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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실/신앙자료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좋아한다는 이미지에 대한 성찰

바른 방향으로의 지속적 순종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좋아한다는 이미지에 대한 성찰-
김영봉 교수
어릴 적 질문: “왜 기독교인은 모두 가난할까?”
모태 신앙인인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기독교인들과 다른 종교인들을 비교하면서 꽤 심각한 질문에 마주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인천에 살고 있었는데, 좁은 골목길을 걸어갈 때면 자주 골목 좌우로 늘어선 집들을 관찰하곤 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나는 장차 출세하면 장만할 집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주의 깊게 구경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아주 이상한 현상이 내 눈에 들어왔다. 대궐 같이 큰 집의 문패 옆에서는 그 집 주인이 불자(佛者)임을 암시하는 팻말을 종종 볼 수 있었던 반면, 부자 집 문패 옆에서 교회 팻말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교회 팻말은 허름한 판자 집이나 수수한 양옥집 문패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 때가 19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나는 그 때 “부자가 되려면 종교를 바꿔야 하는가?”라고 자문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부자 집 대문에서 교회 팻말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지금 기억으로는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할 만한 집을 끝내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기독교 신앙은 부자 되게 하는 종교가 아닌가 보다”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놓고 있었다.
매우 미숙한 생각이었지만 이 질문과 결론이 교회 생활을 통해 잘 영글었다면 나는 어렵지 않게 그리고 신속하게 바른 신앙으로 도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 신앙과 부의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에 도달하는 데 매우 오래 동안 멀고 먼 우회로를 걸어야만 했다. 
나를 우회로로 인도한 것은 다름 아닌 교회였다.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키는 것은 바로 기독교인 자신이라는 말은 참 맞는 말이다. 교회 강단에서 들려지는 말씀을 통해 그리고 일년에도 두 세 차례 열리는 부흥회를 통해 나는 새로운 진실에 눈떴다. 세계 전체를 볼 때 선진국에 해당하는 나라들은 모두 기독교 국가라는 것,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축복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믿을만한 길이라는 것,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이유는 수 천년 동안 거짓 신앙에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열심히 믿고 구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라는 것을 배웠다. 더 잘 살기 위해, 더 부자 되기 위해, 더 출세하기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충성해야 한다고 배웠다. 가난은 불신앙 혹은 약한 신앙의 증거이며, 부는 신앙적 열심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배웠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스스로 도달했던 잠정적인 결론을 수정했다. 그러면 그렇지! 예수만 잘 믿으면 나도 공부 잘 하여 출세할 수도 있고, 돈을 많이 벌 수도 있고, 유명해질 수도 있고, 높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약한 건강도 좋아질 수 있고,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도 있고, 자녀들도 출세할 수 있다. 대대로 부와 권력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축복의 길이 기독교였다! 사업하는 사람이 예수 잘 믿으면 다른 사람이 다 망해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예수 잘 믿으면 기적같이 군대 징집을 면제받을 수도 있고, 예수 잘 믿으면 세무서에서 세금 사찰이 나와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가려주시기 때문에 문제없이 넘어갈 수도 있다고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입시 준비를 성실하게 하지 않았는데도 예수 잘 믿어 좋은 대학교에 합격하는 복을 받았다고 자랑했다. 부흥회에서 듣는 간증을 듣다 보면, 예수 잘 믿으면 안 되는 일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에 매우 쉽게 도취되고 열광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물어도 풀리지 않던 질문을 푸는 기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열심, 충성, 헌신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과 충성과 헌신의 정도에 따라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자. 기도를 해도 결사적으로, 목청이 쉬도록, 허리가 끊어지도록 하자. 철야도 좋고 금식도 좋다. 내 결단을 보이자! 교회 봉사도, 헌금도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간 낭비에 돈 낭비다. 내 희생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자. 하나님을 지치도록 몰아붙이자. 필요하다면 집이라도 팔자. 그 집보다 몇 배 큰집을 주실 것이다. 주의 종을 섬기는 일에 허리가 휘도록 정성을 다하자. 내 창고가 마르지 않게 해 주실 것이다. 직업은 썩어빠질 세상일이다. 적당히 하다가 때가 되면 사표를 내고 선교사로 나서자. 선교사로 나서되 적당히 재지 말고, 생명을 바치자. 
새로운 질문: “이 복이 진정한 복인가?”
그렇게 열광적으로 신앙 생활을 해 온지 30여 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꿈꾸던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나의 몸부림을 가엽게 여기셨던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 남들 못하는 유학도 하게 하시고, 고생 끝에 학위도 얻게 하셨다. 학위와 함께 신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는 영예도 얻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었는데, 이쪽 저쪽으로 불려 다니는 유명세도 주셨다. 그럭저럭 전세 빚을 다 갚아갈 즈음에 아내가 일자리를 얻으니, 통장 잔고가 서서히 불어갔다. 그 여력으로 몇 년에 한 번씩 크기를 넓혀 집을 옮겨갔다. 커 가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별로 부족함 없이 돈을 썼다. 30여 년 전 불자들의 집 대문 앞에 멍하니 서서 “왜 기독교인들은 하나같이 가난할까?”라고 자문했던 그 어린 아이가 이제 장성하여 그렇게도 목청 돋구어 갈구해 온 축복을 한 아름 받아 안고 있음을 발견했다. 여기서 내가 더 무엇을 바라겠나 싶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엄청난 축복에 대해 눈물겨운 감사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왜 그럴까? 내가 믿음이 없나? 고마운 것을 고맙게 느끼지 못할 만큼 은혜가 떨어졌나? 이 많은 복을 받았다는 사실이 왜 감사하기보다는 두렵게 느껴질까? 이것이 내가 오랫동안 추구해 왔던 것 아닌가? 기도로써 추구해왔던 대상이 아닌가? 그런데 왜 막상 그것을 앞에 두고 나는 떨고 있는 것인가? 나는 왜 지금 “내 모든 꿈을 이루었다”는 고백을 할 수 없는가?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유명해지고 더 높아져야만 그런 고백이 나올까? 이 모든 복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지금이 과거보다 더 행복하다는 고백을 할 수 없을까?
질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난 30년 동안 축복의 복음, 번영의 복음을 목청 높여 외친 결과, 이제는 “부자 되려면 예수 믿어라”는 말을 곧이들을 정도로 기독교인들이 부자도 되고 성공도 했다. 성공한 정치인의 30% 이상이 기독교인이란다. 기독교 신앙을 자랑하는 사업가들도 많다. 아방궁 같은 집의 대문에서 교회 팻말을 보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고, 뒷면에 물고기 표시를 붙이고 다니는 고급 승용차들을 보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지난 30년 동안 외쳐온 축복의 복음이 이제 현실로 나타났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 교회가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하는가? 부흥과 축복의 시대를 이끌어온 불세출의 교회 지도자들이 왜 갑자기 추한 모습을 드러내며 추락하고 있는가? 왜 거대한 돈과 관계된 범죄를 다루는 보도를 접할 때마다 핵심 인물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을까? 왜 최근의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기독교인들은 하나같이 위선적이고 비도덕적인 졸부로 그려질까? 지난 30년 동안 줄곧 부르짖어 온 복음이 가짜가 아님이 드러났는데, 잘 믿으면 성공하고 잘 살게 된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증명되었는데, 왜 이 사회는 갈수록 기독교 신앙을 외면할까? 
참된 복: “소유가 아니라 관계다!”
이 숱한 질문들, 이 많은 ‘왜’들이 하나의 대답으로 해결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난 30년 동안 교회가 선전해 온 ‘축복의 복음’, ‘번영의 복음’, ‘성공의 복음’, ‘형통의 복음’, ‘부의 복음’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복음이 믿는 자들의 욕구에 불을 질러 강력한 헌신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복음이 믿는 자들의 삶의 태도를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바꾸어 줌으로 생의 전환을 꾀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경건하고 성실하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좋은 일들이 생긴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마련하신 계획에는 영적인 영역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이고 물질적인 차원까지 포함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나름의 논리와 신학을 가지고 있다. 성경적인 근거를 대자면 많은 지면이 필요할 정도다.
문제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부’도 아니요 ‘핵심’도 아니며 ‘목표’는 더더욱 아니라는 점에 있다. 현세적인 형통과 번영과 성공이 복음의 ‘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부스러기 은총’일뿐이다. 믿음의 삶이 약속하는 복의 본체(덩어리)는 사랑과 진리와 생명이신 하나님과 사랑 깊은 관계 안에 들어가 영적인 눈을 떠 영적 실재를 깨달아 보고, 그 영적 실재에 걸맞게 살아감으로 이 땅에서 하늘을 맛보고 시간 속에서 영원을 누리는, 그리하여 이 땅에서의 삶 전체를 성화시키고 또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참된 삶,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영생은 죽고 나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이 땅에서의 육신적 생명을 삼켜 내 존재 전체를 영원한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믿음을 가진다는 말은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뜻을 넘어, 하나님의 현존에 눈을 뜨고 새로운 인식에 맞추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믿음은 삶의 질을 뜻하는 것이요, 따라서 복의 본질은 그 같은 삶의 질을 얼마나 실현했느냐에 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행복 선언’(마 5:3-12)에서 천명하신 복의 정체다.<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의 ‘복’을 논하는 장(4장)에서 나는 이 문제를 분명하게 설명한 바 있으나, 그 대강을 다시 한 번 설명하려 한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가르침 위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 ‘행복 선언’을 ‘팔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산문으로 되어 있는 11절과 12절을 3절부터 10절까지의 시적 선언에 대한 결론이라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여덟 행으로 된 3절부터 10절까지의 행복 선언을 보면, 전반부는 복된 사람의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고, 후반부는 그 사람이 받을 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덟 행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천국[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이 그들의 것이다”(3절),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을 것이다”(4절),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땅[영원한 유산]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5절), “그들이 [하나님의 의로] 배부를 것이다”(6절),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7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8절),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9절), “천국[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이 그들의 것이다”(10절). 겉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복에 대해 여덟 가지로 정의 내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정의를 여덟 번 되풀이한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복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다!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져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그분의 은총을 힘입어 그분의 뜻을 위해 살아 결국 그분의 자녀로서 인정받는 것! 이것이 복음의 ‘전부’요 ‘핵심’이요 ‘목표’다.
그런 복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여덟 행의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복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규정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영적 배고픔을 느끼는 자), “애통하는 자”(자신과 세상을 위해 아파하는 자), “온유한 자”(무력하게 당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다른 사람의 아픔에 동참하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하는 자), “화평하게 하는 자”(하나님의 샬롬을 위해 헌신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자). 이것도 역시 믿는 자에 대한 여덟 개의 서로 다른 묘사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실체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묘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 참다운 신앙인, 성숙한 기독교인은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 생각해 보라. 과연 현세적인 성공과 부와 번영을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 온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삶 속에서 과연 위에 열거한 차원 중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겠는가? 반대로, ‘행복 선언’에서 묘사한 것처럼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분의 뜻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서 현세적인 성공과 부와 번영을 볼 수 있겠는가? 많은 설교자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그럴 수 있다 치자. 정직하고 경건한 사람이 현세에서 형통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럴 경우, 과연 그 믿음의 사람이 그 성공과 부와 권력을 기꺼이 누리겠는가? 예수께서 생각하셨던 그런 사람이 만일 있다면, 설사 그의 경건한 삶을 통해 부를 얻고 권력을 얻었다 해도 그것을 ‘통해’ 혹은 그것을 ‘마다하고’ 더 낮아지고 더 자신을 비우지 않겠는가? 처음부터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주저 없이 내려앉고 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길을 가는 것은 그 좁은 길에 참된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
복음의 삶: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꽤 분명해진다. 우리는 처음부터 신앙 생활의 성격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신앙 생활 혹은 영성 생활이라는 것은 물질계와는 다른 영적 세계가 있음에 눈뜨고, 그 세계가 참되고 영원함을 깨닫고, 그 세계의 시민으로서 자신을 훈련하며 실천해 가는 삶이다. 이 물질계가 전부라고 믿고 살아가는 불신앙인들과는 삶의 동기와 방법과 목적이 전혀 달라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적 세계에 눈뜨지 못하고, 물적 세계 안에서 성공하는 수단으로써 하나님의 힘을 끌어쓰는데 열중했다. 영적 세계에 혹시 눈을 뜬다 해도, 그 세계의 신비를 즐기거나 혹은 그 세계의 초월적 힘을 끌어들여 사용하는 데 주로 관심을 두었다. 영적 세계에 눈 뜬 사람답게 새로운 삶의 동기로,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목적을 위해 살아가도록 힘쓰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실은 교회가 그렇게 오도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교회 영성을 지배했던 부흥회는 폭발적인 교회 성장의 요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번영의 복음으로 한국 교회를 침수시키는 큰 허물을 범했다. 현재 미국 기독교의 양심으로 존경받고 있는 토니 캠폴로(Tony Campolo) 박사는 2003년 미주 코스타 강사 모임에서 “번영의 복음으로 속속들이 타락한 미국 교회를 깨워 참다운 복음으로 돌아가도록 한국 기독교인들이 도와 달라”고 호소했으나, 실은 우리가 미국 교회보다 더 심각하게 번영의 복음에 빠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주된 원인은 한국 교회가 영적 세계보다는 물적 세계를 더 탐하고 즐겼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심령부흥회’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실은 ‘물질부흥회’를 해 온 지난 반세기의 부흥회 역사가 증명해 준다. 이것은 부흥사 몇 사람의 책임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목회자들은 교회의 수적, 물적 성장을 위해 그런 메시지를 요청했고, 성도들은 그런 복음을 반겼다. 다행히 신학교에서는 끊임없이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 소리를 귀담아 듣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모두 “일단 사람을 모아 놓고 나서!”, “일단 교회를 키워놓고 나서!”, “일단 부자가 되고 나서!”라고 단서를 달고 번영의 복음을 따라갔다.
그렇게 눈감고 줄달음을 쳐 온 결과, 우리는 오늘의 이 참담한 위기를 직면하게 되었다. 비종교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은 가장 이기적인 집단으로, 욕심 많은 집단으로 인식되어 있고, 교회는 이웃 주민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고, 교회 지도자들은 사회적인 영향력을 거의 상실해 버렸다. 교단마다 세계 최대의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다고 자랑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출세도 하고 부자도 되고 권력도 쥐었지만, 수상 소감을 묻는 질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로 시작하는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많지만, 여전히 교회의 실추된 권위는 회복되지 않고 있다. 아니, 갈수록 빈정거림의 정도가 높아지는 것 같다. 알고 보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선한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의 수가 절대적 우위에 있고,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일반인들의 눈과 귀에 보이고 들리는 것은 전혀 반대의 모습과 소문뿐이다. 목회자나 교인이나 결국 돈과 물질을 위해 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은 갈수록 커져만 가고 있다. 최근에 연달아 터졌던 대형 교회의 세습 사태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이 사회는 곧이 듣지 않게 되었다. 
복음의 목회: “허상에 붙들리지 말고 실상을 잡으라!”
이쯤 되면 이제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다. 교세가 약화되어 가는 현상에 대해 응급 처치 식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번영의 복음을 세련된 수사법으로 치장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교인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있는 교인들이라도 참된 복음 위에 서도록 인도하는 일이다. 목회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큰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참된 교회를 이루는 일에, 성공적인 목회가 아니라 참된 목회를 하는 것에, 교인 수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기우려야 한다. 기독교인들의 비율이 5%도 안 되었던 해방 이전과 20%를 넘는 지금을 비교해 보라. 전자를 ‘영향력을 가진 소수’라고 한다면, 후자는 ‘영향력을 잃어버린 다수’라고 할 수 있다.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바람직한가? 
성장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바르게 성장하자는 말이다. 10년의 교수 생활을 접고 목회를 다시 시작하면서 내가 줄곧 씨름하는 문제가 이것이다. 즉,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개별적 관심을 잃고 교회 전체를 생각하는 잘못에 자주 빠진다. 지난 20여 년 동안 점진적으로 쇠퇴해 온 작은 미국인 교회에 파송 받은 나는, 남아있는 자원이 다 고갈되기 전에 교회를 회복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시각을 잃고 교회만을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내가 생각하는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교회’는 허상이다. 내가 붙들어야 할 실상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다. 교회를 회복시키는 바른 길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개별적으로 대하여 회복시키는 길이다. 그것은 매우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소요되는 길이다. 대교회로 급성장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는 느린 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길에 은혜를 주신다면, 소수의 사람이라도 참된 복음 위에 서게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결과 작은 교회이지만 교회다운 일을 하는 교회로 회복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럴 때에야 교회가 신뢰성을 회복하고 진실한 선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일이 나 자신의 목회에 그리고 여러 목회자들의 목회에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때를 얻든 못 얻든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적 열정과 함께, 한 사람 한 사람을 참된 복음 안에서 회복시켜 ‘인격의 공동체’(community of character)를 이루려는 양육적 열정을 마음 가득히 품기 원한다. 목사인 나 자신이 먼저 구도적 영성 생활을 통해 참된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기 바란다. 이 길에서 끊임없이 진보하기 바란다. 그리고 이 여정에 다른 사람들을 초청하여 서로 도와 함께 살아가는 에클레시아를 이루기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의 삶과 공동체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며, 그분의 사랑을 전할 수 있기 바란다.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눈 먼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이것이 나의 목회에 대한 그리고 한국 교회에 대한 나의 간절한 기도요 소원이다. 부흥집회 몇 번으로는 혹은 이벤트 성 행사 몇 번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기도요 소원이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이 유명하게 만든 니체(F. Nietzsche)의 표현을 빈다면, “같은 방향으로의 지속적인 순종”(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만이 이 기도를 현실로 이루어줄 것이다. 아니, 우리 상황에 맞추어 이 말을 수정한다면, 우리에게는 “바른 방향으로의 지속적인 순종”(a long obedience in the right direction)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한국 교회의 희망은 이 길 외에 다른 어디에서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한숨의 원인이요 동시에 감사의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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