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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실/신앙자료

우리에게 필요한 ‘성장통’

우리에게 필요한 ‘성장통’
양혜원
언제 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예수도 자기 성격대로 믿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예수를 믿어도 원래 가지고 있던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속담에 ‘자기 버릇 개 못 준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속담의 기독교적 변형이지 싶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이 참 슬프다. 얼마 전에 번역을 마친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나무나 돌이나 대리석으로 만든 형상이 필요 없다.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다. 물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반영할 수는 없지만, 예수를 믿은 세월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더 잘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믿은 세월이 길어질수록 종교적인 면만 강화되고 인격적인 깊이는 보기가 힘든 경우를 보게 된다. 그리고 종교적인 변명 기술만 는다. 예를 들어, 계획성 없이 즉흥적으로 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인도에 늘 열려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공급해주시는 통로(도구)로 간주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닌 이상,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길고 애정을 꼭 동반하는 오랜 노력의 여정’(김진,「나누고 싶은 이야기」)이 있어야 하건만, 신비로운 기도만으로 사람의 속사정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종교적 용어로 영적 권위를 행사하려 든다. 일이 잘못되거나 고통을 받는 원인이 자신에게 있을 수 있는데도, 하나님이 고난을 주신다고 말한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요상한 것이어서, 착각을 실제인 것처럼 오해하게 하고, 실제와는 다른 해석을 내리게 한다. 클리포드 윌리엄스는 「마음의 혁명」(최규택 역/그루터기하우스 간)에서 인간의 마음이 단일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요인들을 파헤치면서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착각 증세를 일으킬 수 있는지 등을 설명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에게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상태에 대한 회의를 품으라고 요구하고 있다.…이것은 우리가 체험한 은혜가 혹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진 공상적 은혜가 아닌가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였다고 느낀 우리의 감정이 혹시 자기 정당성, 거절에 대한 두려움, 자기 만족감 때문에 야기된 착각적인 감정은 아니었는지 이것을 엄밀히 살펴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꽤 오랜 세월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이러한 ‘엄밀한’ 성찰을 요구하는 교회는 아쉽게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어떠한 경험이든 그냥 좋게, ‘은혜’로 포장하기에 바쁘고, 일을 할 때도 과정 중의 여러 가지 모순들을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큰 사고 없이 끝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뤘다’고 넘어가 버리고, 서로의 입장과 사건의 진위에 대해 차근차근 따지고 들면, ‘은혜롭지 못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교회와 교회 내의 관계의 모습이다. 다시 한 번 윌리엄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적절한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독교적 언어를 완벽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실제적인 차원에서 능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지 기독교적 언어생활을 하는 것만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실제적으로 능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나의 20대는 기독교적 언어생활을 부지런히 익히는 시기였다. 기독교 그룹 안에 속하기 위해서 그 안에서 용납되고 인정받는 언어를 익혔다. 그리고 착각적 은혜의 경험을 숱하게 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은 다시 기독교적 언어로 포장이 되었다. 나의 30대는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고 실체를 찾아가는 뼈아픈 과정이었다. 약 2년에 걸쳐 받은 상담도 그 과정의 일환이었다. 살면서 경험하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많은 것들을 손쉽고 단순한 종교적 변명이나 해명으로 포장하지 않기 위해서, 착각적 은혜의 경험을 조장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면서도 쉽게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기 위해서, 내게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스캇 펙은 「우리가 바꿔야 할 세상」(명경 역간/절판됨)에서 불필요한 고통과 치료를 위해 필수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을 구분한다. 현재의 세상에서 은혜는,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만사형통한 것, 무조건 덮어주는 것이 은혜가 아니다. 만약 은혜가 그런 것이라면, 우리에게 성화를 요구하는 교리가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예수님은 사람의 관계 사이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다(마 10:34). 이 말씀에 다른 의미도 있겠지만, 성장을 위해서는 날카로운 분석과 구분의 칼이 필요하다는 뜻으로도 나는 이해가 된다. C. S. 루이스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 서문에서, 모든 길이 결국에는 다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길은 가다 보면 계속해서 갈림길이 나오고 그 앞에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 사람의 정서상 이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진리이지 싶다. 우리는 나와 너를 구분하면서도 여전히 서로가 공존하는 길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경계 없이 하나이거나, 아니면 남남 혹은 원수이거나, 둘 중 하나다. 우리는 정중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를 극복해가는 방법을 훈련받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이고 관용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착각적 은혜 중 하나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지난 주 씨네 21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봤다. 쿠바인과의 사랑을 다큐멘터리로 담은 정호현 감독의<쿠바의 연인>개봉을 앞두고 한 인터뷰였다. 그 기사에서 정 감독의 남편인 쿠바인 오리엘비스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 물건이 상하면 굉장히 신경질을 내지만 관계가 깨지는 것에 대해선 별로 마음 아파하는 것 같지 않아요.” 글쎄…내 생각에는 마음 아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말 못하고 속으로 끙끙대다가 돌아설 수 없는 지점에서 감정적 폭발을 하고는 등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시시비비를 가리며 차근차근 관계를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들은 술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조장하는 집회나 모임으로, 한바탕 억압된 감정의 환기를 경험하고 문제는 그냥 둔 채 넘어간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면 이번에는 조금 더 강도 높은 감정적 경험을 해야 한다. 지난번 정도의 감정적 강도로는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착각적 은혜의 경험은 강화된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이런 식으로 해결하는 경우를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것이다.
스캇 펙은 이렇게 말한다. “정신치료는 삶의 고통스런 문제들을 직시할 수 있도록 방어기제들을 없애가는 과정이다.…의식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더 건강해지고, ‘구원에도 더 가까워지며’ 보다 성숙해지겠지만, 그에 따른 고통 역시 커질 것이다.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보다 잘 인식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죄와 정신적인 문제의 원인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정신적인 상태에 대해서도 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대략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고통 없는 마취제의 은혜가 아니라, 이러한 고통을 직면할 수 있게 해주는 은혜다. 그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고통을 직면하기 힘들 것이다. 이 날카로운 성찰의 칼을, 나는 지도자들이,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자신에게 들이대어 주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사회적 약자들은 이미 강자 앞에서 자신을 살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자들에게 나타나는 왜곡도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도 이러한 글에 더 잘 반응하는 사람은 정말로 성찰이 절실한 사람보다는 이미 성찰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복음과 상황>&작가 양혜원의 페이스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