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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성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성


노승수 목사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일반상대성이론을 그냥 이론적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언제 그것이 사실일지 아닐지를 제시한다. 일반상대성이론의 핵심적 주장 가운데 하나는 빛이 중력에 의해서 굴절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주장의 사실 여부를 판별할 기준을 제시한다. 태양의 뒷편에 있는 행성은 육안으로든 망원렌즈를 통해서든 관찰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개기일식 때 아프리카에서 이 별을 망원렌즈를 통해서 관찰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검증된 결과였다.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태양 뒷편의 행성이 빛을 발하고 그 빛은 태양으로 오다가 태양의 중력에 의해서 굽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가 관측할 때는 원래 행성의 위치에서 행성이 관측되는 것이 아니라 커브를 그린 각도 만큼 태양에서 벗어난 위치에서 관측이 되는 것이다. 평소에 그 별이 관측된 위치와 이 관측 상의 별의 위치가 다르게 관찰되고 이 사실은 태양에 의한 빛의 굴절을 증명하는 셈이 된다. (이 설명도 어려울 수 있다. 상대성이론이 어렵듯이...)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놀라운 점은 그가 단순히 생각만 해낸 것이 아니라 그의 주장이 사실이거나 아니거나 하는 반증 가능성의 기준을 제시한 데 있다. 칼 포퍼는 여기에 사실 큰 감명을 받게 되고, 여기에 착상하여 그의 신실증주의 이론을 펼치게 된다. 즉,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관찰이나 이론이 뒤집어 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 셈이다. 이런 조건이야 말로 진정 우리의 과학적 관찰들을 비로소 과학적이게 만든다. 
그럼 우리의 성경에 대한 신앙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어떨까? 사실 기독교만큼 역사적 종교도 없다. 기독교 문서인 성경만큼 역사성을 검증받은 문서도 없다. 예컨대, 타키투스, 호머 등의 역사, 일리아드 오딧세이는 원본이 없는 것은 물론 원본과 사본사이의 간극이 900년 이상이다. 그럼에도 역사로 평가 받는다. 사본의 종류도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이에 비해 성경은 어떤가? 신약만 두고 보더라도 3000종이 넘는다. 예수 부활에 관한 증인들이 살아 있을 때, 기록된 사본들도 존재한다. 동시에 기독교 진리가 사실인지 여부는 가름할 주장이 있다. 예수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주장이다. 즉, 그가 만약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가짜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반증 가능성의 기준을 가진 셈이다. 
인도의 힌두종교의 삼위일체 창조의 신 브라만,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쉬바 이들도 다 뜬구름이다. 누가 만나본 적도 역사적으로 검증된 적도 없다. 물론 그들이 주장할 때, 비슈누의 아바타(Avatar) 즉, 성육신으로 붓다, 인도의 고전 마하바라타 대전에 나오는 크리슈나, 심지어는 예수도 비슈누의 성육신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반증될 조건을 제시할 수 없다. 인도인들은 계시를 둘로 나눈다. 스므루티(smruti)와 스루티(sruti), 스루티는 '들은 것' 즉, 직접계시임으로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다. 인도 카스트의 최고 계급인 브라만들만 접근이 가능하다. 이를 좀더 대중적인 언어로 말하는 계시를 스므루티 즉, "기억해 낸 것"라고 하고 일반인들도 접근이 가능하다. 스루티의 대표적 경전은 베다, 브라마나, 우파니샤드 등이고 스므루티의 대표적 경전은 바가바드 기타이다. 이 바가바드 기타에 마지막 장은 인간의 구원이 결국 은총으로만 가능하니 크리슈나에게 순복(surrender)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어딘지 모르게 인도의 전통적 교리와 상이하다. 또한 도마가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인도에 도마 교회가 남아 있는데 놀랍게도 크리슈나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그리스도의 탄생 및 성장 이야기등이 너무나 흡사하다. 이름도 크리슈나, 크라이스트 너무나 흡사하다. 그래서 이 이야기 전승의 기원이 도마복음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러나 그 배경이 되는 고대 전쟁 마하바라타 대전은 역사적으로 제대로 한 번 검증된 적도 없다.
불교는 역사적 인물, 붓다를 신이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들 안에 신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가 말하는 억겁의 윤회전생의 겁은 좀 터무니 없다. 우주 어디엔가에 지구보다 큰 네모진 돌이 있다. 그런데 그 돌을 500년에 한 번 천사가 잠자리 날개보다 더 얇은 날개로 스치고 지나가는데, 그렇게 해서 다 달아 없어지면 이게 일 겁이라고 한다. 상상속에만 존재하고 검증도 불가능하다. 흔히 불교에서 서방정토라고 하는데, 흔히 극락이라고 부른다. 우리편에서 보면 서방정토는 서쪽 땅 인도인들의 땅이지만 인도인들의 관점에서 서방정토는 어디일까? 인도보다 더 서쪽, 페르시아 땅, 아님 가난 땅, 암튼 검증도 확인도 불가능하다. 붓다는 위대한 인물이다. 그의 위대성에 흠집을 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의 주장은 깨달아야 한다는데, 한 번 생으로도 불가능하고 수많은 윤회전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 교리에는 구원이 없다. 누가 붓다 같을 수 있겠는가? 세상 보통사람은 희망이 없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으로부터 대자대비 붓다의 은총에 의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것이 한국에 전래된 대승불교이다. 
마치 점성술이 자신이 언제 틀릴 지를 제시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이들 종교들은 자신이 언제 틀릴지를 제시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는 너무나 명확히 이 문제를 제시할 수 있다. 왜? 역사적 인물 예수가 바로 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의 성육신이라고 주장하며, 이 주장이 언제 검증되느냐? 그의 부활에서 검증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역사성은 나폴레옹이 워터루 전투에서 패전했다는 증거보다도,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역사적 자료보다 더 많다. 
부활이 만약 거짓 증언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있는가? 요즘 처럼 종교가 부의 원천이 아닌 시절, 핍박과 시련, 환란만이 기다리던 시절, 누가 자신이 한 거짓말을 위해서 죽겠는가? 그것도 모든 제자들이 한결같이 그럴 가능성이 있는가? 기독교는 예수 부활에 관한 역사적 증언 위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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