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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다시 읽기③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다시 읽기③
이 주 일 (청년부 2교구 간사 / 예수대학 강사)
들어가며
지난 글에서 나는 프란시스 쉐퍼의 삼부작 중 가장 먼저 쓰인<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내용을 소개했다. 쉐퍼가 그린<그림1>을 기억한다면, 초창기 철학이 칸트와 헤겔(절망선)을 거쳐 키에르케고르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실존주의로 발전했으며 또 이 철학이 어떻게 현대를 지배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대강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존주의가 현대를 지배하는 유일한 철학은 아니지만 모더니즘적 근대를 해체시키고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현대를 만들어내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오늘은 미리 얘기했던 것처럼 두 번째 그림을 중심으로 실존주의가 어떻게 사회 각 영역으로 확산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다.
1. 절망선의 확산
그럼 두 번째 그림을 살펴보자.
<그림2>사회 각 영역으로 확산되는 실존주의(주1)
<그림2>는<거기 계시는 하나님>80쪽에 있다.<그림1>에도<그림2>와 마찬가지로 계단 그림이 존재했지만,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그림2>는 이 계단의 의미를 좀 더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마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림을 보는 순간‘아하!’하고 전체적인 개요가 이해될 것이다. 철학이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의 사고방식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이들의 사고방식이 지식의 발전을 주도한다. 따라서 철학자들의 사고방식은 ‘철학’이라는 특수한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으로 파급된다.프란시스 쉐퍼는 철학에서 먼저 형성된 실존주의라는 사고방식(주2)이 어떻게 사회 각 영역으로 확산되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주3).
2. 현대 철학 - 세속적 실존주의(Secular Existentialism)
철학이라는 영역을 먼저 살펴보자. 헤겔을 거쳐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탄생된 실존주의는<그림2>에서 볼 수 있듯이 세속적 실존주의와 종교적 실존주의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된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는 스위스의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로 이어진다.
이들의 공통점은 객관적 토대 위에서 합리적(논리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존엄성, 의미, 가치, 도덕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명제를 끝까지 밀고 가서 절망이라는 종착점에 도달하면 허무주의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생각을 갖고 살 수 없기 때문에 근거가 없지만 논리적인 비약(도약)을 통해 비합리적으로 인간의 존엄성, 의미, 가치, 도덕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것이 실존주의다. 인간의 존엄성,의미, 가치, 도덕을 확신하기 위한 합리적 추론 과정을 포기하고 논리적 비약을 통해 믿음을 갖고자 하더라도 근거가 될 뭔가가 필요하다. 쉽게 말해서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따라서 사람들은 인간에게 존엄성, 의미, 가치, 도덕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해줄 근거로서 ‘체험’을 찾기 시작했다.
칼 야스퍼스는 이런 이유로 비이성적인 “한계 체험”(final experience)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한계 체험이란 무엇인가? 쉐퍼에 따르면, 한계 체험이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비합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언어로 설명될 수 없으며 단지 ‘체험’한 사람만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뿐이다. 무언가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지적인 근거가 없이도 우리의 삶이 의미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합리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한 남자가 있다. 이 사람은 깊은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여인을 보고 깊은 사랑에 빠졌다. 즉, 설명할 수 없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일종의 “한계 체험”을 한 것이다. 그 때부터 이 남자는 자신의 인생이 살아야할 의미가 있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을 새로운 눈(기계적인 세상이 아닌 따뜻한 인간이 사는 세상으로 보는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사람이 한 여인을 통해 느꼈던 ‘감정’이 동물들이 서로 본능적으로 느끼는‘감정’과 어떻게 다른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없다. 그저 그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이 의미있다고 느낄 뿐이다.(주4)
프랑스의 사르트르는 합리적으로 인간과 이 세상을 설명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세상은 부조리하다(an absurd universe)’라고 본다. 따라서 절대적인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여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어야 한다”(authenticate yourself by an act of the will)(프란시스 쉐퍼, 1994:32) 이해를 돕기 위해 쉐퍼가 든 예를 소개하겠다. 한 노인이 도로를 건너고 있다. 이 노인을 보고서 당신은 의지적인 결단으로 이 노인이 도로를 무사히 건너도록 지켜줄 수 있다. 당신의 의지를 통해 한 행동이므로 당신은 자신을 자신답게 했다. 그러나 반대로 그 노인을 때리고 그 노인의 핸드백을 빼앗을 수도 있다. 이 또한 당신의 의지를 발휘한 행동이므로 ‘자신을 자신답게’ 한 것이다. 쉽게 말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갗라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은 없기 때문에 당신이 자신의 의지를 발휘해서 사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독일의 하이데거는 인간이란 스스로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 늘 ‘불안(angst)’을 갖고 있는 존재라고 보았다. 하이데거는 사르트르처럼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방법이 조금 달랐다.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존재하는 ‘불안’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면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철학은 앞서 언급한 세 사람을 중심으로 세속적 실존주의의 형태를 발전시켰다. 다른 한 편에서는 언어 철학(defining philosophy, 비트겐슈타인)과 논리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라는 철학이 새롭게 태어나기도 했다.(주5)이들은 서로 다른 철학의 형태이지만, 그럼에도 근대 이전의 철학들과 비교해볼 때 이 현대 철학의 다양한 형태들은 인간에게 존엄성, 의미, 가치, 도덕을 제공해주는 ‘보편적 근거와 체계’(이제부터 보편자라는 말을 사용해 보자)를 포기했다는 점에서 모두 반철학(antiphilosophy)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쉐퍼는 본다. 이제 세상의 사고방식을 주도하는 ‘철학’은 인간에게 의미를 주는 ‘보편자’(a universal)를 합리적으로 찾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다!
3. 현대 미술의 절망선 - 인상파와 피카소
이 글을 쓰는 나는 미술과 음악에 문외한(門外漢)이지만, 쉐퍼를 이해하기 위해 이 흐름을 간단히 설명하겠다. 미술이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작가의 사상을 명제적인 언어가 아닌 ‘이미지’라는 언어를 사용해서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이렇게 본다면, 음악 또한 작가의 사상을 ‘소리’라는 비명제적 언어를 사용해서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철학에서 이루어진 ‘생각의 변화’가 미술가들에게도 일어났다. 철학에서 절망선 이전에 철학자들은 인간과 우주를 존재의 의미를 일관되게 설명해 줄 ‘보편자’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절망선 이후 칸트, 헤겔, 키에르케고르를 지나며 더 이상 철학자들은 합리적으로 ‘보편자’를 찾아낼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중세 미술가들 역시 자신의 그림을 통해 인간과 우주의 존재의 의미를 설명해 줄 ‘보편자’를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16세기의 미술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천재적 미술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이기도 했다.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의 미술 작업을 통해 단순히 그림을 그렸던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의 핵심인 합리주의로부터 출발한‘보편자’를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계시로부터 출발한 합리성이 아닌,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합리주의(인본주의)에 기초하여 그림을 통해 ‘보편자’를 보여주려고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비길만한 거장인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또한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 미술가로서 중세를 지배하던 기독교와 그 계시가 아닌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인본주의가 인간과 우주를 일관되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인간에게 참된 자유를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작업의 결과가 성공이건 실패이건 상관없이 적어도 이들은 ‘미술’이라는 영역에서 절망에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미술가들도 철학자들처럼 ‘절망’에 도달한 순간이 있었다. 쉐퍼에 따르면, 인상파로 불리는 근대 미술의 세 기둥인 반 고흐, 고갱, 세잔느가 바로 그 절망선이다.네덜란드인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아버지가 목사였는데, 그 영항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인생 초기에 신비주의적 성격을 지닌 기독교를 믿었고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에 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신학대학에 떨어지고 난 후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 자기가 믿던 기독교에 반감을 갖게 되었으며, 화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는 크리스틴이라는 매춘부와 동거를 하기도 했으며, 아버지와의 갈등과 미술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녀와 자신의 아이를 버리고 떠나게 된다. 반 고흐는 자신의 인생 후반기에 미술가들을 위한 새로운 종교 공동체를 세우려고 노력했고 고갱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었지만 성격 차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헤어졌으며 이로 인해 그의 마지막 희망인 새로운 종교 공동체가 무너지게 된다. 결국 인간에서 출발하는 인본주의 종교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면서 그는 절망했으며 자살로 생애를 마감한다. 프랑스인인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또한 ‘보편자’를 자신의 그림에 담고자 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으며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한다. 프랑스인인 폴 세잔느(Paul Cezanne, 1839~1906)는 기하학적 형태를 그림으로써 보편자를 찾고자 했으나 역시 성공하지는 못했다.
인상파 이후 등장한 천재적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1881~1973)는 입체파(Cubism) 화가로 불렸는데, 인상파인 세잔느를 응용하여 역시 미술에서 보편자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자신이 생각하는 보편자를 그리는데 성공했으나, 그 그림을 보는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즉, 피카소의 보편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피카소는 실존주의자처럼 ‘도약’을 한다. 그림 위에 “나는 에바를 사랑한다”(J'aime Eva)라고 글을 쓴 것이다. 이로써 자신의 그림이 다시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게 되었으나, 실제로 그 문구와 보편자를 그린 자신의 그림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즉,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연결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피카소 이후 현대 미술은 더 이상 보편자를 찾고자 하지 않으며,모든 것은 ‘우연’이라고 하는 현대 철학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4. 현대 음악과 현대 문화
절망선의 세 번째 단계는 음악이다. 미술을 설명하면서 절망선을 지난 현대 미술은 더 이상 보편자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다시 말해서, 절망선 이후 현대 미술은 인간과 우주는 더 이상 일관된 의미를 주는 보편적 근거와 체계로 설명할 수 없으며, 오직 ‘우연’에 따라 항상‘변화’하는 것이라고 보기 시작했다.
현대 음악도 그렇다. 20세기 초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 1910~ )는 구상 음악이라는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악기나 전자음이 아닌 자연물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소리로 만들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구상 음악은 ‘실제 소리’이지만, 아름답고 조화로운 소리가 아닌 뒤틀린 소리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고정된 것도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유동적”(프란시스 쉐퍼, 1994:56에서 인용)이라는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일반 문화인데, 소설가 헨리 밀러는 절망선 이전 시대에 이어져 오던 ‘성(性) 문화’를 해체시키는(즉, 반정립에 기초한 보편적 기준이란 없다는 것) 작품을 쓴다.또한 동성연애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이 변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남녀 관계를 반정립에 기초해 바라보던 관점을 깨뜨린 것이다.(주6)
드라마에서 존 오스본은 마르틴 루터라는 드라마 극본을 쓴다. 이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이 많은 수도원 원장이 루터에게 묻는다. “마르틴, 당신이 옳은 것을 알고 있습니까?”우리가 알고 있는 루터라면, 그리고 성경에 의지했던 루터라면 이렇게 말했어야 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드라마에서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시다.” 세상 어디에도 확실한 것은 없다.이외에도 현대 시에서 딜런 토마스, 현대 영화에서 안토니오니의 확대(Blow-Up) 등이 있다. 특히 팝음악에서 비틀즈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비틀즈는 자신의 뛰어난 대중음악적 역량을 통해 ‘신비주의적 범신론’을 전파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비틀즈를 통해 약물 복용과 신비주의를 경험하게 되었다. 
5. 현대 신학의 절망선 - 칼 바르트
이제 오늘의 마지막 영역인 신학을 설명할 차례다.<그림2>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신학은 철학에서 출발한 현대적 사고방식이 가장 늦게 영향을 미친 분야다.키에르케고르에서 시작한 종교적 실존주의는 현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본래 신학적 자유주의자였던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구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깨닫고 계시에 근거한 정통주의적 신앙을 새롭게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칼 바르트를 신정통주의자라고 부른다. 자유주의자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정통주의적 신앙을 고백했다는 측면에서 칼 바르트가 주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또한, 그의 저술들은 숙고해 보아야할 가치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철학에서 살펴보았듯이, 실존주의자는 마치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처럼 인간의 존엄성, 의미, 도덕, 가치를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근거는 없다. 쉐퍼에 따르면, 칼 바르트는 정통 개혁주의자들처럼 정통주의적(개혁주의적)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면서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합리적 근거로서의 계시인 성경’이라는 토대를 갖고 있지 않다. 즉, 바르트는 성경 전체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완전 축자 영감설)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르트는 성경은 오류가 있지만, 하나님의 계시(진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통적 의미에서 개혁주의와는 전혀 다른 성경관이며, 사실상 성경적 기독교를 벗어난 실존주의적 기독교인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종교적 실존주의를 바탕으로 복음적 신앙을 고백하는 현대 신학자들이야말로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개혁주의)를 오염시킨 주범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즉,신학에서 칼 바르트는 절망선인 것이다. 칼 바르트 이후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폴 틸리히(Paul Tillich), 불트만(Bultmann) 등의 현대 신학자들은 모두 이와 같은 실존주의적 기독교의 전제 위에 서 있다. 
나오며
철학에서 시작된 사고방식의 변화는 일반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기 어렵다. 그들은 너무 전문적이고 난해한 용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의 견해는 천재적인 미술가, 음악가, 언론인, 영화 제작자, 소설가 등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쉬운 말로 전파된다. 이것이 현대적 사고방식의 확산 방법이다. 그리스도인 또한 TV, 신문, 영화, 소설, 음악, 미술, 인터넷 등을 일상적으로 접하며, 자연스럽게 현대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바로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생활 속에서 현대 문명과 상호 교류를 하지만, 바로 그 일상생활의 영역이 현대적이고 세속적인(즉 반기독교적이며 반성경적인) 사고방식들을 전달해주는 통로인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성경을 공부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일상생활(문화)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의 말씀이 아무런 생각 없이 현대 문화와 교류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일깨워 준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장 2절) 우리에겐 끊임없는 분별이 필요하다.
* 참고문헌
김정훈. “쉐퍼가 본 기독교 세계관의 철학적 기초.”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성인경 엮음. 1996. 『프란시스 쉐퍼 읽기』. 예영커뮤니케이션
성인경. “프란시스 쉐퍼의 교훈.”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이우재. “칸트, 헤겔, 그리고 쉐퍼의 진리관.” (라브리 홈페이지 문서자료)
주도홍. “프란시스 쉐퍼의 생애와 영성” (강의안)
Parkhurst, L. G. 1985. Francis Schaeffer. Kingsway Publications [국역: 성기문 역. 1995. 『프란시스 쉐퍼』. 두란노]
Schaeffer. F. A. 1968. The God Who Is There. Inter-Varsity Press, England [국역: 김기찬 역. 1994. 『거기 계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68. Escape from Reason. Inter-Varisty Fellowship, England [국역: 김영재 역. 1970. 『이성에서의 도피』.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72. 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 Tyndale House [국역: 허긴 역. 1973.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생명의말씀사]
_______________. 1976. How Should We Then Live? Fleming H. Revell [국역: 김기찬 역. 198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명의말씀사]
Gombrich, E. H. The Story of Art. [국역: 백승길, 이종승 역. 1997. 『서양미술사』. 예경]

1)프란시스 쉐퍼, 1994, p.80
2)실존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난 연재(5회분)를 참조하라.
3)이 와 같은 분석을 시도했던 쉐퍼가 갖고 있던 일관된 전제는 다음과 같다. “그들의 사상 세계가 그들의 행동 방식을 결정한다.”(프란시스 쉐퍼, 1984:123) 인간은 기계나 동물과 달리 ‘내면 세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은 외부적 요인에 따라 ‘기계적으로’ 또는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내면 세계’가 어떤 사상(또는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행동하게 된다. 즉, 인간 행동의 결정적 요인은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을 지배하는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파악한 후, 그 세계관이 사회 각 영역에 어떻게 확산되는지를 보는 것이 쉐퍼의 분석 방법이 된다.
4)여기서 사용한 예는 야스퍼스나 쉐퍼가 사용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이 “한계 체험”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다. 따라서 야스퍼스나 쉐퍼의 주장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지 못할 수 있다.
5)언어 철학과 논리 실증주의에 대한 쉐퍼의 비판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