, 지식과 진리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개념의 변화는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고딕은 저자) (주8)
쉐퍼가 볼 때, 20세기 젊은이들에게 복음이 이해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진리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眞理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대략 1890년 이전의 유럽, 1935년 이전의 미국과 그 이후의 유럽, 미국은 진리에 대한 관점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주9)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글에서 다루어야 할 것 같지만,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이런 것이다. 
첫째, 절망선 이전의 유럽과 미국에서 복음을 전할 때는 사람들이 복음의 내용은 진리이거나 또는 진리가 아니거나 둘 중에 하나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말은 만약 복음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복음의 내용과 다른 것은 ‘틀린’(‘잘못된’) 것이라는 전제 속에서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을 들을 때 사람들은 이것이 ‘참된 사실’이거나 아니면 ‘거짓말’이거나 둘 중에 하나일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거나 또는 거부하기로 결정할 때 매우 진지하게 자신의 인생이 걸린 문제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복음을 믿기로 한다는 의미는 그것과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포함했다. 
둘째, ‘진리’란 적어도 절망선 이전에는 합리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다. 이 말은 어떤 명제가 진리라면, 그 명제는 우리의 이성을 통해 검증될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이지 우리의 이성과 상관없이 ‘그저 믿어야 하는’ 그런 진리가 아니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이 진리라는 의미는 단순히 ‘교회에서만 진리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또 과학적으로 정확한 사실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엷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과학적으로 사실이기 때문엷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다.(주10)
그렇다면 절망선 이후의 유럽과 미국의 젊은 세대들은 복음이 진리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진리란 ‘실제 사실과 부합하기 때문엷 진리인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의 진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적어도 우리의 이성으로 검증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첫째 진리란 A가 진리이면서 동시에 A와 반대되는 사실도 진리일 수 있다. 둘째, 어떤 사실이 진리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반드시 객관적인 사실과 부합하거나 그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신다고 믿지 않으면서도, 그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절망선 이전의 사람들이 이것을 보았다면 ‘정신분열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간단하게 이야기했지만, 바로 이 두 가지가 절망선 이후 현대인의 참 모습이며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는 변화라고 쉐퍼는 지적한다. 이와 같은 진리관의 변화는 단순하게 생각하면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작은 변화가 바로 시대를 바꾸고 교회를 오염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 변화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서구 역사의 흐름과 ‘현대’라는 독특한 시대의 핵심적 특징, 그리고 현대 교회가 직면한 상황과 현대 신학의 심각한 문제점들을 모두 간파할 수 있게 되며, ‘우리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반대로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쉐퍼가 주장하는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나오며
쉐퍼 사상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쉐퍼 읽기의 필요성과 쉐퍼의 문제 의식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쉐퍼 사상의 핵심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쉐퍼의 책을 ‘직접 읽는’ 것이다. 쉐퍼 자신의 사상을 누가 가장 잘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의 연재는 쉐퍼의 책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독해를 하기 위한 사전작업을 해두는 것이라고 여겨주기 바란다. 나 스스로도 어려운 책을 가능한 쉽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서 연재를 시작하게 된 만큼 앞으로 쉐퍼 사상의 핵심을 가능한 쉬운 말로 소개하고자 한다.그럼에도 모자란 나의 솜씨로 인해 글이 어렵게 느껴지거나 불충분하게 여겨진다면, 여러분의 질책과 도움을 바란다.
* 참고문헌
김정훈. “쉐퍼가 본 기독교 세계관의 철학적 기초.”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성인경 엮음. 1996. 『프란시스 쉐퍼 읽기』. 예영커뮤니케이션
성인경. “프란시스 쉐퍼의 교훈.”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이우재. “칸트, 헤겔, 그리고 쉐퍼의 진리관.”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주도홍. “프란시스 쉐퍼의 생애와 영성” (강의안)
Parkhurst, L. G. 1985. Francis Schaeffer. Kingsway Publications [국역: 성기문 역. 1995. 『프란시스 쉐퍼』. 두란노]
Schaeffer. F. A. 1968. The God Who Is There. Inter-Varsity Press, England [국역: 김기찬 역. 1994. 『거기 계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68. Escape from Reason. Inter-Varisty Fellowship, England [국역: 김영재 역. 1970. 『이성에서의 도피』.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72. 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 Tyndale House [국역: 허긴 역. 1973.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76. How Should We Then Live? Fleming H. Revell [국역: 김기찬 역. 198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명의말씀사]

1) 이 에 관한 나의 답변의 요지는 이것이었다. 나도 처음에 쉐퍼의 삼부작을 혼자 읽었다면 잘 이해하지 못한 채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며, 그 말은 쉐퍼는 충분한 배경지식 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저자가 아니라는 의미다. 따라서 쉐퍼(특히 삼부작을 읽으려면)를 제대로 읽으려면, 가능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최근에 프란시스 쉐퍼의 저작들을 읽고자 시작된 우리 교회 내의 작은 소모임이 있다. 김성환 형제님이 주관하는 이 모임에 참석한다면 여러 가지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프란시스 쉐퍼는 사람에 따라 처음에는 지루하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될 수도 있지만 그 터널의 끝에 다다르게 되면 이전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거대한 세상의 ‘참된 이면’을 볼 수 있는 큰 안목이 열리게 해 주는 위대한 저자임에 틀림없다. 또한, 진리관 자체가 혼돈스러워진 현재 세상에 오염된 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된 개혁주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란시스 쉐퍼라는‘해독제’를 마시는 것이 어쩌면 필수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2)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며, 교육에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과제일 것이다
3)“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장 17절)
4)언어와 의사소통의 문제는 현대 철학의 핵심이며 동시에 현대 철학이 기독교의 객관적 계시의 문제에 도전하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 프란시스 쉐퍼는 자신의 저작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다루고 있다.
5)이 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예배의 찬양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경배와 찬양’식의 교회 갱신 운동, 불신자에게 교회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는 교회 성장/구도자 예배(seeker-service) 운동, 은사와 성령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은사주의/성령운동, 교회의 사회 참여와 도덕 갱신 운동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사회 참여 운동식의 교회 개혁 방향은 모두 잘못된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고 있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6)쉐퍼가 볼 때 당시 서구 중산층의 부모들은 여기서 제외된다.
7)따 라서 학술적인 의미에서 철학, 문화학, 사회학 등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책이 쓰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저술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그의 책이 철학, 문화학, 사회학 등의 학문적 규칙에 맞게 쓰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학술서 이상의 깊이와 통찰이 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8)프란시스 쉐퍼. 1994. 『거기 계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p.14에서 인용
9)이 시기를 쉐퍼는 절망선(line of despair)이라고 부른다.
10)역 사적 과학적으로 사실이라는 말의 의미는 예수님의 부활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의미이지, 쉐퍼가 말하듯 ‘닫힌 체계의 자연 원인의 제일성’ 즉 폐쇄적 자연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는 현대 과학과 현대 역사학이 예수님의 부활을 객관적으로 ‘입증’했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